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㉘] 눈 내리는 날이면

김경 기자
  • 입력 2022.01.2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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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눈이다. 눈발이 허공을 가르며 휘날린다.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점점 더 거세진다. 바람에 쫓기는, 더욱 굵어진 눈발이 허공에 가득하다. 며칠 동안 포근하더니 다시 한파가 몰려온다는 신호인 것 같다. 겨울은 역시 겨울이다. 눈과 바람을 쌍으로 초대한다.

나는 점심 후, 커피 잔을 들고 베란다에 나왔다가 꼼짝없이 묶여버렸다. 쏟아지는 눈발에 사로잡혀 커피 잔을 들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

어느새 함박눈이다. 거센 눈발은 사라지고 함박눈이 사뿐사뿐 내린다. 바람도 잔잔해졌다. 유리문 너머 나뭇가지에도 길에도 차곡차곡 함박눈이 쌓인다. 눈 깜박할 사이에 온 세상은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하얀 눈의 세상이다. 이렇게 눈 내리는 날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시려온다. 나도 모르게 그날 그때로 돌아간다.

40여 년 전의 그날도 온종일 눈이 내렸다. 사방천지가 하얗게 덮이면 덮일수록 자꾸 눈이 감겼다. 눈이 부셔서가 아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날이었다. 아버지가 부재한, 나 홀로 눈에 담아야 하는 눈 세상은 시베리아 동토보다 더 지독한 혹한의 증표였다. 아니다. 한 점 한 점 풀풀 흩날려도, 송이송이 뭉실뭉실 내려앉아도 하얀 눈은 절절한 그리움의 표상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아버지가 재직한 학교의 운동장이 그렇게도 넓을 줄은 미처 몰랐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인데도 불구하고 텅 빈 것처럼 휑했다. 잎을 떨친 앙상한 나무들은 윙윙거리며 온몸을 떨었다. 희끗희끗 눈발이 날렸다. 저만치 허공을 맴돌다 머리 위로 내렸다. 겨울의 들머리에 내린 첫눈이었다. 첫눈은 뜻밖의 대설로 이어졌다. 워낙 따뜻한 남녘이어서 눈은 땅에 닿기 바쁘게 녹아내리기 일쑤였는데, 그날만은 예외였다.

아버지의 고향으로 향하는 장의차 길에도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마침내 장지에 이르렀다. 장의차의 문이 열리자 펼쳐진 하얀 눈밭. 그저 낯설기만 했다. 어느 틈에 잿빛 하늘은 스러지고 햇빛 가득한 순백의 눈밭은 아버지의 고결한 생애처럼 순결했다. 아버지의 육신은 반짝이는 흰 눈의 배웅을 받으며 고향의 흙으로 옮겨졌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부모, 아버지의 부모의 부모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갔다. 금생의 고단한 심신을 훌훌 털고 영혼의 안식처에 누우시기를 나는 두 손 모아 기원했다.

그날 밤은 길고도 또 길었다. 언제 그렇게 긴긴 밤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밤새 설움이 북받쳤다. 절망감이 앞선, 단 하나의 생각에 빠져 초조하고 조바심이 났다. 아버지는 꽁꽁 언 눈 덮인 땅 속에 누워 있고, 나는 따뜻한 방안에 누워 있었다. 금생과 내생은 오직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애써 병고에 시달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 두 달여를 보냈다. 학교나 직장에 다니던 형제들은 짬짬이 병원에 드나들고 오직 어머니만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단 한 번도 아버지와 눈길을 주고받지 못한 애달픈 시간이었다. 비록 아버지 신체의 모든 수치는 하향 곡선을 그려갔으나 그래도 한 점 희망이 남아 있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날이 기어이 오고 말았다. 주치의는 조심스레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라고 말했다. 우리 가족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제자인 주치의가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두 달 가까이 꼬박 누워서 투병 생활을 했다. 어쩌다 순간순간 웃거나 찌푸리는 표정만 보여도 또 다시 희망의 끈을 되잡곤 했는데, 결코 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했다. 여름에 쓰러진 아버지는 모든 채비를 마치고 기다린 듯, 겨울이 오자마자 이생의 옷을 훌훌 벗었다.

