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학기행②]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을 찾아서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6.27 11:13
  • 수정 2022.09.1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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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을 찾아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박인환 시선집』, 1955

(서울 이야기. 촬영=윤재훈)
(서울 문학기행 광화문 거리.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70년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조국은 참 많이도 변했다. “잃어버린 우리의 원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짐작조차 하기 힘들어진 이 시대, 오늘날 이런 경제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 우리 민족은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루었을까?

조선 500년, 일제강점기,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가난과 질곡의 수렁텅이에 끝없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산업화를 거치기 전까지는 따뜻한 인정들이 남아 있었다. 가진 것이 없으나 서로 나누었고 눈물 많은 세상이니 서로를 다독이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처럼 반인륜적이고 가학적인 범죄들이 수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시절, 서울의 중심은 ‘명동’이었다. 대한민국 문화의 중심지, 유행이 시작되는 곳, 온갖 멋쟁이들이 모여들었고, 술과 음악과 문학이 넘쳐 흘렀다. 담배 연기와 커피 향이 흐르는 낭만의 거리였고, 술병 속에 별이 떨어지는 그런 밤이었다.

그 거리에서 박인환 시인은 ‘목마와 숙녀’를, ‘세월이 가면’을 애타게 불렀다. 그리고 이상 시인을 기리며 3일 낮밤 폭음을 하다가, 31살의 젊은 나이로 절명했다. 그 거리에서 수많은 문인들도 명멸해 갔다.

그 땅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의 무한 질주는 시작되었다. 가난 극복이라는 절대 명제에 밀려 새마을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옛것은 무조건 부수고 문화와 예술은 사치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신에 압구정동이 번성하고, 한국인의 삶을 이어주던 평균적인 정서들도 무너져 갔다.

1948년 봄, 시인은 덕수궁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결혼식이었으며, 문인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6, 25가 반발했을 때는 피난도 가지 못하고 지하에서 9, 28 서울 수복 때까지 숨어 살다가, 딸 세화를 낳고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간다.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일하다가, 육군 종군 작가단에 들어가 수많은 전선을 누비며 목숨을 건 기사들을 썼다.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였지만 부부는 서로 사랑했고, 두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수많은 편지로 서로의 마음과 안부를 전했다. 편지에서도 아내에게는 반드시 존칭을 썼고, 아이들에게도 다정한 아버지로 사랑을 전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한잔의 술을 마시고, 박인환 시집)

큰아들인 박세형은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영문과 최인호(崔仁浩·1945~2013)는 같은 학번이고 마광수(馬光洙) 교수는 국문과 1년 후배로, 같이 수업도 듣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서점을 치운 시인은 ‘목마와 숙녀’라는 시가 박인희의 음울한 목소리에 의해 전파를 타면서, 10만 부 이상 나가는 흔치 않은 시집이 되었다. 아들에 의하면 생전에 어머니에게는 내가 죽으며 이 시집이 잘 팔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자식들 결혼할 때는 인세의 도움을 조금씩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은 박인희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시에다 음악을 붙이는 것은 시적 이미지를 혼란시킬 수 있어요.
시는 그냥 언어로 읽고 행간으로 느껴야 하는데,
박인희의 낭송과 배경음악은 가슴을 우려내려는 통속적 색채가 많아요.
괜히 아버지 생각을 왜곡시켜 놓은 것이 아닌지 몰라요.

필자도 그 말에 동의한다.

일견 시는 시, 날 것으로 독자들이 생생하게 대하고
거기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느껴야 하는데,
애처로운 음악과 가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시에 다른 외피를 씌우고,
멜랑꼬리하게 우리 세대가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일기도 한다.

 

시인은 서점을 하면서 그곳을 드나들던 지금의 아내 이정숙 씨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 시절 박인환은 키가 180cm나 되는 무척 큰 키였는데, 부인도 170cm로 농구선수 출신이었다고 하니, 자식들도 무척 클 것 같다. 장인이 은행직원으로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던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두 명의 아이가 있다.

또한 평생 앙숙이었던 김수영 시인의 부인과는 숙명여고 같은 반 친구였는데, 결혼 뒤에 만나 서로 놀랬다고 한다. 서점에는 많은 문인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박인환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반말하듯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당시에는 굉장히 무례하고 파격적인 행동이어서, 김수영이 유난히 그의 행동을 힐난했다고 한다.

