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노가리골목 터줏대감 '을지OB베어'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1..."을지OB베어가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6.08 10:49
  • 수정 2022.07.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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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1일 새벽

백년을 가라고 백년가게로 지정된 을지로 노가리골목의 ’을지OB베어‘ 간판이 내려졌다.

그후 50일동안 ’을지OB베어‘ 맞은편에서 ’을지OB베어‘를 지키려는 시민들이 매일 마다 ’만선호프 불매‘ 문화제를 한다.

’을지OB베어‘가 사라지면 자신들도 사라진다는 절실함에 집회는 쉽게 끝나지 않을 듯하다.

( 강제 폐쇄된 을지OB베어 앞에서 야장을 기다리는 청년들. 촬영=고석배 기자) <br>
( 강제 폐쇄된 을지OB베어 앞에서 야장을 기다리는 청년들. 촬영=고석배 기자) 

[이모작뉴스 고석배기자]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세월을 헤쳐온 삶의 경륜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보여 주는 말이다. ‘노포’라고 의미가 다르지 않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가이드의 자긍심 넘치는 목소리로 “이 가게는 백 년도 넘게 이어져 왔다”는 장소를 만나곤 한다. 쉽게 문 열고, 쉽게 유행타고, 쉽게 폐업하는, 인구대비 자영업자의 비중이 전세계 톱을 달리는 한국의 여행객에게 ‘노포’란 쉽게 다가오지 않는 단어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노인이 되고, 가게는 노포가 된다

한 자리에서 오랜 시간 장사해온 가게를 우리는 ‘노포’라고 부른다. 노포는 그냥 식당이며 가게가 아니다. 누구는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하지만 노포가 이어온 맛의 절반은 추억이다. 추억의 모세혈관은 사람과 사람을 잇고 하나의 문화가 된다.

우리나라는 뒤늦게야 노포의 문화적 가치를 깨닫고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백년가게‘ 선정사업을 시작했다. ‘백년가게‘는 30년 이상 한 우물을 파는 가게로 가업을 이어 운영 중인 곳을 대상으로 100년 이상 존속 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이다. 신청은 가게 주인이 아니라 시민들의 추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중앙정부의 ’백년가게‘보다 앞서 서울시는 2013년부터 ’서울미래유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래세대에게 전해 줄 100년 후의 보물을 발굴해 보존하겠다는 정책이다. 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지향적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선정한다. 대표적으로 1905년부터 조선의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동대문 ’광장시장‘이 있다. 지금은 도심 속 공원길이 된 서울역 고가도로와 날개의 작가 이상의 서촌 집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960년대 서울의 도시화를 풍자한 이근삼의 희곡 ’국물있사옵니다‘와 가수 혜은이의 ’제3한강교‘, 보신각의 ’타종행사‘ 등 무형의 문화를 포함해 현재 506종이 선정됐다.

백년가게와 서울미래유산 로고

백년가게 중 유일하게 술집으로 선정된 가게가 있다. 그리고 이 가게는 서울미래유산에도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요즘 ’힙지로路‘로 젊은이들 사이에 뜨고 있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을지OB베어‘이다. 노가리는 1980년 '을지OB베어' 창업주 강효근(94) 씨에 의해 처음 개발된 안주이다. 체인 본사였던 OB맥주가 정부로부터 안주 공급을 금지당하자 당시 흔했던 노가리를 안주로 개발했다. ’치맥‘ 이전에 ’노맥(노가리+맥주)‘이 있었다. 중구청은 ’노맥의 거리‘가 서울미래 유산이 되면서 저녁 7시 이후 도로에 테이블을 놓는 것을 조례로 합법화 해주었다. 도심속 야외 테이블에서의 시원한 맥주 한잔 문화를 만끽하기 위해 손님들이 몰려들자 연탄불로 굽던 노가리는 가스불로 구워졌다. 그런데 끝까지 연탄불에 손가락을 꾹꾹누르며 노가리를 굽던 ’노맥‘의 원조 ’을지OB베어‘가 언제부터 네이버 지도에서 사라졌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을지로 노가리 골목. 촬영=고석배 기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을지로 노가리 골목. 촬영=고석배 기자)

