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⑲] 심우장에서 한용운의 숨결을 느끼고, 북악(北岳)에 오르다 9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5.20 14:29
  • 수정 2022.05.2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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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에서 한용운의 숨결을 느끼고, 북악(北岳)에 오르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 아래
나뭇가지는 흔들리는데,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무(無)입니까
바람을 잡았다 편 손안에는
아무 자취도 없는데,

그대는 우주의 어디쯤
걸어가고 있습니까

- 무명(無明), 윤재훈

(흰 소를 찾아서. 촬영=윤재훈)
(흰 소를 찾아서.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북정마을 골목길을 올라 만해의 혼이 깃들어 있는 '심우장(尋牛莊)' 뜨락을 거닌다. 뒤따라온 바람이 올곧은 만해의 정신으로 살아나듯, 소나무 가지를 흔들며 지나간다. 어린 시절, ’임‘이란 말이 교과서 시에서 줄창 나와 빼어난 연애시인인 줄 알았는데, 스님이기 때문에 '불타', '조국'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주입하시던 국어 선생님. 지금도 그 사정은 변함이 없으니라.

임이시여
우리는 무엇입니까
맑은 날 태어나서
찰나로 사라지려 하는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임의 손이 닿으면
그곳은 닿을 것 같은데,
뻗는 손만 한갓 되어 떠돕니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 아래
나뭇가지는 흔들리는데,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무(無)입니까
바람을 잡았다 편 손안에는
아무 자취도 없는데,

그대는 우주의 어디쯤
걸어가고 있습니까

- 무명(無明), 윤재훈

요즘처럼 세사(世事)가 어지럽고,
마음까지 어지러워지면,

서늘한 매화 향내가 흐르는
그 집으로 가볼 일이다.

(조선의 귀족 부부 동반 도쿄관광단, 조선병합 기념 사진첩『倂合記念 朝鮮寫眞帖』, ‘朝鮮貴族の內地觀光團’)
(조선의 귀족 부부 동반 도쿄관광단, 조선병합 기념 사진첩『倂合記念 朝鮮寫眞帖』, ‘朝鮮貴族の內地觀光團’)

매국노(賣國奴)들이 일제에 빌붙어 귀족 작위를 받으며 쓸개 빠진 웃음을 날릴 때, 온몸으로 일제에 항거하신 스님의 향기가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대부분 소설가나 시인, 아니, 예술가들이 일제에 붙어 빌어먹을 때, 가열차게 독립을 염원했던 몇 분의 시인이 더 생각난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이상화 시인의 절절한 가슴이 해방 77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 아련하게 살아온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윤동주

1941년 9월 연희 전문학교 졸업반 때이니, 참으로 푸른 작품이다. 해방을 한 해 앞두고 그들의 실험도구로 쓰이다 옥사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한 영원한 청년, 윤동주의 시인. 그를 생각하며 티 한 점 없이 파란, 가을 하늘이 생각난다.​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의 이육사 시인, 이런 선각자들의 피에 의해 더디게, 더디게, 36년 만의 광복(光復)은 찾아온 것이다.

(북정마을 골목길, 촬영=윤재훈)
(북정마을 골목길, 촬영=윤재훈 기자)

꼬불꼬불하고 좁은 북정마을 골목길을 오른다. 이곳도 재개발 바람이 불어 많은 집이 비어있다. 더러 지붕이 무너지고 빈 집안은 고양이들이 들락날락 거린다. 조금 오르니 비둘기 공원이다. 김광섭 시인이 이곳에 살면서 ‘성북동 비들기‘를 썼다. 전쟁이 끝나고 이 산비탈로 모여들었던 피난민과 가난한 도시 서민들의 삶이 질곡하게 녹아있다. 벽에는 시인의 시가 각인되어 있다.

옆으로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곳에는 빛바랜 책들이 약간 꽂혀있고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한가한 오후며 막걸리 한 병 사 들고 올라와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를 암송하다, 이 골목길을 올라 북악(北岳)에 들면 좋겠다.

