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작 성공수기] 아름다운 도전...장려상 '이철형'

김남기 기자
  • 입력 2021.11.0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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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경상남도에서 실시한 제1회 신중년 인생이모작 성공수기 공모전 수상작품을 연재한다. 연재될 수상작품들은 퇴직 후 삶 준비, 재취업 성공사례, 사회공헌활동, 재능나눔 경험 등을 공유하고, 신중년 세대의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엿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아름다운  도전

장려상 '이철형'

오늘도 나는 도전을 한다. 인생 이모작 성공사례 수기 공모전에 응모를 한다. 내 삶에 그럴싸한 성공사례는 없다. 거짓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성공사례가 아닐까? 일반 서민들은 평범하게 살아간다. 평범한 삶 속에서 계속하는 도전은 아름답다. 삶을 흥미롭고 의미 있게 한다. 아기는 9개월이 되면 걸음마를 시작하고 12개월이면 말하기를 한다. 삶은 도전이다. 무언가에 계속 도전하며 살아간다.

어쩌다 정년이 되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 생활은 57세가 되는 2007년으로 끝났다. 준비 없이 맞은 정년퇴직이었다. 첫째 아들은 자립을 했지만 둘째는 이제 겨우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대학 2학년이었다. 그것도 비용이 만만찮은 서울 유학생이었다. 인생이모작의 높은 벽이 눈앞에 다가왔다. 재취업은 절실하고 시급했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든든한 버팀목은 고용센터였다. 재취업 활동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받으며 고용정보 시스템인 워크넷에 등록을 하여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 나는 중공업 기계분야의 1세대로 30년의 전문경력이 있었다. 인생 일모작이 이모작을 위한 도전의 바탕이 되었다.

(625 피난민수용소.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출생부터 도전이었다. 6.25 전란의 빗발치는 총탄속에서 세상을 향해 울음보를 터트렸다. 범이 내려온다는 깊은 산골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덮쳤다. 밤마다 범 대신 빨치산이 마을에 내려왔다. 토벌작전이 사흘 밤낮으로 벌어진 후 총성이 멈추었다. 도전은 계속되었다. 전쟁의 폐허에는 가난이 도사리고 있었다. 외국에서 원조받은 강냉이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흉년이 들면 산에서 칡을 캐 먹고 시래기죽으로 고픈 배를 채웠다. 흰 눈을 보고 쌀밥을 소망하며 한 마리 순한 고라니처럼 산과 들을 쫓아다녔다. 배고픔이 서러워 오히려 정겨웠던 농경시대는 끝이 났다. 산업화 시대의 큰 물결을 따라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갔다. 변화의 물결 속에 도전을 했다. 해변의 간척지에 세운 공장의 직업훈련소 기숙사로 들어갔다. 중기계 생산공장이었다.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조차 잊은 채 일속에 파묻혔다. 육중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에 밤을 잊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날 갑자기 중화학공업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과다한 해외 차관에 허덕이던 회사를 국가 차원에서 정리를 했다. 기계 소리는 멈추고 몇 개월째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정들었던 동료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사원을 가족처럼’이라는 현수막을 바라보며 이 회사는 내 회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유니폼과 회사 이름이 바뀌었다. 세 번째 유니폼과 회사 이름이 바뀌고 나서야 어렵사리 매듭이 지어졌다. 나는 현장관리자가 되어 생산관리 업무를 수행했다. 이 땅에 중공업 입국이라는 도전과 수난의 역사가 이루어졌을 때 갑자기 정년이 다가왔다.

ⓒ게티이미지뱅크

실업급여를 받았다. 매월 23일이면 월급처럼 꼬박꼬박 통장으로 고맙게 들어왔다. 부담 없이 취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워크넷에서 사람을 구하는 업체에 지원을 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마침내 A 중소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중공업계열의 중소기업에는 인재가 귀했다. 자주포의 차체 생산 신규사업팀장이었다. 명함은 그럴싸했지만 힘든 자리였다. 100여 종의 특수강판 부품을 수주와 연계하여 생산하는 일이 주요 과제였다. 20여 명이 되는 작업자를 훈련시키고, 0.1mm 이상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생산기술을 정립해 나갔다. 내비게이션 없이 도심의 길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결품과 불량의 반복이었다. 납품받는 대기업으로 부터 계속되던 충고 끝에 경고를 받았다. 혼란 속에서 열정을 쏟은 하루하루가 1년이 되었을 때야 안정이 되었다. 어린 시절 배고픔을 견뎌낸 헝그리 정신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3년이 되었을 때 소임은 끝이 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게티이미지뱅크

