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반격] 토완(土完), “내 생, 흙으로 이야기하자3”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2.16 11:07
  • 수정 2022.02.1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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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완(土完), “내 생, 흙으로 이야기하자3”

”나의 길은,
완성이 아닌 과정이다.
내 발자취이고, 부산물이다.
계속하는 과정에 허물 같은 것이다.

아직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다.
결국, 모든 예술에 길은 비슷하지 않을까?“
- 토완(土完)

(작업장에서 내려다본 여수 바다. 촬영=윤재훈)
(도공의 작업장에서 내려다본 여수 바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도공의 토완(土完)의 다방(茶房)에 앉아 차를 나누며 남쪽 바다를 내려다보니, 문득 옛 생각 하나가 둥두렷이 떠오른다. 젊은 날 어느 해인가 겨울날, 이 집 어린 아들 셋과 부부와 함께 우리는 겁도 없이 이 땅의 최초의 국립공원인 지리산으로 등산을 떠났다. 막내 사내아이는 여섯 살이었고, 우리 딸은 다섯 살이었다. 여수에서 묵산방 화방을 하는 화가 부부도 따라나섰다.

우리는 구례 화엄사 초입에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차일봉 길을 따라 노고단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높이가 무려 1,502m였다. 날씨는 꾸물했고, 볼이 부은 아이처럼 금방이라고 눈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우리는 주저 없이 출발했고 얼마나 올라왔을까,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오르다 보니 멀리 노고단 산장이 보였고, 그곳에는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서둘러 발길을 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니 작은 암자가 나오고 스님은 조금만 더 가면 찻길이 나오니 어서 내려가라고, 매정하게 문을 닫았다.

(겁도 없이 눈 쌓인 지리산 길을 아이들과, 이런 차림으로 올랐다. 촬영=윤재훈)
(겁도 없이 눈 쌓인 지리산 길을 아이들과, 이런 차림으로 올랐다. 촬영=윤재훈 기자)

아이와 여자들은 운동화를 신어 금방이라도 젖을 것만 같았고, 날까지 어두워져 오기 시작했다. 코흘리개 아이들의 연한 팔은 마치 스키를 타듯 어른들의 손에 이끌러 미끄러져 내려오고, 등산로도 점점 구분이 잘 안 되었다. 후레쉬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내려오다가, 우리는 방향감각을 잡을 수가 없어서 119에 신고를 했다. 그러나 길을 잃은 산에서 방향이 어디인지,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줄 수가 없었다.

여류화가는 다리가 아파 더 걸을 수가 없다고 하여 도공이 업기는 했으나, 그 무게 때문에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길은 점점 더 분간할 수가 없었으며, 나는 앞장서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허우적허우적 대며 얼마나 내려왔을까, 멀리 동그랗게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길이 보였고, 경광등 불빛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잘 모를수록 사람은 아둔한 선택을 하기 쉽다고, 우리는 가끔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웃지만, 생각만 해도 춥고 섬뜩하다.

(도공의 작업실 풍경. 촬영=윤재훈)
(도공의 작업실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도공은 도예를 시작하면서 세 가지 결심을 했다.

“도자기로 승부를 보자.
남의 탓을 하지 말자.
특히 지금까지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에게, 그리고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 한 점을 남기자”

그는 20여 년 전까지 ‘한 점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 속에 매어 살다가, 30년 전을 하면서 내려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꾸준히 해나가자,

“내 생,
흙으로 이야기하자”

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더니 마음이 더 여유로워졌다고 웃는다.

(거친 질감의 작업들. 촬영=윤재훈)
(거친 질감의 작업들. 촬영=윤재훈 기자)

“그가 몰두하는 작업 중의 하나가 인체를 통한 원초적인 조형미를
추구하려는 일련의 도조(陶彫) 작업이다.
아직은 눈에 덜 익숙한 에로티시즘에 의아할 수도 있지만,
그의 작업은 원형질의 원시적 생명에 대한 뜨거운 갈망으로 이해된다.”

이천을 떠난 그는 광주에 1세대 도자인들이 생겨날 때, 2년여 조선대 서길용 교수의 작업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작업을 했다. 그 시절 전남대, 조선대를 비롯해 대학에서 차 모임들이 생겨나고 결성되었는데, 그들과는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진학을 했지만, 그는 평생 작업에만 매진하고 있다.

“반짝, 하는 것 보다,
꾸준히 해나가자.”

(토완 다완(茶碗). 촬영=윤재훈 기자)

도공은 그 시절 ‘다기’를 전문적으로 했다. 그리고 50년 동안 다기만 하신 운산 장봉준 선생 공방에서 틀 작업을 배우고, 직원처럼 일도 했었다. 그분은 지금은 옥과 자연학교를 만들어 다기만 만드는데, 이제 대기업에 납품도 할 정도로 일가를 이뤘다고 한다.

그 후 다른 도공들과 작업장을 함께 쓰는 더부살이 하면서, 10년 후에는 내 작업장을 갖겠다는 염원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988년 여수로 왔으니 그 꿈을 이룬 셈이다. 여기에 78년 10월에 국가기능사보 자격증 취득했으니, 올해로 도자 인생 43년째라고 한다. 그는 지금도 젊은 시절 이천의 도예 명인들에게서 배운 것들이,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도공의 집 앞. 촬영=윤재훈)
(구봉산 한산사로 오르는 도공의 집 앞. 촬영=윤재훈 기자)

도공은 오래전부터 흙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투박하고 거칠은 느낌의 물성을 표현해 보고 싶었단다. 그래서 ”세월 속의 흔적”을 어떻게 구현해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리즈 작업을 하고 있다.

”순치(馴致), 결국,
길들인다

길들인 것은 편하고 넓은 길이지만,
길들이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흙의 본질성에 천착’하면서 꾸준히 가고 싶단다.

”나의 길은,
완성이 아닌 과정이다.
내 발자취이고, 부산물이다.
계속하는 과정에 허물 같은 것이다.

아직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다.
결국, 모든 예술에 길은 비슷하지 않을까?“

(세월-흔적’, 비바리의 테왁을 닮은 것도 같다. 촬영=윤재훈 기자)

구연부에서 흘러내리는 선들은 부드럽고 굽까지 이어지는 면면은 통속적이다.
토완의 흙 작업은 이렇듯 자유분방하고, 전통적 방식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 정신은 상상력과 함께 성형화된 상태에서 표면화된 질감,
색채를 계획하는 기획력에 있다.후반 작업들 역시 토완의 짙은 개성이 드러나는데,
흙 작업에서 세속적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늘 마음의 창을 열면서 살아가는 절제된 생활 속에서 흙 작업을 통해
자신의 때 묻은 세속적 욕망 따위 등의 흔적을 지우려 노력한다.
동시에 바람과 물과 공기와 불같은 원소의 자연적인 작용들을
극대화 시켜주면서, 흙의 정신을 지키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원초적 흙의 원형질에 대한 고차원적인 해석은, 관자에게 맡긴다.”

- 2018년 인사동 경인미술관 전시회, ‘칼럼리스트 유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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