노가리 고추장 소스와 저온숙성 맥주

백년가게 ’을지OB베어‘는 노가리만이 유명한 게 아니다. 노가리를 찍어 먹는 고추장도 유명하다. 지금은 ’매운맛‘이 일상화 되었지만 1980년 초에는 파격이었다. 매운맛이 맥주를 들이키는 순간 향으로 변하고 다음 날은 속이 아프지 않고 개운하게 하는 고추장의 레시피는 사위에게조차 비밀이라고 한다. 아직도 창업주와 2대사장인 딸 강효신 씨만이 안다. 연탄불에 구운 1,000원짜리 노가리가 굳을 때쯤에는 을지OB베어 최고급 안주 4,000원짜리 번데기탕을 주문하면 금상첨화다. 번데기 국물에 굳은 노가리를 불려 먹는 맛 또한 추억의 별미이다.

”어르신은 노가리 가격만은 사는 가격이 파는 가격의 두배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올리지 말라 했습니다“

장사에서 수익보다 더 중요한게 있음을 물려받았기에 6평밖에 안 되는 작은 이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다고 사위 최수영씨는 말한다.

(노가리 안주. 촬영=고석배 기자)

서울미래유산 ’을지OB베어‘는 안주만이 유명한 게 아니다. 맥주맛이 거기서 거기 같지만 저온숙성으로 풍미를 더하는 맥주 맛은 기가 막힌다. 식빵이나 고기를 저온숙성 하고 참들기름을 저온 가열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맥주를 저온숙성한다 이야기는 낯설다. 지금이야 급속냉각 생맥주가 있지만 생맥주가 처음 나올 때는 냉장고도 귀했다.

“신설동에 오비맥주 집하장이 있었어요. 공장에서 오자마자 새벽에 제일 먼저 달려가 받았습니다. 바깥에서 상온에 노출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적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케그(맥주 저장용 금속통)를 받아다 가게의 냉장고에 넣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숙성을 했습니다.

당시엔 미국에서 들어온 냉장고였는데 냉장고가 망가지면 근처 세운상가에 있는 단골손님들이 해결해 주었어요. 냉장고가 흔치 않은 시절이었지만 세운상가 기술력은 우주선도 띄울 정도로 대단했어요”
- 을지OB베어 최수영 대표

(을지OB베어 매장 안에 걸려있던 포스터. 사진=을지OB베어 제공)

맥주의 온도를 여름에는 2도 겨울에는 4도로 맞춘다. 냉각기를 사용하지 않고 불편을 감수하는 고집. 을지OB베어 맥주맛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맥주라면 일가견이 있는 수제 맥주 동호회의 모임은 항상 을지OB베어에서 열렸다.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 씨는 물론 이장호 감독과 레이먼킴 등 수많은 방송인들이 이곳의 단골이지만 사인하나 받아 걸어두지 않았다.

노가리 골목인가? 만선호프 거리인가?

MZ 세대에게 SNS 마케팅의 파급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SNS가 간혹 가설이 정설이 되고 거짓을 위한 알리바이로 악용되는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원조는 ’만선호프‘다“는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진실여부를 떠나 ”그래도 만선호프가 노가리골목 흥행에 큰 역할을 했다“는 논리를 만들어 낸다. MZ 세대에게 앱에서도 사라진 ’을지OB베어‘가 대한민국 생맥주 체인점 2호였고, 저녁이면 칠흑 같은 을지로 건자재 상가골목에 최초로 등을 밝힌 원조라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들에겐 골목 가득 야외테이블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게 더 중요하다. 인스타그램에 ’#만선호프‘ 태그를 걸고.

(노가리 골목 안 10개의 만선 매장. 촬영=고석배 기자)

현 만선호프 대표는 기존 가게를 인수하며 2014년 노가리골목에 처음 들어섰다. 그리고 2015년, 을지OB베어와 같은 건물 1층의 오랜 건자재 세입자들이 영문도 모른 체 재계약을 거부당하고 쫒겨났다. 그 자리에 만선호프 2호점이 들어섰다. 이후 만선호프는 골목의 오랜 가게들을 더 높은 월세와 보증금을 무기로 빠른 속도로 점령해나가 을지로 노가리골목에 총 10개의 만선호프 간판을 걸었다. 42년 골목의 역사를 단 7년만에 만선호프 거리로 바꾸었다. 또한 전국적인 호프 체인 사업도 벌여 이곳을 '만선호프' 프랜차이즈 본점이 있는 메카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흔아홉 마리 양을 가진 자는 한 마리 양을 탐하기 시작했다. 

