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⑫] 북악산을 바라보며, 조선의 역사를 생각하다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4.25 11:38
  • 수정 2022.05.0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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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을 바라보며, 조선의 역사를 생각하다2.

-서울성곽을 따라, 혜화문에서 북정마을까지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이후 200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世)를 지나지 못해 왕위를 찬탈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00년 만에 전국에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다."

                                                                        -무학대사의 예언

(국보 223호,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며,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촬영=윤재훈)
(국보 223호,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며,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피가 피를 부르며 한 나라가 패망하고, 새 나라가 개국 되는 마당에서, 조선의 정국은 어수선하고 새로운 개혁이 필요했으리라. 그중에 수도 이전은 왕이 큰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단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부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고, 의견대립도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도를 결심한 태조에 의해 계룡시 신도안면으로 결정되는데,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중단된다. 그리고 고려 구신(舊臣)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다.

그러자 가장 대표적인 논쟁거리로 조선의 주궁인 경복궁의 위치논란이 일어났다. 전 국토의 70% 가까이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국토에서는 풍수지리에 의해 산을 정하는 것인데, 주산(主山)이 문제였다. 처음 하륜은 ’무악(안산) 주산설‘을 주장했으나 터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결국, 무학대사의 ’인왕 주산설‘과 정도전의 ’백악(북악) 주산설‘이 부딪치며, 유교와 불교의 논리전개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군주는 남쪽을 보고 정사를 한다‘라는 ’제왕남면(帝王南面)의 원칙’을 강하게 주장한 정도전의 주장이 관철된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백악 주산의 문제점을 예언했는데, 『연려실기술』 제1권에 잘 나타나 있다.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이후 200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世)를 지나지 못해 왕위를 찬탈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00년 만에 전국에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다.”

(왕조가 끝나고, 세월 잃은 시민들만 외국인들과 섞여 화사하다. 촬영=윤재훈)
(왕조가 끝나고, 세월 잃은 시민들만 외국인들과 섞여 화사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여기에서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정도전이며, 태조 때 제1,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6대 단종 때는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에 의해 계유년에 왕위찬탈이 일어나고, 조카는 죽임을 당한다. 200년 후에는 임진란까지 일어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이후로 1394년 태조 3년에 궁궐과 종묘를 비롯한 사직의 터를 마련했으며, 태조 6년에 한성부라는 행정구역명을 정하면서 천도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음 해 아버지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여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그러자 태조 8년 개경으로 환도한다. 그리고 조선의 제2대 왕으로 정조가 오르지만,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 스스로 조선의 3대 왕이 되어, 태종 5년(1405)에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왕대(王臺). 촬영=윤재훈'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 왕대(王臺). 촬영=윤재훈 기자)

그러나 주산으로 북악산이 정해졌지만, 내사산 가운데에서 우리 민족의 눈에는 인왕산이 가장 아름답게 보였나 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안견의 「몽유도원도」 등 대부분 조선 시대 산수화들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인왕산 호랑이 그림은 얼마나 웅혼한가.

만약에 무학대사의 주장대로 인왕산이 주산이 되었다면, 조선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은 좀 줄어들 수 있었을까?

북악산 정상에는 구름만 머흘레라.

(백석동천에서 바라본 북악산 성곽. 촬영=윤재훈)
(백석동천에서 바라본 북악산 성곽. 촬영=윤재훈)

조선의 도읍은 궁극적으로 풍수지리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정해졌다. 그 기본에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있다. 산을 등지고 앞에는 너른 강이 흘러가며, 여기에 좌청룡 우백호가 잘 갖춰져 있으면, 그야말로 최고의 입지조건이 된다.

