[박물관 순례] 국립중앙박물관① 중앙아시아관 '투루판 지역의 한문자료'

전부길 기자
  • 입력 2021.08.31 16:48
  • 수정 2021.09.0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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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투루판 지역 출토 한문 문서와 비석을 최초 공개
오타니가 조선 총독부에 남겨 두었던 중앙아시아 유물
장례용품에 숨겨진 당나라 문화

(투루판 지역의 한문자료 브로슈어.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모작뉴스 전부길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의 중앙아시아관에는 “투루판 지역의 한문자료”라는 특별한 테마전이 열리고 있다. 특히 ‘오타니 컬렉션’으로 알려진 유물 중 투루판 지역에서 출토된 한문 문서와 비석이 연구와 고증을 거쳐 처음으로 공개한다.

중국 서안(옛 장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이 실크로드이다. 둔황을 지나서 실크로드가 서역남로와 천산남로로 갈리는 지점이 현재의 중국 신장 투루판(吐魯番)이다.

(중국 신장 투루판. 촬영=전부길 기자)

7세기 당(唐)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세웠다. 유명한 고구려의 후손 고선지(高仙芝)는 쿠처 안동도호부의 장군이었다.

18세기 청(淸)에 복속되면서 다시 중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선사시대부터 줄곧 다양한 민족, 언어, 문화가 공존해왔다.예부터 이 지역을 ‘서역(西域)’이라고 불렀으며, 소설 서유기의 주 무대가 바로 이 투루판이다.

(화염산 표지판과 손오공. 촬영=전부길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투루판(吐魯番) 지역의 유물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인 오타니가 수집한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의 변방이었던 투루판은 강대국들이 군사적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행하다가 우연히 모래 속에 묻혀 있던 고대 왕국의 유적과 유물을 발견했다.

건조한 사막기후의 영향으로 문서, 직물의 보존 상태는 완벽했다. 유물이 쏟아진다는 소문을 들은 각국은 조사단을 보내고 유물들을 자국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무능한 청(淸) 정부는 변방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의 탐험대는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에 걸쳐 조사하고, 투루판 천불동의 벽화를 비롯한 엄청난 유물들과 함께 일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본은 패망했다. 일본까지 옮기지 못한 유물들은 해방을 맞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이 소장하게 되었다.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는 베제클리크 석굴벽화를 비롯해 실크로드 곳곳의 문화재를 수집했다. 1916년 이 가운데 1400여 점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됐고 이것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촬영=전부길 기자)

현재 전시중인 “투루판 지역의 한문자료”는 투루판의 한인왕조(漢人王朝)였던 고창국(高昌國)시기인 6세기 말부터 당(唐) 지배기인 7세기 말에 작성된 자료이다.

(투루판에 있는 고창고성. 촬영=전부길 기자)

▲장례용품인 시신 깔개에 붙어있던 당 관문서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230호 무덤에서 나온 이 문서는 7세기 후반 당 고종(高宗) 때의 국가재정 전반과 군사 제도에 관한 당(唐)의 관문서(官文書)이다. 당시 고창국은 관(棺) 대신에 갈대줄기를 엮은 자리를 사용하였다. 이 시신 깔개는 고창국 최고 가문의 후손인 장예신(張禮臣)에게 사용된 장례용구이다. 깔개의 앞 뒷면에는 당이 이 지역에 설치한 서부도독부(西州都督府)의 문서가 감싸져 있었다.

2019년 조사에서 시신깔개에 부착된 문서를 분리한 결과, 기존에 알려진 1종류가 아닌 2종류의 문서가 드러났다. 이것과 같은 문서의 일부는 현재 중국 신장박물관[新疆博物館]과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學]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오타니 탐험대가 부장품을 거두어 가는 과정에서 뜯겨나간 것이다.

(시신깔개에서 나온 당 관문서.사진=국립중앙박물과 제공)

▲강거사의 대장경 조성 공덕비

투루판의 중심지였던 고창고성(高昌故城)에서 발견된 ‘강거사(康居士)의 대장경(大藏經) 조성 업적을 새긴 비편’(武周 康居士 寫經 功德記 殘碑)을 최초로 공개한다. 비문에 따르면 강거사는 강국(康國, 사마르칸트, 우즈베키스탄 중동부) 출신의 소그드인(粟特人) 지도자였으나, 7세기 중반에 당나라로 귀순하여 투루판에 터전을 잡고 높은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부인의 죽음을 계기로 불경의 베끼는 사경(寫經)사업을 펼쳤다. 비석의 글자 가운데는 중국의 최초의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창제한 측천문자가 있어 무주(武周)시기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거사의 대장경 조성 업적 비문. 사진=국립박물관 제공)

▲죽은 자의 존재를 후세에 기억하기 위한 묘전(墓磚)

묘전은 무덤 주인의 이름과 이력 등을 기록한 판 모양의 벽돌이다.

당시 사람들은 후대를 위해 무덤이 허물어지더라도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묘전을 제작하여 무덤의 널방 입구나 통로에 두었다.

 

(투루판에서 출토된 묘전. 촬영=전부길 기자)

▲폐기문서를 재활용한 장례용품

투루판 무덤에서 발굴한 신발과 인형 등 부장용품들은 관청 등에서 폐기한 문서들을 재활용하여 만들었다. 문서를 꼬아서 인형의 팔을 만들거나 신발의 안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종이로 관을 만들기도 했다. 사용된 종이는 다양한 문서로 매매계약서, 처방전, 글쓰기 연습장이 나와 당시의 사회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투루판에서 출토된 부장용품들. 촬영=전부길 기자)

이제 중앙아시아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투루판에서 1500년전의 당나라를 만나고 전시실을 나가려고 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당 왕조 시대를 이렇게 만난다는 것 또다른 설레임이었고 가슴이 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실크로드 경계의 삶'이라는 부제가 이해가 안되어 박물관 담당자에게 전화를 드렸지만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다.

투루판에서 발굴된 유물들의 대부분은 한자 문화가 아닌 중앙아시아 문화와 유물을 가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굳이 투루판에서 한문자료라는 타이틀을 붙인 기획의도가 무엇일까? 물론 한자 자료가 희귀한 지역에서 발굴된 것들이라 사료적 가치는 클 것이다. 

(3층 중앙아시아관의 한문자료 테마전 전시관. 촬영=전부길 기자)

그러나 전시회 브로슈어를 보면서 자꾸만 중국이 주장하는 '자고이래 중국영토'라는 선전문구가 생각난다. 

중국의 각 지역 박물관들을 참관하면서 느끼는 것중의 하나가 있다. 일관되게 전시하지 않는 것은 중국 역사에 해가되는 것은 내놓지 않고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포장하여 내놓는다는 것이다. 

연변지역에서도 한족 유물 몇가지를 근거로 유사이래 동북은 중국 지배라는 사상을 각인시킨다. 서역지역도 마찬가지다. 언어와 문화와 종교도 다른 지역을 잠시 지배했다고 고대부터 중국에 속했다고 주장한다. 바라기는 한국의 대표적인 박물관마저도 특정지역 역사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기 위한 계략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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