(북정 카페, 촬영=윤재훈)
(북정 카페, 촬영=윤재훈 기자)

고향 마을 같은 고샅길이 끝나자 탁 트인 산마루가 나온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북정마을‘ 꼭대기다. 건너편으로는 조선 도성 성곽이 여기까지 따라 왔다. 거리작가들에 의해 벽이 예쁘게 치장된 화장실도 있다. 움막 같은 판잣집이 두세 칸 붙어있으며, ’북정 카페‘라고 적혀있다. 간단한 차나 탁배기 한 잔 정도는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북정으로 오라!. 촬영=윤재훈)
(북정으로 오라!. 촬영=윤재훈 기자)

이 산마루까지도 버스가 올라오는지, 정류장이 있다. 낡은 나무 의자에 앉으니, 누군가 써놓은 시 한 편이 보인다. 그 시를 통해, 옛 시절 북정마을의 정경을 상상해본다.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이 여행자의 피로를 풀어준다.

(’북정마을의 깊은 숲속, 감이라도 따로 나오셨나‘. 촬영=윤재훈)
(’북정마을의 깊은 숲속, 감이라도 따로 나오셨나‘. 촬영=윤재훈 기자)

이제 이 작은 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북악으로 오르는 길이다. 머지않아 사대문 중 북대문에 속하는 ‘숙정문’이 나올 것이다. 이 문은 옛날에 산 깊은 곳이라 인적도 뜸하고, 북쪽 문이 열려 있으면 도성 안에 음기가 문란해질 것이라 하여 조선 시대에는 닫혀있었다. 그 대신 북소문인 창의문과 우리가 오늘 출발한 동소문인 혜화문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뒷길을 따라 낡은 집들이 있고 책으로 가득 찬 어느 사내의 허름한 단칸방도 보인다.

(촬영=윤재훈)
(거리 화랑. 촬영=윤재훈 기자)

나지막한 둔덕을 오르니 누군가 벽에 작은 화실을 만들어 놓았다. 심산유곡의 호랑이 두 마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옆에 마릴린 먼로와 아기 공룡,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1964년 작, ‘행복한 눈물’이 보인다.

그런데 그림 가운데 거울을 한 장 같다 놓은 작가의 의도가 문득, 궁금해진다. 보는 사람의 방향에 따라서, 그 거울 앞에 서 있는 물체에 따라서, 수많은 그림이 나타날 것인데 혹여나,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내 작은 집 속에 "강산은 들일 데가 없으니, 둘러두고 보기 위함일까.

특히나 행복한 눈물은 삼성 연관성에 의해서도,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진 그림이다. 이 작가는 주로 작품 소재를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에서 찾았는데, 밝은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 뚜렷한 윤곽선, 기계적인 인쇄로 생긴 점(dot)들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저급문화로 알려진 만화를 회화에 도입하였고, 또한 건축에서 사용하는 기법을 통해서 실내를 디자인하는 작품을 많이 그림으로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화가’로도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서미 갤러리 홍송원 대표가 2002년 11월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의 현대미술 이브닝 세일에서 715만 9500달러(당시 환율로 약 86억 5000만원)에 낙찰 받았다고 하는데, 입이 딱, 벌어진다. 2008년에 미술계에서는 3~4배 정도 값이 올랐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으니, 지금은 얼마나 올랐을까, 우리 서민들에게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숫자다. 이런 그림을 이 허름한 성북동 마을에서 향유할 수 있게 그려놓은 작가의 마음이 고맙다.

(서울 성곽. 촬영=윤재훈)
(서울 성곽. 촬영=윤재훈 기자)

홀로 서울 성곽길 따라 숙정문으로 향한다. 어디선가 산새들이 울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이 평화롭다. 멀리 노을이 내리는가 싶더니 금방 산길이 이슥해진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비 냄새도 나는 듯하더니 후두둑, 후두둑, 쏟아진다. 마땅하니 피할 데가 없는데 숙정문 팻말이 나타나고, 멀리 작은 나무집이 보인다. 달려가 보니 입구는 낮은 사립문으로 닫혀있다.

비가 쏟아지니 눈치 볼 것 없이 넘어가니 목조건물 아래 등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게 빙 둘러 의자가 놓여있다. 그렇게 홀로 있는데 손전등 불빛이 보이고 초병이 한 사람 내려와,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한다. 아마도 CCTV라도 보고 있다가 내려온 모양이다. 비가 쏟아져서 들어왔다고 하니, 개이면 내려가라고 하고 올라간다.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대한민국 수도의 불빛이, 물기에 젖어 발길 아래에서 깜박거린다. 뒤로는 342m의 북악 정상이 우뚝 솟아있고, 발아래 7, 80년대 한국 요정정치의 산실인 삼청각이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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