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강수연ㆍ김지하' 데뷔 동기 황톳길로 떠나다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5.10 10:39
  • 수정 2022.05.1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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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제공)
(강수연 배우, 김지하 시인. 사진=뉴시스 제공)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지난 주말 반짝이던 별 하나가 황톳길에 떨어졌다. 그러더니 황톳길에서 별이 하나 떠올랐다. 하늘의 별은 7080세대의 영원한 뮤즈 강수연이고, 황톳길은 7080세대 저항의 상징 김지하 시인이다. 보통사람에게는 어린이날에서 어버이날로 이어지는 행사 많은 주말이었고, 보통 아닌 사람들에게는 한 권력이 물러나고 또 다른 권력이 들어오는 대통령 이취임식 행사 준비로 분주한 주말이었다. 

69년 데뷔동기

두 사람은 25살 차이이다. 강수연은 1966년생이고 김지하는 1941년생이다. 아버지와 딸, 딱 1세대 차이다. 한 사람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 6.3세대이고 또 한 사람은 1987년 직선제 개헌세대이다. 1987년 강수연이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한국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을 때 김지하는 고문후유증으로 해남 남동집 귀퉁이 방에서 중병을 앓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데뷔 동기이다. 1969년, 강수연이 네 살 때 동양방송 드라마에 길거리캐스팅 된다. 1969년, 김지하는 ‘시인’지에 '황톳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한다. 두 사람이 생물학적으로는 1세대 차이가 나지만 대중에게 찾아온 시간은 같았다. 그리고 대중을 떠난 시간도 기막히게 같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세계 3대 영화제는 칸 영화제, 베를린 국제 영화제 그리고 베니스 국제 영화제다. 강수연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한 최초의 한국 배우이다. 1989년에는 삭발투혼을 불사르며 연기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자배우상을 받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머리카락은 자르면 난다“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당당했다. 그녀는 술자리에서도 당당했다. 연출진과 연기자 스텝들이 밤새워 마시는 술자리의 최종 승자는 언제나 강수연이었다. 그녀를 술로 이겼다는 영화계 사람은 아직 없다. 

평소 술자리에서 강수연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어깨 피고 술 먹으라”고, 영화 베테랑의 명대사는 실제 그녀가 자주하던 말이라고 류승완 감독이 증언하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그녀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고 하니, “이 남자 또 작아졌대요!”라며 좌중에 호탕하게 떠들던 그녀가 다시 호탕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한다고 페이스북에 남겼다. 함께 기도한다는 수 많은 댓글이 달렸지만 그녀는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대 안의 블루' 등 수많은 흥행작을 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처녀들의 저녁 식사' 등 페미니즘 계열의 영화들에도 다수 출연했다.

(강수연 배우. 사진=뉴시스 제공)

사형 선고 받고 살아 난 바보 

김지하는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세계적인 저항 시인이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과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등을 수상했으며 노벨문학상,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1970년 신민당보에 판소리체 시 '오적'을 발표하자 박정희 정권은 반공법으로 그를 구속한다. 1973년에는 글 잘 쓰는 젊은이를 눈여겨 보았던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사위가 된다.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박경리가 각계를 돌아다니며 호소하지 않았으면 이미 그때 형장의 이슬이 되었으리라는 게 후일담이다.

어쩌면 그때 권력에 의해 생명을 마쳤다면 그는 이 땅에 체게바라에 버금가는 혁명가요 저항시인으로 추앙되었을지도 모른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진 이후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발표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그의 구속을 동기로 결성되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급기야 그를 제명한다. 김지하는 2001년에야 '실천문학'에 그 칼럼에 대해 유감을 밝힌다. 그리고 후에 회고하기를 조선일보쪽에서 편집과정에서 보다 자극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 제목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2012년 대선,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면서 그와 뜻을 함께 하고 따르던 이들과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그럼에도 세월호나 촛불정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팔아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우익진영에도 분통을 터트린다. 자신은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도도 아니다. 새로운 길이다”고 했지만 진보진영은 그를 변절자로 규정하며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고 보수진영은 그를 선거에만 이용하고 보호하지 않았다. 말년에 그는 스스로 ‘바보’라고 했다. 5월 8일 1년간의 암 투병 끝에 3년 전 먼저 떠난 아내 김영주의 곁으로 갔다.

(김지하 시인. 사진=뉴시스제공)

'정이' 그리고 '흰 그늘' 

강수연은 지난해 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가제)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최근까지 후시 녹음 작업을 하였다. 10년만의 스크린 복귀였다. 많은 이들이 유쾌하고 호탕한 그녀에게서 팬데믹 이후 위로와 안식을 기대하고 있었다. ‘정이’는 그녀의 유작이 되었다.

김지하는 2018년 마지막 시집 ‘흰 그늘’을 냈다. 자서에는 "마지막 시집이다. 더 이상 교정하지 않는다. (중략) 이제 내겐 어릴 적 한(恨), '그림'과 산밖에 없다, 끝" 이라고 썼다. 그는 정치와 시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의 마지막 시집에 실린 '바보1'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발언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최순실이를 몰랐고
그 애비
최태민이를 몰랐다  
그렇다 
바보만이 그럴 수 있다

이후 그는 '촛불집회'와 '미투운동'에 대한 긍정적 의견을 내기도 하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를 돌이키지는 못했다. 여전히 사회과학을 시적 문법으로 풀어내려한 바보였다.

덧없다. 강수연은 영화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영화인장으로 치루어지고 김지하는 조촐하게 가족장으로 치루어진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 달빛길어올리기, 이 작품 이후 10년만에 영화에 출연한 '정이'는 강수연의 유작이 되었다. 사진=뉴시스 제공)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 달빛길어올리기, 이 작품 이후 10년만에 영화에 출연한 '정이'는 강수연의 유작이 되었다. 사진=뉴시스 제공)

'별'은 '황토'가 되고, '황토'는 '별'이 되고

어린이날이 지나고 어버이날이 지난 오월 월요일의 출근길 한 중년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이 올랐다.

80년대
한 사람은 내 이성적 현실이었고  
한 사람은 내 본능적 이상이었다 
이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이상이 되는 혼돈의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머리 히끗한 중년
이상이 가니 현실도 갔다 
노시인의 죽음은 여배우의 요절을 더 애달프게 한다

밤하늘의 별은 500만 년 전, 1억 년 전에 이미 사라진 별이라고 한다. 그 빛이 500만 년 후, 1억 년 후 지구에 도착한다고 한다. 강수연은 우리시대의 별이다. 대중이 하늘을 볼 때도 하늘을 보지 않을 때도 한 순간도 반짝임을 멈출 수가 없는 스타였다. 이제 땅으로 돌아와 편히 쉬었으면 한다. 반짝이지 않아도 그녀의 예술은 충분히 흙 속에서도 향이 나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황토이다. 검고 해만 타는 총부리 칼날 아래 무더운 황톳길이다. 바보같이 자신에게 붙은 딱지도 안 떼고 떠났지만 이제 더 이상 땅(지하)에 대한 미련을 버렸으면 좋겠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를 땐 그가 남긴 ‘예술’만이 오롯이 밤하늘에서 저항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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