겨울은 참으로 슬픈 계절로 남았다. 그날 이후,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더 깊어졌다. 흰 눈은 그때그때마다 늘 아버지와 이별하던 그 시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제 나는 그때의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아버지의 생애는 너무 짧았다. 아버지와 조금만 더 함께할 수 있었다면……. 당시의 의술과 현재의 의술은 천지 차이다. 지금이었다면 아버지는 거뜬히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회한에 겨운 아쉬움이 첩첩이 가슴 속에 쌓인다. 더없이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들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친다.

새벽 풍경이다. 아버지는 녹차를 앞에 두고 어머니와 오순도순 정담을 나눈다. 마당으로 나와 밤새 타고난 연탄재를 정리하고 대문 밖으로 나선다. 집 앞은 물론 동네 골목길을 지나 한길까지 비질한다. 퇴근길 아버지의 손에는 항상 무엇인가가 들려 있다. 군밤, 만두, 과자, 수박 심지어 찬거리까지. 그리고 구수한 말솜씨로 온 가족을 모여 앉게 한 이야기들……. 절집 생활을 했던 아버지에게는 특히 절간의 이야기보따리가 두둑했다. 노스님이 잠들기 전에 꼭 밖으로 나갔다가 입맛을 다시면서 들어오셨다. 궁금증에 행자들이 몰래 뒤를 쫓았다. 노스님은 공양간 수채 망에 걸린 음식물을 끓여 먹었다. 산에 호랑이가 살던 때였다. 산 아래 마을에 가난하지만 인정 많고 부지런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가 밤늦도록 남의 집 일을 하고 산 넘어 귀가하려면 호랑이가 반드시 마중을 나왔다. 호랑이는 할머니를 등에 태우고 어두운 산길을 어슬렁어슬렁, 대문 앞에서 할머니를 내려놓았다. 다정다감한 아버지는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식사할 때에도 다정다감하게 말씀을 이르곤 했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면 안 된다. 배가 약간 고프다 싶을 때 수저를 놓아야 한다.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 무엇도 절제할 수 없다. 언제나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눈길이 가야 한다. 자기만 생각하면 절대로 남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한 집안을 이끄는 사람은 여자다. 그것도 그 집의 며느리다. 우리 형제가 1남 6녀이다 보니, 아버지는 딸들의 훈육에 심혈을 기울인 게 틀림없다.

새삼 아버지의 훈육 말씀을 상기하니 더욱 더 그리움이 샘솟는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온다. 과연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어느 정도나 부응하며 살고 있는가. 어디에 무엇 하나 아버지의 말씀을 제대로 실천한 게 없다.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회한에 또 다시 목이 멘다. 함박눈은 아직도 그칠 줄을 모르고 쉼 없이 쏟아진다.

나는 빈 찻잔을 들고 거실로 들어온다. 슬며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독이며 아버지의 육신을 따라 걸었던 그날 그 눈길을 걸어간다. 그래, 아버지와 나는 함께 걸었다. 그날 그 눈길을.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와 이렇게 그리움으로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날의 회상이 결코 슬프지만은 않다.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 기억은 또 추억을 낳는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크고 너른 따스한 세계를 되새기고 있지 않은가.

추억은 새로운 힘이다. 내 마음 속에 아버지가 존재하는 한, 아버지는 저 멀리 떠나지 않았다. 여기 이 자리 내 곁에서 항상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문득 송창식의 노래 ‘밤눈’이 생각난다. 예전 이십 대에는 마냥 서글프게만 들렸는데, 이제는 그 느낌이 좀 다르지 싶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눈 감고 귀 기울이면

까마득히 먼 데서 눈 맞는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못 듣는가, 저 흐느낌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내 우는 소리

잠만 들면 나는 거기엘 가네

눈송이 어지러운 거기엘 가네

눈발을 흩이고 옛 얘길 꺼내

아직 얼지 않았거든 들고 오리다

아니면 다시는 오지도 않지

한 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최인호가 썼다는 ‘밤눈’의 노랫말을 읊조리면서 유리문 밖을 응시한다.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무척 곱다. 눈은 밤까지 이어지려나. 나는 함박눈을 머리에 이고 노랫말을 음미해 본다. 뭔가 새로운 의미가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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