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 기자수첩]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타는 목마름으로’ 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6.30 10:54
  • 수정 2022.07.08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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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타는 목마름으로’

은유의 적확성, 뿜어져 나오는 웃음이 두드러지고
예리한 풍자가 전편을 채웠으며,
읽은 후에는 맑은 비애의 감정이 남았습니다.
시인 김지하의 ‘천재’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미야타 마리에 여사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황석영 소설가.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젊은 날 온몸으로 박정희 시대 유신독재와 맞섰던 위대한 시인, 사상가로 생명운동가로 마지막 동학인으로, 빼어난 화가로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대인(大人). 말년에 오랜 민주화 투쟁과 잔악한 고문 후유증에서 온 섬망(譫妄)증으로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을 기고해 큰 파장을 일으켰던 시인. 원제는,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를 조선일보가 일방적으로 바꿨다.

이 기사로 인해 김지하 시인이 당시 진보 진영을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90년대 무렵 학생 시위 중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안타까워서 내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에 대표적인 저항 시인의 이 말은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만큼 시인은 한국 사회에 던지는 말의 비중이 컸다. 이것은 그에 대한 그동안의 행보에 대한 존경과, 아쉬움에 대한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 번의 서운함이 있었다. 평생 자신을 고문하고 죽이려 했던 박정희의 딸과 화해했던 것. 역시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박정희마저 용서하며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오늘 시인을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유홍준 선생. 촬영=윤재훈)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유홍준 선생. 촬영=윤재훈 기자)

옛 시절 우리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전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선생의 사회로, 천도교 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선생은,

김지하 시인의 공이 9라면 과는 1에 불과하다.
그 과오라는 것도 국가폭력에 대항에서 얻은 상처임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 그의 말년 행보에 대해 많은 오해도 있었고,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리적 이유도 없지 않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김 시인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고려할 때,
이렇게 쓸쓸하게 보내는 건 도리에 맞지 않다.

며 이번 추모문화제를 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문화제에는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유인태 전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황석영 소설가, 방송인 최불암 등과 6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시인의 미발표 시 8편도 공개되었다. 추모 문화제 상임추진위원장을 맡은 이부영 씨는 모시는 말씀에서 “오늘 김지하 시인에 대한 그리움 혹은 응어리들도, 확 풀고 가길 바란다.” 고 했다. 황석영 소설가는 1980년 석방 이후 많은 논란이 있었던 김지하 시인에 관하여,

사상가로 성장하여 돌아왔으나 일상을 여전히 간과했던 듯하다
이는 지식인들의 일종의 투옥 후유증일 수도 있다

고 말했다. 이어 김사인 시인의 추모시에 이어, 함세웅 신부님의 추억이 이어진다.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문진오 가수. 촬영=윤재훈 기자)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 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 '애린', 김지하

누군가 김지하 시인을 호명해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을 했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많은 사람이 말했다. 그가 한국 민주화에 끼친 공에 대하여, 과(過)는 0. 몇 %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어쩌면 오랜 고문 끝에, 세상에 대한 깊은 회의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조선일보의 교활한 농간 때문이 아니었을까하고, 친일 언론들은 워낙 고도화된 응집력으로 다방면에서 공격을 가하여, 끝내 민족 지사들의 평생의 공적을 무너뜨리고, 단번에 이간질시키는 파렴치한들이기 때문에.

(김지하의 소상과 영정이 웃는다. 촬영=윤재훈)
(김지하의 소상과 영정이 웃는다. 촬영=윤재훈 기자)

단 위에는 한국화가 김봉준 화백이 만든 김지하의 소상이 마치 부처님 상처럼 놓여있고, 그 아래에는 영정이 있다. 촛불이 켜져 있고 마지막 가는 길 누구나 마실 수 있게 막걸리와 잔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다. 전면에는 커다란 플랭카드에 쓴 고인의 시 ‘애린’이 걸려있다.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는 먼저 제의 의례로 시작되었다. 왕정희 무용가의 청수 한 동이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이수자 이노연 씨의 남녘땅 살풀이, 이연정 무용가의 마고 춤으로 시작되었다.

(생명 운동 시대. 촬영=윤재훈)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생명 운동 시대. 촬영=윤재훈 기자)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시인은 서울과 인제, 해남을 오가며 살았다. 1969년 등단 후 70년에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 저항시를 연이어 발표했다. 그 시절 청년들에게는 ‘쇼크’와 같은 시였다. 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사형 선고까지 받게 된다

개인 사정 때문에 불참한 도올 선생은,

“나는 지하와 오래 사귄 사람이다.