등에는 북악산(백악산)이 있고 앞에는 너른 한강이 흘러간다. 여기에 좌청룡에 낙산이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지나치게 낮아, 흥인지문(興仁之門)에 용트림하는 갈지之 자를 넣었으며, 땅을 돋우고 지기를 보강했다. 남산은 안산으로 온화하게 바람을 막아주고 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에 의한 한성부 설계도가 정해지자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경복궁의 자리가 정해지고 한양의 내사산이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을 감싸고 있는 외사산으로는 진산(鎭山)에 해당하는 북한산(삼각산)을 비롯하여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이 빙 둘러싸고 있다.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산 지구 비석. 촬영=윤재훈 기자)

즉 북한산, 보현봉, 북악산으로 그 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남산은 임금의 책상처럼 안산(案山)이 되고, 관악산은 신하들이 임금을 조회(朝會)하는 조산(朝山)에 해당된다.

한양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포함한 한성부의 모습이 완성된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보면 ‘한수북 북한남’ 즉 ‘한강의 이북과 북한산의 이남’에 포근하게 들어앉아 있으며 도성의 기준점이 백악이 된 것이다.

고려 남경의 궁궐터는 아직까지 논쟁 중이지만 『서울 육백년사』에 따르면, 지금의 경복궁과 북악산 사이, 청와대가 있는 자리라고 한다. 그러니 땅의 기운은 돌고 돌아 조선이 정복한 남경 터에 조선의 왕이 들어가고, 지금의 대통령들이 있는 셈이다.

여기에 세월이 유수(流水)처럼 흘러 현재의 대통령 당선인은
그 자리가 기운이 좋지 않아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니,
사람 따라, 세월 따라, 그 기운도 변하는 모양이다.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 촬영=윤재훈)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 촬영=윤재훈)

한양 도성에는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네 개의 큰 대문과 작은 소문이 있다. 먼저 큰 대문(大門)으로는 북쪽에는 숙정문, 동쪽에는 동대문으로 알려진 흥인지문, 남대문인 숭례문,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다. 그중에 세 개의 문은 지금까지 남아있지만 유독 돈의문 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전철의 철길을 만들기 위해 헐어버렸다. 그리고 그 자제들은 헐값에 팔려 어느 집 대들보나 담장의 돌들로 사라져 버린다. 한 나라의 전각이 국권을 빼앗기니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실은 사대문이라는 말도 일제가 우리를 얕잡아 보기 위해, 동서남북 이렇게 지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숙정문은 음양오행상 수(水)와 지(智)를 상징하는 북대문이다. 실제 사람의 출입이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였으며,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에 의해 북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문란해진다고 하여, 1413년 폐쇄하였다.

그 대신 숙정문에서 약간 서북쪽에 있는 창의문의 인근 상명대학교와 인접한 곳에 1715년 숙종 41년에 건축된 탕춘대 성문인 ‘홍지문’이, 실질적인 북대문의 역할을 하였다. 고 박원순 시장이 발견된 슬픈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소문에 해당하는 혜화문과 남소문 터, 소의문 터,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이 있다.

(홍예에서 바라본 천장. 촬영=윤재훈)
(홍예에서 바라본 천장. 촬영=윤재훈)

계단을 따라 천천히 혜화문의 홍예에 들어선다. 세월의 연륜을 나타내는 커다란 붉은 대문 뒤에 기다란 서까래가 놓여있어 사람들이 앉기에 참 좋다. 시원한 바람까지 대문 틈으로 들어오니 안성맞춤이다. 꽃향기도 섞여 들어온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천정에는 커다란 봉황 두 마리가 춤을 추고 있다. 보통 용이 그려져 있는데, 특이하다. 이곳은 지형상 예로부터 새가 많아 제압하기 위해 새들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땅값이 금값인 서울에서 혜화문의 뜨락은 너무나 좁다. 어렵사리 마련했을 마당은 스무 발자국 정도만 걸어가도 벽에 닿을 듯하다. 이 층 누각으로 오른다. 뒤편으로 조그만 숲이 있고 관리실이 있다. 동소문로 너머로는 끊어진 서울성곽이 한국의 역사처럼 흘러간다. 이곳 혜화문은 문 자체를 빼고는 거의 볼 것이 없다.

북정마을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뒷문으로 내려가면 된다. 이제 본격적인 오늘의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갈 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이발사가 운영하는, 60년 된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호탕한 ‘명랑 이발소’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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