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 76] 조지아_와인의 고향 '시그나기', 문화예술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12.16 11:16
  • 수정 2021.12.1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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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고향, ‘시그나기’

한 외로운 화가가 있었네
그에게는 집과 캔버스도 있었지
그런데 그는 장미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을 팔았네
그림과 피도 팔았네
그리고 모든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사들였지

(청명한 코카서스. 촬영=윤재훈 기자)
(청명한 코카서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조지아에서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한 카헤티(Kakheti)지방, 그중에서도 주도인 텔라비(Telavi)와 ‘시그나기(Sighnaghi)’가 와인의 명지(名地)로 잘 알려져 있다. 비옥한 코카서스 산맥의 토양과 흑해 연안에서 불어오는 온화하고 수분 가득한 바람은, 좋은 품질의 포도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조지아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와인을 마시며,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와인을 내놓는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어디를 가나 포도나무 문양의 장식품이 넘쳐나고, 국가를 상징하는 십자가 문양도 탐스런 포도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와인을 빼놓고는 조지아를 말할 수가 없다.

지금도 옛부터 내려온 전통 주조 방식인 ‘크베브리(Kvevri) 방식’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데, 크베브리란 물방울처럼 끝이 뾰족한 점토 항아리를 뜻한다. 잘 여문 포도를 껍질째 혹은 줄기째 으깬 뒤 항아리 안에 넣어, 입구를 진흙으로 단단히 밀봉시킨 후 땅에 묻어 4~6개월 숙성시키면, 그 유명한 조지아 와인이 탄생한다. 시그나기에서 텔라비로 이어지는 조지아의 동부 평원을 조지아의 ‘와인 루트’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질좋은 와인들이 생산된다.

(18세기 엘레클Elekle 2세가 만든 약 5키로 성벽길. 촬영=윤재훈 기자)
(조지아 18세기 엘레클(Elekle) 2세가 만든 약 5km 성벽길. 촬영=윤재훈 기자)

시그나기 마을은 성벽으로 굳건하게 둘러싸여 있다. 누군가는 약탈을 일삼은 주변 다케스탄 부족들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1762년 엘레클(Erekle) 2세가 만들었다고 한다. 성곽은 주변을 살피기 위해 23개나 되는 레이스 모양의 둥근 망루와 6개 성문을 세웠다. 

현재에도 조지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다케스탄 공화국은 러시아 보호령으로, 오랜 세월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지금도 끓임 없이 소요가 진행되고 있다.

(산을 둘러 멀리 성벽이 보인다. 촬영=윤재훈 기자)
(조지아 산을 둘러 멀리 성벽이 보인다. 촬영=윤재훈 기자)

그런데 지금은 시멘트로 쌓은 망루가 세 개 정도 보이고, 층마다 바닥은 관광객을 위해 최근에 나무로 깔은 듯하다. 산을 빙둘러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과거에는 문명과 단절되었을 것처럼 첩첩 산중이다. ‘어디선가 한나절 꿩이나 사슴 우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성벽을 따라 걷는다. 약 5킬로 정도 된다는 성벽 길을 20여 분 걸어가자, 나뭇가지로 막아 두었다. 멀리 성벽 아래 산을 따라 할머니의 가르마처럼 뻗어나간 성벽이 보인다. 성을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관광객들을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얼마나 침입이 많았으면, 산 정상에 이런 마을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천혜의 자연조건이 되어 와인의 고향으로, 이 외진 곳에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을까? 드문드문 관광객들이 오고가고 코카서스 산맥이 병풍처럼 둘렀다.

(소박한 금액의 입장료를 받는다. 촬영=윤재훈 기자)
(스테판츠민다 교회 망루, 소박한 금액의 입장료를 받는다. 촬영=윤재훈 기자)

<스테판츠민다 교회>의 망루로 오르기 위해 들어가자, 입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성초와 옷가지 몇 개 걸어놓고 소박하게 앉아있다. 그런데 초를 사는 사람들이 없다. 하루종일 저리 앉아 계셔도, 밥값도 안나올 듯하다. 안은 거의 부서지고 남아있는 것도 규모가 너무 작아, 교회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인근에 성조지 교회도 있는데, 역시 소박하다.

