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변천 기록 따라 ‘시절여행’

김수정 기자
  • 입력 2022.06.21 18:2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 ‘노량진, 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 보고서 발간
노량진 학원가의 탄생과 우리가 몰랐던 노량진 학원가 이야기

[이모작뉴스 김수정 기자] 공무원학원가와 고시촌, 컵밥거리, 수도권 최대 수산물 도매시장, 개항기 최초 철도역이자 지하철 1‧9호선 환승역 노량진. 이곳의 변천 기록을 통해 시절을 거슬러 보자. 시절여행에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발간한 <노량진, 삶의 환승지대 도시화의 전이지대> 보고서가 길잡이가 되어준다.

조선시대 이래 도성을 오가는 길목이었던 노량진(鷺梁津)

 

사진=서울시 제공
1937년 준공된 한강인도교 전경 / 사진=서울시 제공

“서울 시내는 기차가 못 들어가고 철교도, 배다리도 없으니까 일단 노량진에 모든 것을 다 내려야 했어요. 3·1운동 전까지 내륙의 산물들은 다 노량진을 거쳐서 인천으로 가기도 하고, 인천으로 들어온 해외 물자가 다 노량진을 거쳐 가고 그랬죠. 일반화물은 큰길 쪽에 내리고, 석탄은 지금의 수산시장 쪽에 쌓았어요. 그래서 노량진수산시장 쪽에 연탄공장도 많았죠.” -박소강(1950년생, 노량진 토박이)

조선시대 이래 노량진은 도진촌락(渡津村落)으로서 도성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강 이남에 위치한 노량진은 서울에 속하지 못하고, 서울(경성)에 땔감을 파는 공급처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한강철교(1900)와 한강인도교(1917, 한강대교)가 놓이면서 노량진의 나루터 기능은 상실됐다. 하지만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된 노량진은 철도와 전차가 지나며 서울과 인천, 강북과 강남을 잇는 도시화의 전이지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 월파정(月波亭)의 여러 주인들

일본인 재벌 아라이 하치타로의 별장 / 사진=서울시 제공
일본인 재벌 아라이 하치타로의 별장 / 사진=서울시 제공

“월파정이 정조가 뱃놀이했던 곳인데, 지금이라도 잘 보존해야 해요. 안 그러면 나중에 흔적으로만 남고 사라질 거예요. 그쪽에 장택상 총리 별장이 있어서 못 건드리고 남아 있는 거죠. 월파정 있던 자리에 수백 년 된 나무가 그대로 있어요. 거기서 옛날 사람들이 달 보고 용산과 마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시를 쓴 것도 많아요. 요즘 사람들이 거기가 강이었다는 걸 누가 알겠어요? 지금은 묻혔지만, 거기에 큰 바위가 있었어요. 홍수가 나면 30m짜리 큰 웅덩이가 생겨서 다이빙하고, 샛강으로 물고기가 많이 들어와서 잡고 그랬죠.” -박소강(노량진 토박이)

월파정은 1776년 정조가 노들강 기슭에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조선 중기 이래 장유(張維, 1587~1638)의 별서로 명성이 높았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재벌 아라이 하치타로(荒井初太郎)가 이 일대 땅을 소유하며 양식 별장으로 신축됐다. 장유는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신으로, 딸이 효종의 비 인선왕후에 책봉돼 신풍부원군에 올랐던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라바울 마담(본명 김정순)이 적산가옥이었던 아라이 저택을 매입해 미군과 한국인 고위 관리를 상대로 하는 사교장을 운영하며 댄스파티를 열었다. 라바울 마담은 일제 말기 일본의 해군 무관이던 마쓰모토(松本)의 애첩으로, 수십 명의 위안부를 데리고 남대평양 라바울 군도로 위안 원정을 갔던 인물이다. 그의 별칭인 라바울은 이런 연유에서 얻어진 듯하다.

1950년 전후에는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 장택상의 별장이 되었다. 2005년부터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유지재단에서 소유하다가 최근에 소유권이 일반인에게 양도됐다. 현재 옛 월파정 자리(노량진동 13-8 일대)에는 수산물을 취급하는 식당 옆에 고목 한 그루만 남아 그 자리를 알리고 있다.

