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⑱] 수연산방에서 심우장까지 8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5.16 10:47
  • 수정 2022.05.1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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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에서 심우장까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침묵. 한용운'

(성북 구립미술관, 대형 스피커 작품.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서울이라고 하는데, 이 오래된 마을 길에는 군데군데 꽃들이 만개했다. 산수유와 진달래, 벛꽃과 개나리꽃, 싸리꽃까지 흐드러지게 피고, 어느 집 대문 위로는 목련까지 만개했다. 서울 성곽은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성북 구립미술관으로 가는 하천가에는 소박한 야외전시장이 있고, 많은 스피커를 붙여 탑으로 만들어 놓은 전시물이 있다. 88년 독일에서 부속을 수입해 만들어 놓은 인켈 전축과 대형 스피커, 턴 테이블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필자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윤중식 화가의 회고전. 촬영=윤재훈)
(윤중식 화가의 회고전. 촬영=윤재훈 기자)

성북 구립미술관에서는 윤중식 화가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특히나 우리 민족의 가장 크나큰 아픔 중의 하나인 6, 25 전쟁 시절의 풍경들을, 사실감 있게 그려놓아 더욱 가슴 저리게 했다.

화가는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북에 두고 온 젊은 아내의 얼굴을 그렸다. 산수유꽃이 생각나는 노란 저고리를 입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까지 지었다. 그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그린 그림인데, ’무제-부인(2012)‘이다. 유족들은 서울 성북 구립미술관에 500점의 그림, 자료를 무상 기증했는데, 아버지의 자필 메모를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평양에서 활동했던 화가는 피난길에 해주 근방에서 아내와 첫째 딸을 잃어버렸다. 큰아들과 젖먹이 둘째 딸만 데리고 내려왔으나, 곧 딸마저 세상을 떠났다. 서울에 정착하여 새로 가정을 일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서정성이 생각나는, 색조 짙은 그림을 그린다. 아마도 고향 마을에 대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은둔의 화가로도 알려진 그는 그래서 피난길에 대한 그림들이 많은지 모른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런 그림들이 많이 나왔다.

(‘수연 산방’. 촬영=윤재훈)
(‘수연 산방’. 촬영=윤재훈 기자)

멀지 않는 곳에 상허 이태준의 ‘수연 산방’이 있다. 서울민속자료 11호로 1900년대 조선 후기 상인인 이종석이 지은 별장으로, 당시 큰 상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가옥이다.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부르며,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 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지용은 그의 '지용 문장독본'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태준만치 쓰면 쓴다는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 권은 된다.
정지용,
 '지용 문장독본'의 서문

특히나 이태준은 ’단편소설의 백미로 추앙받는 작가‘이며, 자신의 저서 ’문장강화(講話)‘에서 주장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따라 소설을 썼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은 지금 와서 누가 읽어도,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1930년대 소설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문장과 구성이 현대 소설과 유사하다. 이오덕 선생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전형이라고 칭찬했듯, 깔끔한 표현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들이 많이 썼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였다.

(수연 산방의 부엌. 촬영=윤재훈)
(수연 산방의 부엌. 촬영=윤재훈 기자)

한국 현대소설의 기법에 바탕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은 상허는 ’달밤', '까마귀', '복덕방'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써, 한국의 모파상에 비견된다. 그런데 앞으로는 ’한국의 이태준에 비견되는 모파상‘으로, 문화 사대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시각을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특히나 “작은 것이 강하고, 아름다운 이 시대에 말이다.” 나라가 큰 것이 꼭 좋은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나라의 IT와 K-POP,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의 한류 콘텐츠와, 선박, 반도체, 스마트폰 등이 세계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3~400년 대항해 시대, 총과 대포를 앞세워 약탈과 살육으로 세계를 수탈하며 산업혁명을 이룬 그들의 역사가, 수천 년 문화 선진국을 이룬 아시아의 역사 앞에 그리 우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허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쓰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장인 여운형 선생에게 부탁해 그의 시가 신문에 나오도록 도와주었는데, 그 시가 바로 우리 문단 최대의 난해시라 할 수 있는 ’오감도‘이다.

(수연 산방 안채. 촬영=윤재훈)
(수연 산방 안채. 촬영=윤재훈 기자)

박태원과 조용만 등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안협(지금 북철원군)에 낙향해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결기를 보여주어,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 하나다. 광복 이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경향파 문학과 거리를 두었던 이전과 달리, 조선문학가 동맹과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월북하였기에 이후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일성을 영웅화시키려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하다가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6년 함흥으로 추방, 함흥 노동자신문 교정원로 배치되다가, 다시 함흥 콘크리트 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1964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였으나, 몇 년 후 강원도 장동 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은 66살이던 1969년, 탄광의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던 모습이라고 한다.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 씨가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으로 찻집을 운영하며, 한 작가의 생을 생각나게 하고 있다.

(심우장. 촬영=윤재훈)
(심우장. 촬영=윤재훈 기자)

소설가를 보았으니 이제 시인을 찾아갈 차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시인 중의 하나,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도 몇 번이나 보았던 만해 시인이 불편한 삶을 거처했던 곳, ’심우장(尋牛莊)‘을 찾아간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고, 침략자의 본부인 조선 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유사 이래 지어온 남향 건축 구조를 무시하고 ’북향집‘을 고집했던 시인,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유난히 추웠던 세월‘을 보냈다던 민족의 정신,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이냐.

만해 스님의 고결하고 가열찬 투쟁정신을 엿볼 수 있는 집. 그와 관련된 유물들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었으나, 협소하고 건물 자체의 보존도 필요해서 남한산성 인근에 새로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마당에서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를 통해 독립운동으로 일관했던 스님의 삶을 생각해 본다. 그러다 1944년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윤동주 시인과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떠난다.

(만해스님이 기거하던 방. 촬영=윤재훈)
(만해스님이 기거하던 방. 촬영=윤재훈 기자)

본격적으로 북정마을 명소인 골목길을 오르기 전에 큰 길가에 스님의 흉상과 시가 새겨져 있으니 잠시 쉬어갈 만하다. 올라가는 북정 골목을 따라, 독립을 염원했던 스님이 말씀이 쭉, 이어져 여행자들을 더욱 숙연하게 한다.

심우장은 1984년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대한민국 사적 제550호 승격된 곳이다. 한용운 시인이 3.1운동 옥고를 치르고 거처가 없을 때, 주위의 도움으로 마련된 집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침묵'.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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