두 번째 재취업에 도전했다. B 중소기업으로 갔다. 이번에도 신규사업팀장이었다. 굴삭기 차체부품 생산이었다. 철판을 절단하여 가공하고 용접하는 1천여 종의 부품이었다. 수주와 연계한 반복생산이었다. 생산관리 시스템의 도입과 수십억의 설비투자가 주요 과제였다. 납품처인 외국기업에서 운영하는 세계적 수준의 적기 공급 생산시스템을 도입해야 했다. 수십억의 투자비를 절감하는 방안을 찾느라 밤새워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신규 사업의 개발과 정착을 위하여 자신을 불사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3년이 다 되어갈 즈음 회사가 또 다른 신규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먼 지역으로 이전을 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 온 것 같아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실업급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옛 동료가 연락을 했다. 작은 공장을 임대하여 운영하는데 함께 일하자고 했다. 여러 회사의 각종 부대설비를 만들어 납품하는 일이었다. 동료는 수주와 설계를 하는 사장이었다. 나에게 공장장의 호칭을 주며 설비를 만들어 설치하는 일을 맡겼다. 사원 한 명을 포함하여 총 3명이었다. 수주한 설비를 3개월 동안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납기를 맞추어 공사를 끝냈다. 생계가 어려워졌지만 임금을 주지 않았다.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여 차일피일 미루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준 봉사활동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네 번 넘어지고 다섯 번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실업급여는 생활을 버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워크넷을 통하여 일자리를 구했다. 고용센터는 내 인생 이모작을 받쳐 준 고마운 기관이었다. C 소기업으로 갔다. 가업으로 물려받은 여사장이 면접을 보았다. 최저시급 5210원으로 월급여는 1백 4만 2천 원이었다. “우리 회사의 정년은 70세입니다.” 그것은 인력난에 허덕이는 소기업 여사장의 대처법이었다. 근무인원은 나를 포함하여 총 5명이었다. 공작기계 수리업체의 자재창고 관리업무였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자재 수불의 기본 업무에다 시작과 종료 시의 공장 청소와 수리 기계의 세척까지 했다. 사정에 따라서 온갖 허드렛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어렵사리 2년이 지나가고 낯선 환경과 일이 익숙해질 즈음이었다. 어느 날부터 급여가 나오지 않으면서 서너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전원 미지급 상태였다. 여사장은 허둥대고 있었다. 부도 직전의 회사를 그만두었다. 부도 앞에 흔들리는 중소기업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아프리카 오지를 탐험한 느낌이었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

어느새 68세가 되었다. 아직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든가. 막내인 둘째까지 취업을 하고 결혼을 했다. 내가 짊어지고 온 가족 생계의 짐을 절반쯤 내려놓으니 홀가분해졌다. 그동안 공장의 기계들과 함께 살아왔다. 열심히 일했다. 한 눈 팔지 않고 출퇴근을 하며 일속에 파묻혀 온 40년의 시간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앞날이 뿌연 안개 속에 막막했다. 산에게 길을 물었다. 입산수도하는 수도승처럼 배낭을 등에 지고 산길을 걸었다. 숨 가쁜 오르막을 오르면서 주저앉아 버리고 싶기도 했다. 산 위에서자 시야가 확 틔었다. 다시 도전해보자.

이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자. 가장의 역할에 묻혀 잃어버린 나를 찾아보자. 산속의 방황을 끝내고 책속에서 길을 찾는다. 마을 도서관으로 간다. 우선 출근할 장소가 있다. 투명유리의 창가에 앉아서 책의 묵은 향기에 묻혀 시간을 잊는다. 혹시 세상의 풍파와 거리가 먼 꿈속의 무릉도원이 여기가 아닐까. 나의 성숙한 발전을 위해서, 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그동안 거리가 멀었던 인문학과 철학과 역사책을 읽는다. 지혜와 통찰력을 얻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한다. 떠나고 싶으면 여행 견문록으로 여행을할 수도 있다.

(2019경남문학 신인상 수필부문에 이철형씨가 <어머니의 매듭>으로 등단. 사진=이펄형 제공)

2년 전부터 도서관의 시니어 독서회에 나간다. 매월 둘째 주는 내 삶의 글쓰기를 하고, 넷째 주에는 독후감 발표와 독서토론을 한다. 열 명 정도의 회원들을 만난다. 새로운 환경에서 배움을 시작하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진다. 행복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겸손과 배려를 익히고 위안과 치유를 받는다. 19년에는 수필로 지방 문학지에 등단을 하기도 했다. 회원들과 지도 선생님의 축하와 격려를 온몸으로 받았다. 인생이모작의 알찬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나의 아름다운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경남문학상 신인상 상패. 사진=이철형 제공)

귓전에 속삭이는 봄비를 맞으며 오늘도 도서관으로 간다.

 

 2019경남문학 신인상 수필부문에 이철형씨가 <어머니의 매듭> 외 2편으로 등단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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