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순례] 국립중앙박물관② 중앙아시아관, 사마르칸트 벽화에서 고구려인을 만나다

전부길 기자
  • 입력 2021.09.03 15:02
  • 수정 2021.10.0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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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광대한 사막과 세계의 지붕 파미르를 품은 극도의 건조지대
고구려인은 1만킬로나 되는 머나먼 사마르칸트까지 왜 갔을까?
서역(西域) 벽화에서 만나는 불교미술에 헬리니즘이 덧입혀진 간다라 미술
사라진 누란 왕국, 남아있는 누란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관, 촬영=전부길 기자)

[이모작뉴스 전부길 기자] 중앙아시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는 불명확하다.

동쪽으로는 중국 신장에서 서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카자흐 초원, 중가리아 초원, 티베트, 몽골, 아프가니스탄 북부, 이란 동부, 남러시아 초원 등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내륙 아시아'를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중국 신장과 옛 소련의 오아시스 정착지대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중앙아시아는 극도의 건조지대로 광대한 사막과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파미르를 포함한 높고 험준한 산맥들이 줄지어 있다.

(파미르 고원의 정점인 5,575미터인 카라코룸 패스, 뒤로 K2봉이 보인다. 촬영=전부길 기자)

중앙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는 주전 2-3세기경 중국 시안에서 로마를 잇는 교역의 길이자 문화와 예술, 종교가 교차했던 문명의 길이었다. 그 중간에 자리한 투루판은 수많은 왕조와 민족이 거쳐 가면서 마니교, 불교, 경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실크로드 지도.캡쳐=국립중앙박물관 브로슈어)

석굴은 불교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에서 시작하여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전래되었다. 더운 지방에서 습기와 벌레 등을 피해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아파트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다. 불상을 모시고 벽면에 부조나 벽화를 장식하면서 장엄한 분위기가 강조되는 신성한 공간 역할을 했다. 석굴에는 벽화로 불상을 그린다. 동굴 하나에 1천개의 불상이 있다고 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의 중앙아시아관 전시물 대부분은 ‘오타니 컬렉션’이다.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의 탐험대는 1914년까지 3차례 조사를 거쳐 벽화와 유물들을 반도로 불법유출했고, 1916년 이 가운데 1400여 점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했다.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한 실크로드의 유물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이 소장하게 되었다.

▲아프라시아브 벽화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인

사마르칸트의 옛 중심지인 아프라시아브에서 도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된 유적이다. 왕이나 상류층 저택의 접견실에 해당하는 방으로 정사각형 모양이다. 한 변의 길이가 약 11미터에 달한다.

서벽에는 차가니안과 차치의 사신이 와서 왕인 바르후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옷자락의 명문(銘文)에 새겨져 있다. 바르후만 왕은 658년 당 고종에 의해 강거도독부(康居都督府)의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사마르칸트의 왕 바르후만을 알현하는 각국 사신들. 촬영=전부길 기자)

서벽에 그려진 벽화의 오른쪽 끝에 새의 깃털로 장식된 모자인 조우관(鳥羽冠)을 쓴 인물이 등장한다. 『위서(魏書)』의 “고구려전”에는 ‘머리에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고, 두건의 모서리에 새의 깃을 꼽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양나라가 파견한 외국인 사절을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 신라, 백제, 가야 고분의 출토품으로 볼 때 새의 깃털이나 모형을 모자에 부착하는 장식법이 고대 한반도에서 보편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마르칸트에서 동쪽으로 수천킬로 떨어진 중국 돈황 막고굴 벽화에도 비슷한 그림이 나온다. 237호굴의 <유마경변상도>의 맨 뒷줄에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삼국시대인이 그려져 있다. 신라의 경우 조우관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중국 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도 ‘신라인은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그 날개 털을 꼽아 장식한다’는 구절이 나와 있다. 또한, 조우관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쓰던 모자의 일종으로 같은 시대에도 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형식이다.