◆ 한강을 메워 세운 노량진수산시장

옛 노량진수산시장 경매 모습(1976) / 사진=서울시 제공
옛 노량진수산시장 경매 모습(1976) / 사진=서울시 제공

“수산시장 자리는 옛날엔 강이라 복토하기 전에는 사람이 살 땅이 없었어요. 흙으로 덮고 나서 한국냉장(현 노량진수산시장) 짓기 전에 잠깐 철도변에 붙어서 피난민촌이 있었어요.” -박소강(노량진 토박이)

일제강점기부터 노량진역과 노량진수원지 등이 들어서면서 노량진은 도시확장에 따른 도시기반시설들이 이 지역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이러한 현상은 지속돼 도로망·상수원과 같은 시설들이 노량진역 주변으로 계속 증가했다. 노량진수원지의 확장과 한강변 도로, 수원지 주변의 여러 입체 교차로의 모습은 서울의 급속한 팽창이 만들어 낸 도시 경관의 대표적 사례다.

노량진수원지는 본래 서울이 아닌, 인천 상수도의 급수를 위해 만들어졌다. 인천은 중요한 무역항 중 하나로서 민간급수는 물론 선박급수 또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노량진수원지는 1910년 10월 통수식을 하고, 12월 급수를 개시하였다. 처음에는 관영으로 수도를 운영했지만, 1922년 인천으로 무상양도 되었다. 1948년 5월에 비로소 서울로 관할권이 이관되었다.

이후 1967년 노량진역 북쪽으로 한강변을 따라 최초의 유료 자동차전용도로인 강변1로(현 노들로)가 건설됐다. 한강변 도로의 건설은 서울의 확장 과정에서 기반시설의 확충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노량진 일대를 크게 바꾸어 놓은 사업이었다. 한강변 도로는 노량진수원지 일대에서부터 여의도 남단의 강변을 따라 이어지며 강변의 상습 침수구역을 막는 제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노량진역 북쪽으로 한강변에 택지 2만 2,000평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1971년 노량진수산시장이 건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청년들의 삶의 환승지대 노량진 학원가

 

노량진 학원가(1999) / 사진=서울시 제공
노량진 학원가(1999) / 사진=서울시 제공

“한샘학원을 들어가려고 한 2~3일씩 학생들이 기다렸어요. 수강증을 끊기 위해서 학부모들이 요새 아파트 청약하는 식으로 몰려왔어요.” -문상주(고려직업전문학교 이사장)

노량진에 학원이 최초로 들어선 것은 1977년 정부의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 계획’에 따라 사대문 내 학원을 사대문 밖으로 이전하는 ‘도심학원 이전계획’이 실시되면서부터다. 이 계획에 따라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 밀집해 있던 학원들은 각각 노량진‧강남‧용산 등으로 이전했다. 이때 재수학원의 한 축을 담당하던 대성학원이 1978년 노량진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9년부터 대형종합학원과 중소 규모의 기술학원, 정진학원·한샘학원 등 단과학원들도 이전했다. 이로써 노량진은 1980년대에 본격적인 학원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노량진 학원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노량진로에 면해있던 대형 재수학원과 단과학원들이 문을 닫거나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를 공무원학원이 대체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1993년 수능 제도의 도입과 대치동 학원가의 부상이 재수·단과학원의 노량진 이탈을 불러왔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공무원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면서 소수의 유명 강사를 중심으로 한 중·소규모 공무원학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노량진은 ‘공무원 시험 합격을 위한 메카’가 되었다.

“그때는 공무원 시험은 노량진 아니면 안 된다고 했어요. 시골은 물론이고 어디 경기도 외곽이라도 부모들이 ‘노량진에 가야 다 합격한다’고 했죠. 저 꼭대기에 고시원을 만들어도 다 차고, 그것도 자리가 없다고 하고 진짜 그런 전성기가 있었어요.” -정대열(노량진 제일서점 대표)

중소 규모의 학원들로 구성되었던 노량진 학원가는 2010년대 초반 ‘해커스’와 ‘공단기’, 2010년대 후반 ‘메가스터디’ 등의 대형학원이 공무원 수험시장에 진출함에 따라 대형학원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 학원들은 이미 종로와 강남 등지에서 어학·입시 관련 교육 서비스를 제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무원 학원가에 변화를 몰고 왔다. 가장 큰 변화는 인터넷 강의 시스템의 도입이다. 인터넷 강의의 도입은 현장 강의를 중심으로 운영하던 노량진 학원가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온라인플랫폼의 등장으로 노량진을 찾는 수험생 자체가 줄게 되었다. 게다가 대형학원들이 막대한 자본력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 경쟁력을 잃은 군소학원이 대다수 문을 닫았다.

