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 75] 조지아_크베브리 항아리가 뒹구는 와인의 고향, ‘시그나기’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10.27 10:43
  • 수정 2021.12.1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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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베브리 항아리가 뒹구는 와인의 고향, ‘시그나기’

조지아인들은, 와인 3잔이면 곰Bear이 되게 만들고,
그 다음 3잔은 황소Bull가 되게 만들고,
그 다음 3잔은 새Bird가 되도록 만든다.

(어느 집 마당에나 널려있는 포도. 촬영=윤재훈 기자)
(어느 집 마당에나 널려있는 포도.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인 시그나기로 가는 마슈르카는 카헤(케)티(Kakheti) 지방의 주도인 텔라비를 거쳐서 간다. 이제 시그나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트빌리시에서 50여 킬로 떨어진 이곳은 알라자니(Alazani) 강이 흐르는 계곡에 위치하며, 동서로 잇는 고대 실크로드의 길목이다. 카프카스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알라자니 강 왼쪽의 동카케티 지방은, 조지아의 대표적 와인 산지로 그 중심에는 카헤(케)티 지방의 행정 중심지 <텔라비>가 있다.

이런 이유로 8세기에 도시로 발전했고,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이 지역을 지배한 카헤티 왕국의 수도로 번성하였다.

보통 9~10월에 포도를 수확하며, 500종이 넘는 포도를 재배한다고 한다. 미사 예식 때는 꼭 포도주가 필요했기 때문에, 수도원이나 성당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와이너리(winery, 양조장)가 있다.

술은 자연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즐겁게 하면서 흐리게 하고 감정적으로 만드는데, 수행자들이 사는 곳에 술이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다. 불교에서도 가장 금기시된 것 중의 하나가 알코올이 아닌가? 새삼 술에 취해 천 년 고찰 내장사 대웅전에 들어가 불을 지르거나, 도박으로 생을 탕진하는 큰 스님들의 만행이 떠오른다. 

조지아인들은 565가지 포도종의 와인을 마시며, 신에게 찬미하며 마치 와인을 물처럼 마신다. 조상의 피와 동일시해 포도나무 아래에 묻기도 한다. 또한 건조하고 높은 기온에 당도가 높은 과일들의 천국이다.

(삶이 기도다. 촬영=윤재훈 기자)
(삶이 기도다. 촬영=윤재훈 기자)

조지아 정교회는 365일 24시간 결혼이 가능하다고 하며,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성당에는 1000년의 역사를 이어 온 와인 저장소가 있다. 50m가 넘어 보이는 높이의 육중한 대성당은 위압감이 든다. 성당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은 마치 요새와도 같으며, 주변에는 포도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서로 다른 품종들로 보이는데, 족히 100여 종은 넘을 것 같다.

성당 주변에는 유적들이 무너져 세월 속에 낡아가고 있으며, 16세기에 왕이 사용했다는 여름 궁전과 목욕탕은 다시 찾아올 옛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성당 안에는 회벽칠이 벗겨진 프레스코화들이 햇살을 받아 선명하고 웅장하다. 조지아를 건국한 성 조지가 용을 격퇴하는 모습의 벽화도 있다.

그레미 성당에는 이 지방에 살았던 성주와 관료들이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낡은 성당은 단아하다.

(와인과 백만송이 장미의 고향, 시그나기. 촬영=윤재훈 기자)
(와인과 백만송이 장미의 고향, 시그나기. 촬영=윤재훈 기자)

드디어 이름부터 황홀한 <시그나기Signagi>에 도착한다. 10여 명을 태우고 온 마슈르카가 한적한 공터에 선다. 풍경은 이국적이다. 해발 800미터의 구릉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카케티Kakheti 주에 속하며, 약 1.251㎢2의 넓이에 인구는 3만명 가까이 된다.

아름다운 코카서스 산맥과 알라자니 계곡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파스텔톤의 집들이 코카서스의 웅장한 산맥 속에 잠자듯이 누워있고 바람은 서늘하다.

어디선가 보글보글, 와인 익은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조약돌이 빼곡하게 박힌 소박한 길을 따라 양쪽으로 집들이 늘어서 있고, 어느 집 문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느릿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8세기 ‘에레클레(Erekle) 2세’가 페르시아 침략으로 전쟁을 피해 온 사람들을 위해 견고한 성벽을 쌓아 이 마을을 만들었다. 그래서 시그나기라는 이름도 터키어에서 온 대피소, 피난처(Shelter)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심한 지역으로 와인생산의 중심지답게, 마을 끝자락에는 와인셀러들의 샵도 있다.

실크로드의 길목이라 19세기 최고의 무역거점이었으며, 거리에는 아주 오래된 소련식 차인 <라다>도 가끔씩 보인다. 이 산간지방은 와인으로 유명하지만 카펫 장인들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카펫을 만드는 상인들의 조합까지 있다.

(시그나기 박물관 뜨락의 ‘깐지를 든 타마다’. 촬영=윤재훈 기자)
(시그나기 박물관 뜨락의 ‘깐지를 든 타마다’. 촬영=윤재훈 기자)

가을이 되면 누구나 와인을 담은 나라, 그래서 그들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이 부여한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기르는 포도의 종류만 해도 565종이나 된다고 하니, 와인 역사가 조지아의 정교회 역사보다 훨씬 길다.

