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 78] 조지아_시그나기 ‘사랑을 위하여, 가오말조스(건배)’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12.2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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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_시그나기
사랑을 위하여, 가오말조스Gaumarjos(건배)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중

(‘잔치(선술집에서 타마다를 즐기는 사람들’ 필로스마니 작)
(‘잔치' 선술집에서 타마다를 즐기는 사람들. 피로스마니 작)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시그나기에서 이곳 출신인 조지아 최고의 화가 <피로스마니>를 떠올리니, 생각이 많아진다. 노란 손수건의 이야기가 하릴없이 떠오르더니, 이번에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꼭 닮은 친구의 부인을 짝사랑해, 대신 단두대에 서는 변호사 친구 시드니 카튼 역시, 한정 없는 맹목남이다.

“최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으며,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시절이었고, 불신의 시절이었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으며,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중

이 소설은 1859년 발표된 역사 장편소설로 프랑스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파리와 런던을 오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암울하면서도 역동적인 혁명 전야를 그린 유명한 첫 장의 구절은 많은 사람에 의해 회자된다.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단행본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10월 26일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음성을 아프게 들었던 기억이 새롭게 살아난다.

(시청 앞이 있는 크레브린 항아리 위에 사슴이 있다. 촬영=윤재훈)
(시청 앞이 있는 크레브린 항아리 위에 사슴이 있다. 촬영=윤재훈)

조지아는 인근에 둘러싸인 나라들과 다르게, 코카서스 3국 중 아르메니아와 함께 대부분 정교회를 믿는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을 믿는다. 물론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여, 태초 이래 많은 영향을 받아왔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근 이슬람 제국들에게 침입도 많이 당해왔다.

그러나 조지아는 이제 70년 이상 예속되어왔던 러시아 식민지에서 벗어나 미국화를 꾀하고 있다. 그래서 서방에 대한 의지의 표현으로 나라 이름까지 그루지아에서 조지아로 바꾸었다. 미국의 한 주의 이름과 같다. 아름다운 풍광과 와인을 찾아 왔던 푸시킨이나 도스토에프스키, 고리끼 같은 유명한 러시아 작가들은 흔적도 점점 엷어지고 있다.

(나노의 ‘보드베 수도원.’ 촬영=윤재훈)
(나노의 ‘보드베 수도원’. 촬영=윤재훈)

이제 시그나기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인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을 찾아간다. 원래는 ‘성녀 니노(St. Nino)의 보드베 수도원’이었다고 한다. 시그나기에서 2키로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굳이 택시를 타려면 왕복 8라리이다. 약간 찻길을 따라가니 위험할 수도 있지만, 코카서스의 수려한 산수(山水)가 이 아쉬움을 달래준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아 수목들의 푸른빛이 더욱 싱그럽다. 새들의 울음소리와 한들거리는 꽃들의 웃음소리는 덤이다. 길은 알프스 소녀의 머리처럼 양갈래로 나뉘고 샛길로 접어든다. 이제는 오솔길이다. 30여 분 걸었을까. 멀리 성당이 보인다.

(마을 사람 걸인들. 촬영=윤재훈)
(나노의 ‘보드베 수도원. 오르는 길에 마을 사람 걸인들. 촬영=윤재훈)

맨 먼저 우리를 반기는 것은 성당 앞의 걸인이다. 여기도 멀쩡한 사람들이 정문 앞에 동냥통을 놓고 일렬로 앉아 있다. 남자도 끼여 있다. 모두 마을 사람들이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서로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부끄러움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는 듯하다.

뜨락에는 대부분의 성당처럼 키제기를 하듯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그 모습이 한결같아, 세상 풍파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는 나무들 같다. 코카서스 산맥이 가로막아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서일까?

이곳은 조지아에 가장 먼저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는 성녀 <니노>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녀는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조지아 정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꼽힌다. 전설에 의하면 터키 카파도키아 출신인 그녀는 비천한 신분이었다. 그러다 신의 계시로 조지아에 건너와 죽어가는 아이를 소생시키고 병자를 치료하는 기적들을 행했다.

