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반격] ‘토완(土完)’의 도예 인생 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2.11 11:00
  • 수정 2022.02.17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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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완(土完)’의 도예 인생 

미치도록
미치도록 좋겠네
저 달
저 무욕의 면(面)
처음으로 보듬어보면 좋겠네

그리우면
그리운 데로 좋겠네
저 달
저 무한의 점(點)
처음으로 미쳐버리면 좋겠네
- ‘저 달’, 전청배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 잔 하고 가게! ”. ’촬영=윤재훈)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 잔 하고 가게! ”.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토완(土完)’의 도예 인생은 1977년 21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국립마산 도자기시험소’에서 수강생을 모집하는 것을 알게 되고 접수를 하였다. 그런데 연락이 없었다. 이것도 안되는가 보다 하고 실망스러운 마음에, 무전여행을 떠났다.

”세상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완행열차를 타고 벽돌공장에서 이삼일 일을 해주면서 먹는 것을 해결하고, 돈이 좀 생기면 떠났다. 그러다 결국 외삼촌이 있는 제주도까지 같다. 21살 무렵 다시 뭍으로 나와 목포에 있는 석재공장 일하려고 하는데, 부모의 허락을 받고 오라고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 왔는데, 마산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어렵게 2차로 합격이 되고 호적이 늦어 반장까지 했다. 디자인과와 성형과, 틀을 만드는 제형과에 각 반 20명씩 3개 반이 있었다. 그 시절 대부분 돈이 되는 산업 도자기 기능인력을 양성했는데, 모난 사람 몇 명만 전통 도자기를 한다고 하고, 그들은 도자 메카 경기도 이천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자취을 하며 마침내 도자 인생을 시작했고, 호적이 늦어 군대에 3년 늦게 가는 바람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평생 흙을 벗하기로 마음먹고, 도자기에 귀의한 셈이다. 그렇게 이천의 가마들을 돌아다니면 우리나라 1세대에 도예인들에게서 사사(師事)를 받았다.

(토완의 대표작, 세월-흔적. 촬영=윤재훈)
(토완의 대표작품 '세월-흔적'. 촬영=윤재훈 기자)

그런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찾아왔다. 어차피 혼자인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러면서 세 가지 고민을 했다. 어릴 때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나의 이 느낌을 어디다 새길까?

”나무에다 새길까,
돌에다 새길까,
흙에다 새길까”

그러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모두 깃들여 있는 흙에다, 앞으로 나의 인생을 새기기로 결심했다.

(달 항아리. 촬영=윤재훈)
(토완(土完)의 작품 '달 항아리'. 촬영=윤재훈 기자)

처음이면
처음이면 좋겠네
저 달
저 무극의 선(線)
처음으로 안아보면 좋겠네

미치도록
미치도록 좋겠네
저 달
저 무욕의 면(面)
처음으로 보듬어보면 좋겠네

그리우면
그리운 데로 좋겠네
저 달
저 무한의 점(點)
처음으로 미쳐버리면 좋겠네

저 달
보듬고 싶은 저 달
따 먹고 싶은 저 달
달항아리

 - ‘저 달’, 전청배

(초창기 다양한 그의 작품들. 촬영=윤재훈)
(초창기 다양한 그의 작품들. 촬영=윤재훈 기자)

“두툼한 입과 볼록한 배는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인간의 허기진 욕망을 상징하며,
자신도 모른 채 한없이 그릇만 키워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리고 채울수록 더 허기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크고 작은 그릇 나름의 소용됨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네 삶도 저 그릇에 맞게 살아갈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그만큼 이 시대는 사람됨이 더 중요하다는,
도공의 인간성과 긍정성을 빚어내고 있다.”

(세월. 촬영=윤재훈)
(토완(土完)의 작품 '세월'. 촬영=윤재훈)

가슴 속에 열망만 가득 차고 앞은 잘 보이지 않던, 요원한 시절.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서,
아득한 표정으로 가마 안을 들여다보던 나를 보고
老불대장이 던진 한 마디가,
지금도 메아리처럼 가슴 속을 맴돈다고 한다.

한밤중에 막걸리를 사 들고 온 나에게,

”여보게 젊은이,
한 30년만 하다 보면, 보일 걸세“

 

(초창기 다양한 그의 작품들. 촬영=윤재훈)
(그의 다방(茶房)에서 내려다 본 남해바다. 촬영=윤재훈 기자)

젊은 시절 비닐 하우스 뒤로는 그의 고집스러운 황토 가마가 길게 뻗어있고, 남해 바다가 환히 내려다 보이는 그의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도공은 도예의 변을 토해내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의 궤적을,
흙과 바람의 거친 느낌으로 표현하고 싶다.

우리네 삶의 여정과도 맞닿아 있는 세월과 그 흔적이,
흙이 지닌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나
인간과 자연의 존재성과 순환성에 대한 어울림을 추구하며
옛것을 토대로 현재의 간극을 소통하게 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바람의 자취를 따라,
삶의 발자국들의 흔적을 기억하고자, 도자기를 빗는다.”

(디자인 등록까지 마친 그의 찻잔. 촬영=윤재훈)
(디자인 등록까지 마친 토완(土完)의 찻잔. 촬영=윤재훈 기자)

소박하고 털털하게 막걸리를 좋아하는 그의 이미지와 다르게, 그의 어린 시절은 자못 화려하다.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와 같은 지역인 노령산맥 끝자락 조계산, 승보 사찰인 송광사 인근의 순천시 공광면 구룡리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권투선수로 전남도 대표까지 선발되었다. 그러나 젊은 혈기로 무리한 훈련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이 지역에서 운동을 했으며, 거의 1세대 권투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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