(도다쉬빌리 광장에서 코카서스의 문양을 뜨는 할머니. 촬영=윤재훈 기자)
(도다쉬빌리 광장에서 코카서스의 문양을 뜨는 할머니. 촬영=윤재훈 기자)

마을 중앙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고,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솔로몬 도다쉬빌리(Solomon Dodashvili) 광장이라고 한다. 그는 19세기 조지아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문학가인데,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는 카헤티 주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조지아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소박한 공예품들이 울긋불긋 놓여 있으며, 시그나기(Nlko Pirosmani) 박물관과 접해 있다. 벽에는 상징적인 그림들이 붙어있는데, ‘전사의 벽’이라고 한다.

(‘전사의 벽’, 조지아의 상징 와인과 전사자 명단. 촬영=윤재훈 기자)
(‘전사의 벽’, 조지아의 상징 와인과 전사자 명단. 촬영=윤재훈 기자)

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군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어 전사한 조지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벽인데, 평화를 상징하는 비들기 조각과 전사자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 소련에 대항하여 트빌리시에서 벌어졌던 평화적인 시위 중에 살해된 20명을 기리는 4월 9일 기념돌도 있다.

과거 소련과 국경을 맞닿아 지배하에 있다가 통일된 14개국의 나라에는, 그때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2차대전 당시 대조국 전쟁(독-소 전쟁)에 참여하여 산화한 순국선열들을 기리던 '28인의 전사공원'이 있던,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꺼지지 않는 불’도 기억에 남는다.

한 손에 칼과 또 한 손에 포도를 들고 트빌리시의 요새 산 위 솟아있던, 어머니상도 생각난다.

(시그나기 박물관 뜨락에서 만난 동전수집가. 촬영=윤재훈 기자)
(시그나기 박물관 뜨락에서 만난 동전수집가. 촬영=윤재훈 기자)

시그나기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입장료는 5라리이다. '크베브리(Kvevri)' 와인 항아리 몇 개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다. 손가락으로 두들겨 보니 우리의 독아지처럼 경쾌한 소리가 나는 게 아니고 둔탁한 소리가 난다.

지역에서 발견된 소박한 발굴품들과 악기, 사진 등이 있다. 끝나는 시간이 다 되어가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입구에서 세계의 각국 돈을 수집한다는 할아버지 만났다. 한국 돈을 원하는데, 게스트하우스의 트렁크에 두고 왔다.

(시그나기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시그나기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짐승의 뿔로 만든 술잔 깐지(칸트시Khantsi)로 술을 마시는 청동으로 만든 <타마다상>이,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타마다>는 축제나 잔치를 주관하거나 술자리에서 건배를 주관한다. 조지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동상이다.

시그나기의 다른 이름은 ‘사랑의 도시(City of Love)’이다. 누군가는 시그나기가 마을 풍경이 하트모양이라서 그런다 하고, 누군가는 시그나기라는 이름이 사랑을 뜻하는 조지아어에서 왔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24시간 혼인신고가 가능하고 그 절차도 매우 간소해, 많은 커플이 사랑의 결실을 맺기위해 옛부터 이 마을을 찾고 있다.

(‘모든 동방의 왕중의 왕, 타마르.’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 영면 교회의 벽화. 1184~1186년경.)
(‘모든 동방의 왕중의 왕, 타마르’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 영면 교회의 벽화. 1184~1186년경.)

또한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조지아의 국민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ashvili(1862~1918)’ 작품들이, 시그나기 박물관 2층에 특별관으로 십여 점 전시되고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의 작품은 2천 점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정한다는데, 남아있는 작품은 300점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중에 160여 점은 조지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곳에는 16점이 있다.