(사마르칸트의 왕 바르후만을 알현하는 고구려 사신들. 촬영=전부길 기자)

벽화속의 고구려인은 1만킬로가 넘는 사마르칸트까지 왜 갔을까.

고구려는 중국의 수(隋), 당(唐)과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보다는 국가적인 패배를 당해 고구려를 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끊임없이 침략했다.

고구려는 계속되는 당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역제국과의 연합을 통한 ‘원교근공(遠交近攻・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 정책을 폈다. 당시 연개소문은 최전성기인 사마르칸트의 강국에 사신을 보낸다.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사신은 7세기 후반 치열해지고 있는 대당(對唐) 전쟁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고구려 외교 노력의 일면을 보여준다.

투루판에서 동쪽으로 870킬로 정도 떨어진 돈황 벽화에도 비슷한 그림이 나온다.
돈황 237호굴의 <유마경변상도>의 맨 뒷줄에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삼국시대인이 그려져 있다. 신라의 경우 조우관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중국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도 “신라인은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그 날개 털을 꼽아 장식한다”는 구절이 있어 신라인들도 조우관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우관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쓰던 모자의 일종으로 같은 시대 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형식이다.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의 서원화

천산(天山) 북쪽에 건립된 위구르 왕국은 마니교를 믿었지만, 9세기 왕국 붕괴 후 투루판으로 진출한 위구르인들은 점차 불교로 개종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도 다수 조성되었다. 당시 석가모니 전생을 소재로 한 ‘서원화(誓願畫, pranidhi scene)’가 크게 유행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 뒤로 화염산이 보인다. 촬영=전부길 기자)

서원화 중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으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베제클리크의 여러 굴에는 왕실 사람들이 공양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석가모니가 수많은 전생(前生) 중 수마티(Sumati)라는 이름의 수행자로 태어났을 때, 당시의 부처인 디팡카라(Dipamkara) 또는 연등불(燃燈佛)을 만난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수마티는 디팡카라 부처에게 꽃을 바치고, 부처가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땅바닥에 편다. 수마티의 공양을 받은 디팡카라는 그에게 훗날 깨달은 자, 즉 부처가 된다고 예언한다.

( 베제크리크 석굴사원의 서원화. 촬영=전부길 기자)

서원화단편(誓願畵斷編) 중 하나인 이 그림은 서원화의 일부분이다. 투루판 베제크리크 석굴사원에 있는 유물로 10~12세기 것인데 이 벽화 단편은 그림의 하단 오른쪽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두 인물이 여러 주머니가 담겨 있는 쟁반을 손에 든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초상화를 연상시킬 만큼 얼굴과 복장의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을 오가던 대상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원화 단편.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전을 짊어지고 여행하는 승려

투루판은 고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고, 아이딩호는 해발 –154m로 사해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낮은 곳이다. 서유기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며 유명한 화염산이 있다. 당 현종 시기 현장(삼장법사)이 천축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도중에, 투루판 고창고성에서 며칠 머물며 설법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리기로 약속했지만, 돌아올 때에는 고창국은 이미 망한 후였다.

(현장이 설법을 펼쳤다는 고창고성의 법당. 촬영=전부길 기자)

벽화는 경전을 짊어지고 여행하는 승려의 모습이다. 노란점과 붉은 선으로 장식된 검은색 천을 어깨에 걸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왼손에는 깃털 부채와 비슷한 주미(麈尾)를 들고 발에는 붉은색 샌들을 신었다. 머리 위에는 작은 부처가 있고 다리 사이에는 호랑이가 보인다. 그림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현장(玄奘, 602?-664), 보승불(寶勝佛), 달마다라 등으로 보고 있다.

(해학적인 모습의 여행하는승려. 촬영=전부길 기자)

▲누란 유물들

누란인들이 사용하였던 향로와 세발 단지, 대접과 시루, 벼루 대접, 토기편, 함 그리고 유목민들이 소금이나 물을 담았던 말가죽 주머니도 있다.

