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건희의 산책길㉙] 윤석화의 ‘자화상Ⅰ’…“나는 배우입니다”

천건희 기자
  • 입력 2021.10.29 11:53
  • 수정 2021.10.2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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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석화의 50년 연기인생이 농축된 모노드라마
산울림 소극장 무대에 11월 21일까지 올려져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산울림 소극장’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이모작뉴스 천건희 기자] 추억이 담긴 공간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을 때, 반갑고 고맙다. 지난 10월 21일, 홍대 입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윤석화의 모노드라마 <자화상Ⅰ>을 관람했다. 산울림 소극장은 임영웅 연출가가 연극을 제대로 하기 위해 살던 집을 극장으로 설계하여 만든, 1985년에 개관한 70여 석의 소극장이다. 작품성이 높은 연극을 통해 수많은 연출가와 배우들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소극장 연극의 신화를 만들어낸 소중한 문화공간이다.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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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화의 <자화상Ⅰ>은 연기 인생 50주년을 앞둔 배우 윤석화가 자신의 무대와 인생을 돌아보기 위해 마련한 ‘윤석화 아카이브’ 시리즈의 첫 번째 공연이다. 윤석화가 산울림 소극장에서 1980~90년대 했던 공연 중 세 편을 골라 명장면들로 직접 연출, 구성하고 혼자 출연하는 것이다.

소극장 산울림은 36년 전, 처음의 모습 그대로이다. 지하 1층 공연장으로 내려가는 벽면에 극단 산울림의 연대기와 배우들의 흑백 사진이 붙어있어 시간의 역사가 느껴졌다. 원형 좌석으로 유난히 객석과 가까운 무대 위에 작은 의자 한 개가 덩그마니 놓여 있다. 파란 막 뒤가 밝아지면서 수화(手話)와 함께 ‘나는 배우입니다’로 시작된다. 윤석화 배우의 특유의 톤이 가슴을 울린다.

나는 배우입니다.
50년 가까이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무대 위의 불빛과 갈채가 화려할수록
그 뒤안길의 그림자는 길고
낯설고 외로운 길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부를 노래를 꿈꾸어 봅니다.
그 담대한 자유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첫 장면은 1988년 공연한 <하나를 위한 이중주>로 인생의 절정기에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음악을 포기해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절망과 정신과 의사와의 팽팽한 갈등을 연기했다. 윤석화는 목소리만 들리는(배우 김상중 녹음) 정신과 의사에게 좌절감을 부정하며 냉소주의로 치료를 거부하는 복잡한 감정을 보여주었다. 짧은 순간에 의상을 갈아입고 휠체어로 이동하며, 표정으로 몸짓으로 빨려들게 만드는 연기는 놀라웠다.

두 번째 장면은 1989년 공연한 장 콕토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한 여자가 전화로 죽어가는 사랑을 구해보려는 기나긴 독백이다. 언제 끊길지 모르는 전화에 매달리는 사람의 안타까운 심정이 전달되어 가슴 아팠다.

세 번째 장면은 1992년 산울림 소극장의 히트작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 35세 가수인 엄마가 사춘기에 접어드는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당부이다. 윤석화는 딸의 목소리까지 연기하며, 눈물 흘리며 열연을 펼쳤다. 나는 좋은 엄마였나? 과연 딸에게 이런 말들을 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사랑하는 딸이 엄마보다 더 나은 여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진심을 담아 윤석화는 노래를 불렀고, 관객들은 공감과 격려의 큰 박수를 보냈다.

배우 윤석화는 30대에 맡았던 대표적 역할을 60대에 재연하며, 90분 동안 다양하게 변신하면서 관객들이 극 중 인물에 몰입하게 하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커튼콜에서 산울림 무대에 서게 한 임영웅 연출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연극을 꿈꾸고 도전하는 사람을 위한 공간인 소극장 산울림의 역사를 지켜나가고 싶다고 했다. 이번 공연에는 윤석화의 연극 동료들이(21일은 유인촌 배우) 일일 하우스 매니저로 봉사에 참여해 관객에게 직접 프로그램북도 나눠주고,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를 해주어 흐뭇했다.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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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소극장은 임영웅 연출가의 뒤를 이은 임수진 극장장과 임수현 예술감독을 통해 역사와 전통, 그리고 소극장의 미래를 이어가고 있다. 극단과 소극장에 이어 갤러리, 공방을 합친 ‘산울림 아트 앤 크래프트’를 2층에 열었고, 문화예술 전반을 교육하는 ‘산울림 아카데미’도 운영한다. 또한 산울림만의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고전 문학을 연극으로 각색한 ‘산울림 고전극장’, 예술가의 삶을 편지 낭독과 라이브 음악으로 풀어낸 ‘편지 콘서트’를 이어가고 있다.

연극 관람과 함께 소극장 산울림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아카이브 전시 <건물의 시간>을 1층 카페와 2층 ‘아트 앤 크래프트’에서 관람할 수 있어 기뻤다. 전시장에는 <위기의 여자>, <목소리> 등 대표작들의 연도별 포스터와 팸플릿, 기사 스크랩, 대본 등 추억을 소환하는 자료가 많았다.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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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이 지금까지는 연극을 통해 말해왔다. 앞으로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양한 분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연장이 됐으면 좋겠다. 산울림에서 공연을 보든, 전시를 보든, 음악을 듣든 이곳에서의 시간이 좋기를 바란다.

임수진 극장장의 바람대로 소극장 연극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배우와 함께 호흡하며 연극 관람을 만끽한 좋은 시간이었다. 소극장 산울림이 50주년을 넘어 100주년으로 잘 이어지기를 응원하는 마음이다. 젊은 시절로 추억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을 주는 윤석화 <자화상Ⅰ> 과 산울림 아카이브 <건물의 시간> 전시는 11월 21일까지 이어진다.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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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소극장에서 홍대입구역까지 걷는 발걸음이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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