그의 비극은 강일순이 말한 ‘해원’을 심도 있게

실천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라고 진단하며, “우리에게는 엘리어트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사상가들의 모임에서 만난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일화를 소개한다.

“당신의 글쓰기에서도 느꼈지만 한국인의 감성에는

어느 민족도 따라갈 수 없는 생명력 같은 게 있어요.

김지하의 시는 단순한 시가 아니라, 생명의 약동 그 자체에요.

 

감옥의 조그만 창틀에 낀 먼지 사이에서 싹트는 파아란 풀,

그 풀의 새싹이 우주 전체를 밀치고 나오는 듯한 그 힘,

그 힘 속에서 무한한 민중의 의지를 발견하는 김지하!

김지하는 정말 특별합니다.”

시인은 참으로 외로웠을까?

“짜식들이, 의리가 있어야지!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 데가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누군 데를 말하는

그의 푸념이, 말년의 생애를 덮었다.

참으로 딱하다.

인간의 최대의 죄업은 ‘고독’이다. 지하는 너무 고독했다. 

“지하는 지금 자업자득일지는 모르지만 억울하게 지하에 갇혀있다.

우리는 지하를 정당하게 지하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고 사자후를 한다.

(추모 탈춤. 촬영=윤재훈)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추모 탈춤. 촬영=윤재훈 기자)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는,

70~80년대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저항시인이며,
그 예술적 아이디어나 저항성의 높이가 대단해 범접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91년 칼럼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본인도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4,19 세대를 대표했고 70년대 반유신 운동과
80년대 민중문학까지 업적이 대단히 많은데,
그 이후 시대나 젊은 사람들과 화해하지 못했다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도

1991년 칼럼은 학생들의 저항 자체가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만류한 것이라며,
운동권에 의해 오해가 있었던 같은데,
시국에 대한 감수성과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운동권에서는 이 칼럼을 크게 받아들여
당시 반 김지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며 김지하 선생에게는 평생의 상처가 되었고, 한국 정신사에도 큰 갈등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미야타 마리에 여사. 촬영=윤재훈)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미야타 마리에 여사. 촬영=윤재훈 기자)

특히 일본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인연을 끝내 울먹이며 읽은 ‘미야타 마리에’ 여사의 목소리는 일순,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중앙 공론사’ 편집자이며 일본 문예지 ‘우미’의 편집장으로 우리에게는 ‘출판금지’가 되어있었던 1970년부터, 사명처럼 고인의 작품을 번역, 출판하고 구명 운동을 전개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인 김지하 씨와 이별하기 위해서 저는 서울에 왔습니다.
깊은 회한을 품고 김지하 씨가 없는 서울에 왔습니다.
긴 침묵을 계속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나버린 시인!
왜 그랬는지 묻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실이
나를 움츠려 꼼짝 못하게 합니다.
발길이 무거운 ‘서울길’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김지하 씨의 작품을 통해서 내 몸속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1970년 김지하의 장편 풍자시 ‘오적’을 처음 읽고,

그의 압도적인 말의 힘에 매료되었습니다.
분노와 비웃음 홍소(哄笑)의 화살이 부정과 부패에 빠진
통치자를 찌르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말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은유의 적확성, 뿜어져 나오는 웃음이 두드러지고
예리한 풍자가 전편을 채웠으며,
읽은 후에는 맑은 비애의 감정이 남았습니다.
시인 김지하의 ‘천재’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처녀시집 ‘황토’가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 반공법 위반으로 한국에서 발매할 수 없게 되자, 무모한 도전을 하고 71년 12월 일본에서 최초의 책 ‘긴 어둠의 끝에’를 중앙공론사에 출간 시켰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72년 6월 ‘김지하 구원 국제위원회’를 만든다.

오오에 겐자부로, 사르트르, 보브와르, 노옴 촘스키, 하워드 진, 에드윈 라이샤워 등 수많은 해외 유명인들이 서명하게 만들었다. 그 후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결국 1980년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불귀’, ‘고행’ 등의 시집도 출간되게 된다.

시인 김지하의 재능이 나를 움직였습니다

 김지하 시인 추모 문화제 ‘타는 목마름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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