(누란 유적들.촬영=전부길 기자)

목제 기둥인 목주(木柱)는 곧게 뻗은 긴 원통형 목제를 회전시키면서 절삭구로 홈을 내고 표면을 깍아 조각한 기둥이다. 재료는 버드나무과의 사시나무 종류로 밝혀졌다. 
가죽주머니는 아래쪽이 넓고 위는 좁은 형태이다. 좁은 쪽에서부터 가장자리에 구멍을 뚫고 갈색 털실로 꿰어 신축성있게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목주와 가죽주머니.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년 9월 디즈니에서 만든 영화 <뮬란>이 개봉되었다. 영화평론가들은 신장위구르 투루판 지방정부의 촬영 협조에 감사하는 문구가 엔딩 크레딛에 들어가고, 주인공 뮬란 역을 맡은 유역비가 홍콩 경찰을 지지한 일로 인해 논란이 일어났다.

<뮬란>에서 침략자로 표현되고 있는 유연족(揉然族, 자막은 중국어 발음을 한자를 옮겨오고 한국식 읽어 유연족이라 번역)은 정확하게는 樓蘭(중국어발음: 로우란)족, 즉 누란으로 표현해야 한다.

위구르족의 집거지가 바로 엔딩 크레딛에 나오는 투루판 지구 남쪽의 로프노르 호수 주변이다. 주전 2세경에 세워진 누란 왕국(樓蘭王國)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로프노르 호수를 기반으로 어로와 수렵, 농경을 하면서 내륙에 있던 흉노족과의 완충역할도 하고 실크로드를 오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업활동도 하면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5세기경 누란 왕국은 불분명한 이유로 멸망해 버렸고, 남은 사람들이 북쪽으로 올라와 싼산왕국(鄯善王國, 현재 투루판시 선선현)을 세웠으나 그 후 흔적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 로프노르 자연보호구. 촬영=전부길 기자)

그렇다면 누란의 후손들은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가? 현재 투루판에 살고 있는 대다수는 위구르족이다. 위구르 언어는 3개의 방언이 존재하는데 그중 소수인 약 0.3%가 로프방언을 사용한다. 로프는 누란왕국의 중심인 로프노르 호수 이름이다. 곧 위구르인이 누란민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진묘수

투루판의 아스타나 카라호자의 무덤의 묘실 입구에 상상의 동물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진묘수(鎭墓獸)라 불리며 묘실 내부로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사람 얼굴에 짐승의 몸이 결합된 모습이며 당나라 시기에 유행했다.

(진묘수. 촬영=전부길 기자)

▲부처의 머리

호탄에서 출토된 소조상중 크기가 가장 크다.

얼굴의 전반적인 형태와 반쯤 감고 있는 눈의 형식적인 표현이 대표적인 불교 유적인 라와크 스투파에서 발견된 불상과 유사하다

(부처의 머리. 촬영=전부길 기자)

▲여인

투루판 지역에서 발견된 조각상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불교 조각은 헬레니즘과 로마조각을 수용한 불교미술인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추상화하고 형식화한 모습으로 재창조되었다.

이 여인의 모습은 얼굴이 갸름하고 볼과 턱은 둥글며, 눈썹, 눈, 콧날 등은 간략하고 머리카락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고 나머지는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뜨렸다. 도식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가슴 부위의 소용돌이 무늬는 갑옷을 연상시키다. 신분이 높은 여성으로 왕비로 추측된다.

(여인. 촬영=전부길 기자)

박물관 관람의 묘미는 음미(吟味)

중앙아시아실에 전시된 유물들은 그냥 지나치면 별 의미가 없다. 시대적 배경과 출처, 상황 등을 이해하면서 감상하면 감동이 백 배나 더해진다. 

실크로드의 유물들은 독특하다.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벽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벽화 속으로 뛰어들어 삼장법사도 만나고, 누란왕국도 그려보고, 1만킬로가 넘는 머나먼 사마르칸트까지 갔던 고구려인을 만나면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시대와 종교를 뛰어넘어 그들을 만나 본다면 또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관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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