1959년 문을 연 박물관은 이 산중에 있지만 조지아의 5대 박물관에 들 정도로 내실이 있다.

피카소가 그의 초상화까지 그렸을 정도로 그림에서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던지, 2009년에 조지아 최초로 ‘피카소 전’이 열리기도 했다.

조지아의 목가적인 풍경과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이 드러난 초기작과, 중세 조지아 군주국의 황금시대를 만든 최초의 위대한 ‘타마라 여왕’을 포함한 초상화 작품들도 걸려있다. 그리고 그녀는 여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이라는 뜻의 ‘메페(Mep’e)’라는 칭호로 강조된다.

그녀는 조지아의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있으며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거룩하고 옳은 여왕 타마르로 시성되었다. 그녀의 축일은 5월 14일(구 5월 1일)이다

중세 시대, 그녀의 마지막 통치 기간 쯤에 조지아 왕국의 국력과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북쪽의 대캅카스 산마루에서 남쪽의 에르주룸(터키 동부 Erzurum)까지, 그리고 북서쪽의 지기에서 동남쪽의 간자(아제르바이잔 도시)까지 확장되었던 ‘판-팝카스 제국’을 이루었다.

(타마르(왼쪽)와 아버지 게오르게 3세(오른쪽).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 안식 교회에 있는 가장 오래된 타마르의 초상화. 1184~1186년경)
(타마르(왼쪽)와 아버지 게오르게 3세(오른쪽).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 안식 교회에 있는 가장 오래된 타마르의 초상화. 1184~1186년경)

동시대 조지아 역사가는 ‘폰투스의 바다(흑해)에서 고르간의 바다(카스피해)까지, 스페리부터 데르벤드(러시아 다케스탄 공화국내 도시)까지, 그리고 카자리아(하자르, 튀르족이 건국한 카간국의 총칭)와 스키타이아(스키타이족, 이란계 민족)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모든 영토의 주인이었다고 격찬했다.

그 시절 조지아 사람들은 ‘농부는 귀족 같고 귀족은 왕자 같으며, 왕자는 왕과 같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부유했다.

(쇼타 루트타벨리가 타마르 여왕에게 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헝가리인 예술가 미할리 지치의 그림 (1880년대)
(쇼타 루트타벨리가 타마르 여왕에게 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헝가리인 예술가 미할리 지치의 그림 (1880년대)

현존하는 다섯 기념교회의 타마르 여왕을 표현한 초상화들은 명백하게 비잔티움의 심상으로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이란의 이상적인 아름다운 여성상에 가까운 모습이 조지아의 화법으로 특히 강조되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중동과 아주 친밀했는데,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함께 녹아있는 전설이 표현된 조지아 구리동전(1200년)에도 잘 드러나 있다.

동시대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초기에 우세했던 매우 독창적인 세속 문화의 지위는 급격하게 쇠퇴해 같다. 그 경향은 조지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이며 기사도의 이상을 찬양한, ‘쇼타 루스타벨리’의 서사시 ‘표범가죽을 입은 기사(베프키스트카오사니)’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 서사시는 오늘날 가장 훌륭한 토착문학의 성취였다고 극찬을 받는다.

(타마르의 모노그램이 특징인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새겨진 구리 동전.(1200년)
(타마르의 모노그램이 특징인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새겨진 구리 동전. 1200년)

그녀의 사후 20년 동안 콰레즘(화레즘 제국, 튀르크계 국가)과 몽골의 침입으로 국력이 쇠약해지자, 사람들은 이상화된 여왕의 모습으로 타마르를 동경하게 된다.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 타마르의 모습은 전설적이고 낭만적인 측면들만 남게 되고, 다양한 민속노래와 시들, 우화에서 그녀는 이상적인 통치자로 그려졌으며 성스러운 여인이나 기독교의 성인처럼 투영되었다.

오늘날 조지아인들의 마음속에 타마르는 조지아의 전성기가 의인화되어 간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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