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반격] 우직한 도예가, ‘토완(土完)’의 땀으로 빚은 작품세계 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2.10 11:03
  • 수정 2022.02.1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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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직한 도예가  ‘토완(土完)’의

땀으로 빚은 작품세계

(촬영=윤재훈)
(‘토완(土完)’의 40여 년 우직한 삶. 촬영=윤재훈 기자)

흙을 돌리고
불을 돌리고
세월을 돌리고

걷다, 중심을 잃다가도
강물 속으로, 강물 흐르듯
흙으로 앉아있는
바람 닮은 인생 함께
뜨겁게 데워지는, 저 몸부림

“어이, 자네”

“단단해진 내 몸 한 번 더 데워
거칠고 투박한
곡차 한 잔 하세나“

새벽 달빛 바스락거리는 토완요
누구인가 문을 여니
사십 년 홀로 물레만 돌고 있구나

- ‘막사발’, 김양호

(토완 도예 40년 전시에 부쳐)

(‘태토’ 모습.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도예의 기본은 흙에 공기를 빼내는 ‘반죽’에서 시작된다. 기계 반죽에 비해 손반죽을 ‘꼬박(꼬막)’이라고 하는데, 흙을 풀어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도예의 시작이다.

만약 꼬박이 제대로 안되면 가마 소성을 할 때 내부에 남아있던 공기가 끓어오르면서 가마 안에서 터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 기물이 터지게 될 경우, 하나만 터지는 게 아니라 주변 기물까지 건드리기 마련이다. 거기에 기물만 깨지면 양반이고, 깨지면서 유약이 내열판에 달라붙어 새로 사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또한 가마 내부가 지저분해지기도 해서 공기를 빼내는 꼬박을 반드시 해줘야 한다.

만약 토련기가 있으면 알아서 공기를 빼주기 때문에 굳이 꼬막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토련기 역시 만능은 아니기 때문에 만일을 대비해서, 여러 차례 돌려주어야 한다.

여기에 꼬박은 공기만 빼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죽할수록 태토(胎土Body)의 점성도 좋아지므로 토련을 돌려도 꼬막을 해주면 좋다. 이렇게 입자가 섞일수록 전보다 흙의 질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꼬막 3년이라는 말도 있다.“

(”어이, 모양이 좀 이상하구만“. 촬영= 윤재훈 기자)

물레 위에 올리고 나면 흙에 차이가 더욱 뚜렷이 나는데, 겉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물레 성형시 그 부드러움과 구조성, 가마의 화력에 견디고 나오는 기물의 궐리티가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도공은 회전하는 물레 위에 놓인 흙에 계속 물을 뿌리는데, 이것은 마찰력에 의한 열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지 접착을 진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땀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네 서민의 삶과 닮았다. 돌고 돌아 하나의 작품이 신(?)의 손에 의해 놀랍게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밥그릇’이다. 평생 나를 키우고 살찌우는 ‘생명의 그릇’이다.

이런 회전에 의해 원심력이 생겨나는데, 중심에서 밖으로 벗어나려는 순리이다. 도공은 흙무더기를 두 손으로 감싸고 단전에 힘을 준 체, 온몸으로 기운을 모운다. 단순한 것이 물레의 원리인데, 몸에 체득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도공의 기본 자질이다.

(도공의 집. 촬영=윤재훈)
(도공의 집 가는 길. 촬영=윤재훈 기자)

도예가 '토완(土完)' 만나러 가는 길은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소풍 갈 때 올라갔던 길이다. 이강산을 지나고 구봉산을 오른다. ‘여수 밤바다의 고향’ 돌산 대교가 보이고, 저 멀리 경도(京島) 바다가 바로 발 밑이다.

한양에서 쫓겨난 왕비가 평생 도성을 그리며 살았다는 곳, 그곳에는 목장터도 있다. 지금은 골프장과 리조트가 들어서고 미래에셋이라는 금융기업이 1조 원대 이상을 투자하여, 아시아 최대 규모의 리조트 건설을 발표한 섬이다. 케이블카도 놓인다고 한다. 돌산 2대교처럼 반짝반짝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케이블카들이 바다 위로 떠다닐 것이다.

산모롱이 돌아 별장처럼 아름답고 잘 생긴 흙집과 그 옆에 작업실이 있다. 흙집은 그가 손수 흙을 찍어 오랜 시간 지었다. 황토흙을 벽돌처럼 얼마나 크게 찍었는지 탱크가 쏘아도 끄덕없을 정도라고, 언젠가 그가 찻잔을 기울이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 위 구봉산의 이마에는 여수에서 가장 오래된 천 년 고찰 한산사가 있다.

(아리랑. 촬영=윤재훈)
('아리랑'. 촬영=윤재훈 기자)

”나의 작업은 홀로 아리랑이지요.


두려움도 많지만 어떻게 하면 옛 것과 현대의 간극을
소통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과 자연의 존재성과 순환성에 대한 어울림을 찾고 있지요.“

”한국적 한이 깊이 배어있는 ‘아리랑’에 비유하는
그의 말 속에는 깊은 힘이 배어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소멸의 미학까지 아우르고 있다."

‘아리랑’은 인체를 차용한 삶의 해석이며 그 깊이에 대한 탐색이다. 우리 민족의 한을 한국적 선미로 풀어내고, 우리 삶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합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향토적 질감의 소재와 비대칭과 변형의 조형미로, 정형의 긴장감을 해소하고 있다. 풍요로운 생산을 상징하는 아낙의 두툼한 엉덩이의 질감은 한국적인 토속미와 다산의 의미까지 더해준다.

(구봉산, 초창기 그의 삶터, 촬영=윤재훈)
(구봉산, 초창기 토완의 삶터, 촬영=윤재훈 기자)

그의 젊은 날은 신산했다. 1980년 중반 광주로 내려와 전통 찻그릇을 빚다가 1987년 고종사촌 누나의 소개로 부인을 만났다. 그 후 88년 2월에 결혼을 하고, 이곳 구봉산에 있는 한산사 사하촌(寺下村)에 비닐하우스 모양의 신혼집을 얼기설기 지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신고로 망치부대가 와 부숴버렸다. 그렇게 춥고 쓰라린 겨울을 보내고 다음 해 봄이 오자 다시 지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아사녀 닮은 그의 부인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 삼 형제를 안겨 주었다. 

그 자리에 ‘토완 도예 연구소’와 ‘봉산요’를 만들었고, 그 시절이 어느 틈에 40여 년이 지나가 버렸는데, 여지껏 흙과 씨름하고 있다. 이제 40년 전을 마쳤으니, 벌써 50년 전을 준비하고 있다.

("샘“. 촬영= 윤재훈 기자)

그는 언제부턴가 ‘무소유’의 법정 스님을 꼭 한 번 뵙고 싶다는 열망에, 스무 살 무렵 3박 4일을 걸어 송광사 불일암을 찾아가 스님을 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땀을 흘려라,
생각만 하게 되면 풀리기보다는,
엉켜버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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