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학기행③]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을 찾아서3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7.15 11:34
  • 수정 2022.07.1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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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을 찾아서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 ‘검은 강’, 박인환

(‘박인환 선시집’. 촬영=윤재훈)
(박인환 선시집)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세월이 가면’에 대한 명동의 일화에 대해서 박인환 시인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는 말이죠, 영감이 떠오르면 후닥닥, 금방 쓰잖아요.
굳이 퇴고를 안 하죠. 마치 신이 내린 것처럼 씁니다.
그런데 작곡은 달라요. 시어에 맞춰 작곡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 시에 즉흥적으로 곡을 붙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가면〉의 악보를 본 일이 있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됐나요?
세종로 집으로 아버지와 이진섭 선생이 왁자지껄하게 오셨는데,
그날 8절지 도화지에 〈세월이 가면〉이 적혀 있었는데 좀 특이했어요.
콩나물 대가리 같은 음표는 없고, 아라비아 숫자가 잔뜩 있었거든요.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음표더라고요.
예를 들어 ‘도·미·솔’ 하면 ‘1·3·5’라는 식으로….
아버지는 목소리가 좋으셨어요.

〈세월이 가면〉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불렀으리라 추정해요.
왜냐? 제가 어렸을 때 사랑채에서 두 분이 함께 불렀던 샹송이 아직도 생생하니까요.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라모나’라고 하는 노래였어요.

아들은 샹송의 리듬을 콧노래로 부른다.

요절 시인의 시가 지금도 회자하고,
학생들의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느냐

는 말에 아들은 말을 잇는다.

“아버지가 명동을 활보할 당시 다 어렵고 참혹하던 시절이었고, 아버지는 불행하게 가셔야 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결국 아버지는 불행한 시인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지금도 좋아하고, 그 감정을 행간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박인환이 걷던 길. 촬영=윤재훈)
(박인환이 걷던 길. 촬영=윤재훈 기자)

청계천 옆 도로를 따라 걷는다. 뙤약볕 아래 하얗게 포장된 콘크리트 천변이 햇살에 반사되어 더욱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바람 한 점 없다. 온 도시의 빌딩 벽에서 쏟아져 나온 열기와 유리에서 반사되어 나온 열기들로 도시가 뜨겁다.

그나마 이 조그만 천변에서 물이라도 볼 수 있으니,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잠깐 천변으로 내려가 저 여린 물소리라도 들으면서 걸으면 그나마 더 나을 것도 같다.

박인환 시인은 1946년 〈거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는데, 맹문제 교수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시인은 우연한 기회로 1947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미국을 시찰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돌아와 조선일보에 쓴 시가 신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며, 상당한 문명을 얻게 된다.

2년여 서점을 운영한 시인은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김병욱 등과 ‘신시론’ 동인에 참여하여 5인 합동 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고, 1951년에는 김경린, 김규동, 이봉래, 조향, 김차영 등과 '후반기' 동인을 발족시키며,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을 받았다.

(교보문고 뒤, 처갓집 시절. 촬영=윤재훈)
(교보문고 뒤, 처갓집 시절. 촬영=윤재훈 기자)

세종로 135번지, 교보생명 광화문 본사 사옥 뒤쪽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한쪽에는 옛 성벽을 행인들이 볼 수 있게 발굴해 두었다. 콘크리트 빌딩만 즐비한 서울 한복판은 어디를 가나 쏟아지는 뙤약볕을 피할 데가 없다.

이곳은 시인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시인은 생활이 어려워져자 이곳으로 옮겼을까, “화장실과 처갓집은 멀리 있을수록 좋다고 했는데.” 아들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제 외조부는 일제시대 은행지점장을 하셨고, 창덕궁 이왕직(李王職)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분이셨어요.

이왕직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다. 한일병탄(韓日竝呑) 이후 이왕직은 대한제국 황실이 아닌 일본의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됐다. 시인의 장인은 고종의 재산과 재정 운영을 맡았던 것이다.

여기에 그때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는데 다른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귀하게만 자라서였는지 생활력이 없고 비현실적이었다고 한다.

어깨 폭이 좁아 어머니처럼 한복을 잘 입은 이를 본 적이 없어요.
키가 170cm로 늘씬했고 진명여고에 다닐 때는 농구선수셨는데, 포지션은 포드였어요.
마나 날렵하셨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한복을 차려입으셨다면 날아가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또 어머니만큼 얼굴 화장이 아름다운 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어요.
그런 분이 서른에 청상이 되어 평생을 홀로 사셨어요.

(시 낭송. 촬영=윤재훈)
(박인환 시 낭송. 촬영=윤재훈 기자)

이제 우리는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마리서사’로 갈 차례이다. 단 2년을 살았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던 곳, 세월이 가면을 쓰고 즉석 작시해서 부른 장소였으며, 김수영 시인의 말에 의하면 그가 가장 활달하게 살았던 곳,

가는 길에 주한 미국대사관 옆에 있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계단에 앉아 맹문제 교수에게 못다 들은 시인에 대한 일화를 듣는다. 그의 제안에 따라 누군가 박인환의 시를 낭송하고 책을 선물 받는다.

(송해 공덕비. 촬영=윤재훈)
(송해 공덕비. 촬영=윤재훈 기자)

“휴, 덥다, 더워.”

뙤약볕을 맞으며 종로 거리를 한참 돌아 낙원동으로 간다. 가는 길에 ‘송해 거리’를 지난다. 오랜 세월, 일요일 정오가 되면 “딩동댕, 전국 노래자랑” 하고 외치면서, 우리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셨던 분, 그가 돌아가셨다고 그의 작은 인물석 옆에 화환이 즐비하다. 빙둘러 사람들이 모여있고 하나, 둘, 향불을 올리며 조문을 한다. 잠시 서서 그분을 추억하고 바삐 일행을 따라간다.

(“휴 덥다.” 촬영=윤재훈 기자)

낙원동 초입, 마리서사가 있었던 자리, 서울 보정기라는 빨간 간판판,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뙤약볕을 마다 하지하고 왔고 한참을 걸어왔지만, 어디 박인환 시인을 추억할만한 흔적 한 점도 없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에 있는 그의 시 한 편을 입 안에 굴리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最後)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驛前)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合唱)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者)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疲弊)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爆音)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生)과 사(死)의 경지로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 ‘검은 강’, 박인환

(처음 서울로 이사 와 살던 집터. 촬영=윤재훈)
(박인환 시인 서울로 이사 와 살던 집터. 촬영=윤재훈)

이제 시인이 인제에서 서울로 이사 와 처음 살았다는 ‘원서동 집터’를 찾아간다. 정오가 지나가자 등짝을 때리는 뙤약볕의 위세는 더욱 강해진다. 북촌로를 따라 20여 분을 걸어가니,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즐비하고 별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데, 젊은이들로 붐빈다.

자그마한 식당들 앞에 줄을 서 있는 젊은이들도 보인다. 참, 낯설은 풍경이다. 우리 세대는 줄을 서면서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만큼 음식들이 대동소이 했으며 ‘시장끼가 훌륭한 찬이었다.’ 그런데 요즘 청춘들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놀이인 것 같다.

원서동 집터 골목으로 돌아드니 햇볕이 쨍, 하고 달려든다. 골목 안도 마땅하니 햇볕 피할 때가 없다. 이제 3시간가량 걸었을 뿐인데 땀이 후줄근하다. 이곳에 얽힌 맹문제 교수의 설명에 집중이 잘 안된다. 겨울과 바바리를 유난히 좋아했던 시인, 그는 여름을 싫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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