(보드베 수도원 벽과 천장. 촬영=윤재훈)
(보드베 수도원 벽과 천장. 촬영=윤재훈)

이것이 조지아 왕비에게 전해졌고 불치병을 앓던 왕비도 니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 후 놀랍게 병이 완치되고 왕비는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청했다. 그 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는 수백 명의 장정이 그녀의 유해를 오래된 수도 므츠헤타로 옮기려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아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동그란 아치형의 정문을 지나며 성녀 니노가 모셔진 게오르기 수도원이 있고, 멀리 알라자니 계곡이 펼쳐진다. 예배당은 4세기에 최초로 세워져, 역사의 굴곡에 따라 파괴와 재건을 거듭하다, 19세기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게오르기 수도원. 촬영=윤재훈)
(게오르기 수도원. 촬영=윤재훈)

이곳은 조지아의 성지로 카케티 왕국 왕들의 대관식 장소로 사용되었을 만큼 중요한 장소이다. 그런데 높다란 종탑 하나, 작은 성당 두어 개인데, 어디에서 대관식을 올렸을까? 옆에는 거의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는 약간 커다란 성당 하나가 있는데 저 정도면 약소하게라도 치를 수도 있을 것도 같다. 아래로 옛 집터가 보이는데 혹시 저 장소는 아니였을까. 종교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이 먼 곳까지 찾아 왔는데, 약간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홀로 핀 자색의 엉겅퀴는 ‘수도사를 닮은 꽃’이라고 한다는데, 멀리 저 혼자 한들거린다. 찻길이 아닌 아래쪽으로 시그나기 마을까지 갈 수 있는 오솔길이라도 하나 생기면, 성당으로 오는 길이 더욱 아름다운 성지가 될 것 같다. 돌담길을 따라 1키로 정도 내려가면 성 니노의 샘이 있는데, 치유 효과가 뛰어나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보드베 수도원에서 바라본 코카서스 풍경. 촬영=윤재훈)
(보드베 수도원에서 바라본 코카서스 풍경. 촬영=윤재훈)

이제 시그나기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어느 식당에선가 조지아 전통음악에 흥이 오른 마을 사람들이 모여 왁자하다. 세월과 와인향에 농익은 기다란 나무의자에 앉아 이 지역에서 생산된, 므츠바네, 사페바리 등 조지아를 대표하는 와인들을 마시고 있다. 이 지역에 유명한 화가인 ‘피로스마니 와인’도 있다. 발효된 포도찌거기를 증류해 만든 브랜드의 일종으로 와인만큼이나 조지아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차(Chacha에 취한 사람들도 있다.

조지아에도 우리처럼 전통 건배문화인 ‘타마다(Tamada)’가 있다. 타마다는 저녁식사 혹은 연회를 뜻하는 말로, 수르파(Surpa)에서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사랑을 위하여, 가오말조스 Gaumarjos(건배)’

9월 중순에서 10월 사이에 이 아름다운 산간마을을 찾는다면, 한창 포도 수확이 이루어지고 있어 많은 축제까지 함께 볼 수 있다. 그때쯤이면 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싸인 조지아인들의 삶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그나기를 떠나며. 촬영=윤재훈)
(시그나기를 떠나며. 촬영=윤재훈)

숙소에 가 배낭을 챙겨 마슈르카를 타러 간다. 그런데 정원이 다 차고 임시 마슈르카가 간다고 해 6시 표를 샀다. 시간이 많이 남는다. 옆에 벤치가 있어 따뜻한 코카서스 햇볕 아래 누우니, 스스르 잠이 들었다.

시그나기에서 카케티의 주도인 <텔라비>까지 가는 마슈르카는 9시에 한 번 있고, 수도인 <트빌리시>까지는 9시부터 6번 있다. 저물녘 산맥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소들이 찻길을 따라 흘러간다.

두어 시간 조금 못 걸려 삼고리 메트로역에 도착했다. 이제 러시아 국경과 마주한 아름다운 코카서스 설산을 찾아 카즈베기로 가야 한다.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며 힘겹게 바윗덩어리를 밀어 올리는 프로메테우스 전설이 숨 쉬고 있는 곳. 다시 짐이 있어 친절하지 않는 아주머니가 계시는 트레블러 게스트하우로 향한다. 지금도 마당에는 푸른 포도송이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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