◆ 우리가 몰랐던 노량진 공무원 학원가 이야기

만양로 좌우로 펼쳐진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 / 사진=서울시 제공
만양로 좌우로 펼쳐진 노량진 고시촌의 모습 / 사진=서울시 제공

“노량진도 그렇고 신림동도 그렇고 강사한테 ‘교수’라고 하는 부분을 잘 이해를 못해요. 그렇게 된 연유가 있어요. 신림동에서 고시학원을 제일 처음 장수생들이 만들었어요. 25~30년 오래 공부한 분들이 고시는 안 되고 하니 당시 현직 교수인 은사님을 모시고 학원을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초반에 강의하시던 분들은 당시에 그 분야 대가였죠. 옛날에는 법대 정교수만 교재를 썼거든요. 그리고 저자가 직접 신림에서 강의했어요. 그래서 신림동이나 노량진에서 강사를 ‘교수’라고 부른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 계속 내려온 거죠.” -황남기(노량진 공무원학원 헌법 강사)

노량진에 ‘공시생’이 있다면, 신림동에는 ‘고시생’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공직자 임용시험을 준비하기에 범위와 난도가 다를 뿐 법 과목 등 유사한 공부를 한다. 때문에 노량진과 신림동 고시촌에는 닮은 점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사에게 ‘교수’라는 호칭을 하는 것이다. 이 연원은 신림동 고시학원의 출발에서 찾을 수 있다. 신림동 고시학원에서는 초창기 현직 교수를 강사로 초빙했다. 이 교수들은 대학교재를 집필하는 당시 해당 분야의 대가(大家)였다. 학원에서 대학교수가 직접 강의했기 때문에 호칭이 당연하게 ‘교수’가 되었는데, 더 이상 대학교수가 강의하지 않는 지금까지 관례가 되어 노량진 공무원학원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난립’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노량진에 출판사가 많은 시절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출판사 입김이 셌어요. 2010년 전후만 하더라도 출판사가 강사 에이전시 역할을 했어요. 만약 특정 출판사에서 A라는 선생님과 일했을 때 선생님의 네임밸류가 올라갈수록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 많이 팔려요. 그리고 강사의 인지도에 비례해서 출판사가 학원에 직접 요구하는 사항이 많아져요. ‘우리 선생님이 불편해하시는데 강의실 바꿔주세요.’ ‘이벤트로 교재 100권 준비할 테니 진행해 주세요.’라는 식이에요. 결정적인 부분은 학원과 선생님이 호흡을 잘 맞춰서 가고 있는데 계약 만료가 다가오면 출판사가 다른 학원에 접촉해 계약금을 제안받고 수고비를 챙기고 했었죠.” -전득진(노량진 해커스소방학원장)

2010년 이전 노량진에서는 공무원 시험 교재를 출판하는 출판사가 학원 강사의 에이전시 역할을 겸했다. 필자인 강사의 요구사항을 출판사에서 대신 학원에 전달하거나, 다른 학원으로 이적(移籍)하는 과정에서 계약금 조율 등을 담당했다. 또 출판사가 직접 신진 강사를 발굴해 학원가에 데뷔시키고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조력자 역할을 해주며 관계를 돈독히 다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노량진에 진출한 대형학원들이 강사와 계약을 통해 학원 자체적으로 출판을 하게 되면서 노량진에 있던 기존 출판사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저는 학원비에 9만 원 정도 추가해서 ‘스파르타 관리반’을 신청했어요. 관리반에 들어가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8시까지 자습실에 지문 등록을 해야 출석 인증이 되고, 밤 10시까지 의무적으로 공부해야 해요. 1시간 40분 단위로 자습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자습 시간에는 화장실도 갈 수 없어요. 저녁은 6시부터 7시 사이에 먹게 해주고, 7시에 들어와서 또 자습하고요. 10시 이후에는 자정까지 자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요. 관리반엔 관리 선생님이 계셔서 저녁 8시 이후에 자습 인증을 하면 상점을 줘요. 학원에 상벌점제도가 있는데, 지각하거나 학원에 안 나가면 벌점이 쌓여요. 몇 점 이상 되면 경고, 그다음에는 재적이 돼요. 남은 학원비를 환불해 주고 다시 안 받아줘요.” -최민준(소방공무원 준비생)

대형학원들은 ‘강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수험생들의 생활을 ‘관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현상이 ‘관리형 독서실’의 등장이다. 관리형 독서실은 학원과 독서실이 제휴를 맺는 방식과 학원이 직접 운영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관리형 독서실에서는 학원의 인터넷 강의를 기본 제공하고, 독서실 출입과 공부 시간 및 일정을 철저하게 관리해 준다. 이러한 소위 ‘스파르타’ 관리 서비스는 대학입시 과정에서 이미 이러한 관리시스템을 경험한 수험생들의 요구에서부터 시작됐는데, 인강을 활용한 수험 준비가 보편화하면서 자신을 구속해 공부하게 하려는 장치다.

자료제공=서울역사박물관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