(은성 주점 터, 촬영=윤재훈)
(최불암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주점' 터, 가난한 문인들의 외상집. 촬영=윤재훈 기자)

오늘은 서울시가 후원하고 ‘서울 도시문화연구원’이 총 20회로 기획한 ‘서울 문학기행’ 1회차로, 서울에 있는 박인환 시인은 흔적을 찾아가는 날이다. 오전부터 햇살이 따가웁지만 을지로역 앞에 대략 3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사무국장은 아마도 오늘 코스를 종일 유튜브로 중계할 모양인지 음향기기들을 설치하느라 부산하다.

진행은 안양대 국문학과 교수인 맹문제 시인이다. 20회 여정의 문을 여는 제1회 진행을 맡아 약간 부담감이 들 듯도 하다. 하지만 맹 교수는 박인환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낸 전문가이니 오늘 시인의 일대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린 시절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기대가 된다. 20대 초반 음울한 음악다방에 앉아 DJ에게 메모지로 신청하던 그 추억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1950년대 명동에 있던 <은성 주점>으로 가는 길은 아직 정오가 되려면 멀었는데도 벌써 볕이 뜨겁다. 그곳은 최불암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그 시절 가난한 문인들이 외상술을 먹으면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외상값 장부를 보며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맹문제 교수도 그렇게 짐작하는 모양이다.

 

 

은성 대폿집에서 박인희가 불려 유명해지며 명동의 엘레지로 통했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가 쓰여졌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시선집』, 1955

(가족. 촬영=윤재훈)
(가족. 촬영=윤재훈 기자)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성당 쪽으로 비스듬히 뻗어간 길을 걷다 보면, 낡고 앙상한 3층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에 한때는 ‘세월이 가면’이라는 카페가 있었고, 전후(前後) 명동 시절에는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싸롱’이 있었다.

박인환은 여기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취기가 돌면 건너편에 새로 생긴 대폿집인 ‘은성’으로 갔다. 그리고 몇 명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가수이자 배우이며, 백치 아다다를 불러 유명해진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지만, 그녀가 끝내 빼는 바람에 같은 자리에 있던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인환이 니가 시를 쓰면,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 즉석에서 시가 쓰여지고 이진섭도 샹송 풍의 곡을 붙여 흥얼거렸다.

그 혼돈 속의 시절, 누구나 가슴 속에 있었지만 단어로 규정해내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이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다. 잠시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과 이봉구가 합석을 했다.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임만섭이 노래를 부르자 길 가는 행인들이 술집 앞으로 모여들고 즉석 리사이틀이 벌어졌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폿잔을 기울이며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그것을 노래로 부르는 사람들, 여기에 박수를 보내는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 노래는 후에 나애심이 방송국에 있는 오빠의 도움으로 레코드 취입을 했으며, 박인희가 리바이벌해서 큰 인기를 누렸다.

(경복궁이 잘 보이는 곳. 촬영=윤재훈)
(서울 문학기행 참여자들, 경복궁이 잘 보이는 곳. 촬영=윤재훈 기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지고 ‘명동 엘리지’라고 불리어졌으면, 골목마다 스미어 있는 외로움과 가난, 전쟁의 상흔들을 상징이라도 하듯 여기저기서 불리어 졌다. 명동 백작인 이봉구는 시대의 증인이 되어 자신의 소설에 이 장면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며칠도 지나지 않아 친구 김훈이 사준 자장면 한 그릇 얻어먹고 술에 취한 채 심장마비로 먼 길을 떠난다.

그런데 시인은 어떻게 순식간에 그토록 애절한 가사를 써 내려갈 수가 있었을까, 천부적인 그의 재능이었을까?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시인은 그 전날 십 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아마도 무연히 그의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의 가슴 저 밑바닥에 남아 있던 옛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 이제 흙이 되었을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까?

순결한 꿈과 희망으로 부풀었던 그녀와의 시간, 어쩌면 그는 무언가를 직감하고 그녀의 무덤을 찾았을까? 그리고 마지막 작별을 고했을까? 

한국에 버지니아 울프를 소개했던 사람, 그 시절에 ‘페시미즘’을 얘기했던 시인, 우리의 국어책에서 마주했던 시, 만년필을 찻집에 저당 잡히고, 대폿집에서는 외상 술값이 밀리고, 봄날이 오도록 세탁소에 맡긴 봄 코트도 찾아 입지 못한 채, 두꺼운 겨울옷을 입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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