특히나 그들의 와인 사랑은 대단한데, 성찬식이나 축제, 결혼식 등 실생활에서 와인을 빼놓지 않는다. 그리고 잔치를 빛나게 하기 위해 ‘타마다(Tamada)’라는 주관자를 뽑는데, 뽑힌 사람들은 축하공연이나 참석자들의 인사말 순서 등을 정한다.

또한 ‘건배 제의’를 주관하는데, 와인을 담은 잔을 들어 일치된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축제를 한껏 고조시킨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만든 ‘깐지’라고 부르는 각배(角盃)를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 타마나상까지 발견되어, 조지아가 와인의 발원지임을 알려주는 유물이 된 셈이다.

조지아는 세계적인 장수국가인데, 모두가 와인을 즐겨 마신다. 이들이 와인을 신성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지아인의 삶은 와인, 그 자체’인 것이다.

(노점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노점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정통 조지아 주도는 3B로 표현한다.

“조지아인들은, 와인 3잔이면 Bear(곰)이 되게 만들고
그 다음 3잔은 Bull(황소)가 되게 만들고
그 다음 3잔은 Bird(새)가 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취하면 스스로 잔을 내려놓아야 한다.”

조지아 와인의 대표적 브랜드인 <사페라비Saperavi>와 <찌난달리Tsinandali>, <무쿠자니Mukuzani> 등은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또한 대표적인 보드카로는 보통 35도에서 70도까지의 <차차Chacha>가 있는데, 이 술은 그루지야 농가에서 옛날부터 우리의 밀주(영어Moonshine, 러시아어Samogon)처럼 담가 먹던 술이다. 보통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찌꺼기(포도껍질+씨+줄기)를 증류하여 만든 과실주인데, 도수가 높고 색깔이 투명하여 ‘그루지아 보드카’ 또는, 포도로 만들어서 ‘그루지아 브랜디’라고도 불린다.

와인는 돼지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다. 포도나무 가지가 타고 난 뒤의 숯으로 구우면 냄새가 배어있어 더욱 맛있는데, 소금간을 해도 맛있다. 또한 빵으로 고기를 잡고 빼야, 빵에도 고기 맛이 배어 맛있다.

(코카서스 산맥 속에 사는 조지아 인의 모습.촬영=윤재훈 기자)
(코카서스 산맥 속에 사는 조지아 인의 모습. 촬영=윤재훈 기자)

게스트하우스에 막 들어가니 침대가 몇 개 가지런히 놓여있다. 어린 청춘 남녀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데, 여자는 19세이고, 청년은 20세의 독일 청춘들이다. 한참 사랑에 빠져 서로 정신을 못 차리는 듯하다. 닿기만 해도 불이 타오르는 성냥불 같은 시기가 아닌가.

(조지아 식탁. 촬영=윤재훈 기자)
(조지아 식탁. 촬영=윤재훈 기자)

부엌으로 내려가지 거동이 약간 불편해 보이는 주인 할머니가 씽크대에서 무언가를 씻고 있다. 의자를 잡고 위태로이 걷는데,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뒷방만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는가? 한 삶의 존재 이유로서 나는 잉여인간이 아닌, 아직 온전하게 살아있다는 존재가치를 보여주어야 할 게 아닌가.

젊은 날에는 생사(生死)에 대한 사유들이 다른 사람의 일로만 느껴지더니, 갈수록 그런 사유들이 온전히 나의 삶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2층에서 마을이 잘 보인다. 지붕들이 대부분 와인빛을 닮았다. 멀리 언덕 위에 조지아 여왕과 관련이 있다는 <사마리 교회>도 보인다.

식사를 해주는데 한 끼에 7라리씩이다. 이 지역에서는 가지가 많이 나오는지, 여러가지 방식의 가지요리들이 많다. 심지어 집집마다 다른 행태의 <가지요리>를 먹을 정도라고 한다.

가까운 이란도 가지요리를 즐겨 먹지만 으깨서 만든다. 때문에 거의 형체가 없어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아, 그 맛이 덜한 것 같았다. 가지도 요리를 잘 하면 고기의 질감까지 난다. 어디선가 그런 가지요리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간단하게 나오는 식사는 썩, 좋지는 않다.

(짚플라잉(Zip flying). 촬영=윤재훈 기자)
(짚플라잉(Zip flying). 촬영=윤재훈 기자)

갑자기 눈 앞으로 뭔가 쑥, 지나간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짚플라잉(Zip flying)이다. 보드베 수도원을 가는 산 허리에서 마을까지 내려온다. 약 400미터 정도의 거리를 3분여 내려오는데, 30라리(13,200원)이다. 저녁때가 되자 타는 사람이 제법 많아진다.

(버기카. 촬영=윤재훈 기자)
(버기카. 촬영=윤재훈 기자)

마을광장으로 나오니 작은 ‘버기카(작은 차)’들이 쭉 서 있는데, 가격이 비싸다. 2~30분 정도 타는데, 1인당 30라리를 받는다. 짚플라잉 가격과 같다. 이제는 고물차가 된 소련 식 <라다>가 얕으막한 마을 길을 올라가는데, 생각보다 매연이 안 나온다.

저녁이 되자 현지인과 여행자가 섞여 거리가 약간 소란스러워진다.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 보니 전부 작은 조각돌를 깔아 고풍스럽다. 고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머나먼 낯선 산촌마을 와인의 고향, 오늘 밤 이곳에서 코카서스 산맥으로 넘어가는 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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