을지OB베어를 지키는 단골들

을지OB베어 최초의 단골은 주변 건자재 상인들과 택배 노동자였다. 지금이야 생맥주가 캔으로도 나오지만 1980년에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당시 을지로의 건자재를 지방으로 싣고 나르는 택배노동자들이 많았는데 출하하기 전 잠시 땀을 식히기 위해 한잔하는 문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서서 마시는 스탠드식이라 6평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지방으로 소문이 나기도 하고 을지로를 떠난 노동자들이 어느 날 사위와 며느리를 자신이 즐기던 추억의 장소라고 데리고 왔다.

백년가게 을지OB베어는 그렇게 지역민들을 단골로 삼아 생맥주를 알리며 10년 정도 외롭게 고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고서야 생맥주가 대중화 되고 을지로에도 생맥주 전문점이 하나둘 생겨났다. 맞은편에 뮌헨호프가 생길 때도 경쟁보다도 서로 골목을 힘 합쳐 키워보자고 했다. ’만선호프‘도 88올림픽 이후에 생긴 생맥주집 중에 하나였다. 원래의 만선호프 주인은 상인들과 원만한 유대관계도 같고 장사도 열심히 해 만선호프를 키웠다 한다. 2015년 만선호프에 새 주인이 들어서기 전까지 만해도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서로의 브랜드가 다양하게 살아있는 상생의 골목이었다.

(최수영 을지OB베어 대표. 촬영=고석배 기자)

을지OB베어는 건물주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건물주 중 한명은 “이 동네가 폭발하지 않는 이상 나가시라고 말씀 안 드려요”라며 재계약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건물주가 ‘만선호프’와 계약을 맺으며 을지OB베어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지만 ‘만선호프’가 제안한 보증금과 월세만큼 내겠다고 재계약을 협상했다. 막무가내로 거절되었다. 강제집행 소송이 들어왔고 용역들이 들어와 집기를 끌어내려 할 때마다 창업주의 딸 강효신 씨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근처의 인쇄소, 타일가게, 공구가게, 건자재가게 노포의 단골들이었다. 소식을 듣고 멀리 있는 단골들도 달려왔다. 그리고 이곳만은 꼭 지키겠다고 단골들이 자발적으로 대책위를 구성했다. 그 단골들 중에는 42년 을지OB보다 나이가 어린 MZ세대들도 있었다.

(연대인이 그려준 삽화. 촬영=고석배 기자)

강제집행은 다섯차례나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발 벗고 막아낸 대책위원장은 이웃 을지로에 있는 향린교회 김종일 교인이었다. 그는 얼마 전 뇌출혈로 쓰러졌다. 창업주의 사위인 을지OB베어 최수영사장은 웬일인지 강제집행을 할 때마다 만선호프 사장이 미리 알려주었다 한다. 그러더니 만선호프는 올해 1월에 건물의 지분 62% 지분을 인수하고 새로운 건물주가 됐다. 만선호프는 건물매입이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이제는 임차 대기자가 아닌 건물주가 되어 을지OB베어를 만났다. 그리고 을지OB베어 6평 공간 중 테이블 3개 정도의 공간을 화장실로 리모델링하자고 제안했다. 을지OB베어는 계약해지를 위한 핑계를 만들기 위한 제안이라며 거절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다시 날짜를 잡기로 했다. 그리고 재협상을 약속한 날 새벽 ‘야간강제집행’을 강행했다. 이번에는 알려주지 않았다. ‘야간강제집행’은 ‘주간강제집행’ 5회이상이 되어야 법적으로 가능하다. 지난 4월 21일 새벽 3시 20분이었다.

(철거된 을지OB베어 담벼락에 놓인 연탄재에 누군가 장미 한송이를 심었다. 촬영=고석배 기자)

[기자수첩] 노가리골목 터줏대감 '을지OB베어'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2...’을지OB베어'를 지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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