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㉗] 야사리의 허그나무

김경 기자
  • 입력 2021.09.0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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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지방도로를 달리다가 눈길을 확 끄는, 우뚝 선 느티나무를 만났다. 남편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핸들을 꺾었다. 멀리서도 그 아우라가 만만치 않았는데, 가까이에 와 보니 더욱 더 가슴이 벅차오른다. 화순 이서면 야사리의 느티나무 한 쌍이다. 쌍둥이 느티나무는 보면 볼수록 생동감 넘치는 데칼코마니 작품이다. 수령 400여 년의 고목은 마을의 당당한 수호신이요, 당제를 모시는 당산나무이기도 하다.

나는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람한 나무들을 둥치에서부터 우듬지까지 훑어본다. 허공에 쫙 펼쳐진 쥘부채가 따로 없다. 둥치가 서로 단단히 붙어 있는 것은 물론, 들쑥날쑥한 가지들은 하나가 되어 커다란 초록 반원을 그린다. 반송처럼 매끈하지 않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와, 어쩜 이렇게 청청할까. 남편도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며 눈을 떼지 못한다. 아침 일찍 능주면 내리의 시아버님 산소에 들렀다가 담양 식영정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우리는 둘이면서 하나인 나무의 둘레를 따라 여유롭게 거북 걸음을 한다. 햇살에 찰랑거리는 청량한 이파리들에 눈이 부시다. 오른쪽 나무를 서서히 돌아서자, 저만치 나무 의자에 걸터앉은 샛노란 조끼 차림의 어르신들이 눈에 띈다. 아우, 노란 조끼! 나도 모르게 남편의 팔을 툭 치며 빙긋 웃는다.

벌써 노란 조끼에 푹 정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차창 밖 풍경에 담긴 노란 조끼 팀을 몇이나 만났는지 모른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왠지 호감이 갔다. 팀 구성원들은 간혹 할아버지도 끼었으나 대개가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집게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나누어 들고 한가로이 산책하듯 오갔다. 어떤 팀은 아예 마을 어귀의 정자에 오순도순 앉아 있기도 했다. 노란 조끼에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내 말을 남편이 냉큼 받았다.

일자리 창출 사업이지. 매일 세 시간씩 동네 안팎을 청소하고 한 달에 27만 원을 받는다고 하던데? 꽤 괜찮은 사업인 것 같아. 저 연세에 운동 삼아 청소도 하고 용돈도 벌고…….

맞는 말이었다. 할 일 없는 어르신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굳이 고되게 몸을 쓰지 않는 일거리 제공에다 보수까지 챙겨주다니. 노년에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선물 같은 사업임에 틀림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이 동네에 사시나 봅니다. 느티나무가 아주 장관입니다.

넉살 좋은 남편은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말문을 연다.

그람요, 울 동네여라. 근디 어디서 오셨다요?

고향은 이쪽이지만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매, 그런다요? 아따, 반갑소.

햇볕에 그을리고 주름진 진갈색 어르신의 얼굴에 금세 환한 기색이 감돈다. 두 어른신은 아예 유유자적 발 뻗고 앉은 자세다. 한 어르신은 집게로 발밑의 풀을 건드리는데 아무래도 뽑힐 것 같지는 않다.

어르신 친정은 어디십니까?

이 마을 바로 너머지라.

워낙 어르신들에게 살가운 남편은 주거니 받거니 신났다. 봄날치고 햇볕이 뜨거우나 널찍이 드리운 느티나무 그늘은 선선하기 그지없다.

아무나 이런 편안한 그늘을 누리겠습니까? 참 복이 많으십니다.

긍께요. 참말로 최고여라. 사람들은 저 나무들을 암수니 뭐니 해쌓는디, 울들은 모녀라고 본당께요. 몇 백 년을 딱 붙어가지고, 얼매나 다정허요? 남녀가 저렇것소? 저 쬐끔 작은 것이 딸이여라. 한번 보시오. 엄니가 양팔로 딸을 안아주고 있단께요.

역시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영 다르다. 큰 나무의 옆구리 쪽에서 보니 분명 안아주는 형상이다.

진짜로 그러네요. 어머니와 딸이 분명해요.

나도 모르게 어르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데, 그만 울컥 목이 멘다.

어머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불현듯 생전의 어머니, 돌아가시기 직전의 애틋한 모습이 아른거린다. 앙상한 몰골로 고통스럽게 몰아쉬던 숨소리도 들려온다. 가슴이 먹먹하다. 어머니를 안아보았던 때가 언제인가. 혼수상태에 빠진 어머니는 차마 안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힘들어 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폭풍처럼 밀려든다. 금세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든다.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벗어난다.

나는 회한에 휩싸인다. 모녀 나무들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그들이 함께한 오랜 세월, 아니 앞으로도 또 얼마나 오래오래 함께할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우리네 인생길은 왜 그토록 짧은가. 그 짧은 길에 또 이별의 아픈 길이 숨어있다는 것을 왜 모른 체했던가. 그뿐인가. 나는 언제 한 번 어머니를 안아준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어머니는 저 느티나무처럼 밤낮없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 깊고도 뜨거운 사랑의 품에서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머니의 품은 캄캄한 길을 밝혀주는 등불인가 하면 고단한 심신을 달래주는 그늘이었다. 어머니와 느티나무……. 나는 느티나무에게서 오롯이 어머니를 본다.

당신, 또 한 바퀴를 돈 거야? 이제 사진 한 장 찍어봅시다.

상념에 빠져 있던 머리가 남편의 목소리에 깨어난다.

성님! 이제 그만 돌아갈께라?

벌써? 쫌 더 있다 가야제.

아따, 성님은 꼭 시간을 지켜가며 노신당께요.

어르신들의 정담은 끝이 없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귓가에 모기소리를 낸다. 문득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이리저리 코를 벌름이던 나는 어르신들의 온화하고 따뜻한 얼굴과 마주한다. 삶의 향기, 그들의 향기였다. 평생을 논밭 일구어 자식 키우고서, 마지막 인생마저도 담담하게 고향을 지키는 어르신들. 당산나무와 똑같이 닮았다. 서로 붙안고 있는 모녀나무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나는 어머니 나무 둥치를 두 팔 가득 안아본다.

아주 다정한 모습이 보기 좋은데? 자, 찍어요.

남편의 목소리가 드높은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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