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 유럽관: '파리만국박람회' 1900년, 화려하게 문을 연 20세기 전야제
[20세기 스토리박물관1] 유럽관: '파리만국박람회' 1900년, 화려하게 문을 연 20세기 전야제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7.22 17: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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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스토리박물관]
'파리만국박람회' 1900년, 화려하게 문을 연 20세기 전야제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1900년 파리의 알렉산더 대광장 전경. 사진=파리시청 홈페이지)

1900년 4월14일 파리만국박람회 열려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봄바람에 꽃잎들이 흩날리는 샹젤리제 거리는 유난히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앞으로 7개월 동안 이어질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가 개막하는 날이다. 시민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호기심의 표정이 역력하다. 프랑스의 전국 각지에서, 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세기적 이벤트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러 날에 걸쳐 기차나 마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주변도시로부터 자전거나 도보로 찾아드는 사람들도 많다.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터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지만, 난생 처음 파리에 찾아온 사람이라도 결코 길을 몰라 헤맬 일은 없었다.

(파리 만국박람회장 에펠탑. 사진=에펠탑 홈페이지)

‘에펠탑’ 무빙워크 시속 8km로 운영

평평한 도시 위로 당당하게 솟은 첨탑 하나가 수십km 밖에서도 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시민혁명 1백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보다 높은 인공 구조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높이가 3백 미터나 된다. 탑 주변에는 사람을 태운 열기구가 떠 있었다. 타워는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으며, 설사 밤이 되더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깜박이는 전등불빛들을 아래층부터 높은 곳까지 밝히고 있었다. 미국의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것은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프랑스 시민혁명 1백주년(1889)과 파리 만국박람회(1900)를 위해 1889년 파리 센 강변에 세워진 높이 330미터의 에펠탑 공사과정. 공사기간은 3년이 걸렸으며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사진=에펠탑 홈페이지)

에펠탑이 가까워졌을 때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바로 밑에서는 고개를 한껏 젖히고도 꼭대기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높이가 아스라했다. 다행히도 탑에는 사람이 타고 오르내릴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전시장 내부에는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무빙워크가 시속 8km나 되는 속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전기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기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이미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을 생활용품에 적용하는 기술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전기의 힘을 이용하는 새로운 생활용품들이 20세기의 블루오션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갖 기계에 이것을 적용하려는 발명경쟁이 치열했다.

전기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 같았다.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가 1870년대와 80년대에 전신기와 전등, 축음기, 발전기와 모터 등 발명품을 무수히 쏟아낸 것에 못지않게 유럽에서도 전기 응용에 매달리는 과학자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199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포르쉐 전기자동차. 사진=포르쉐 제공))

전기자동차, 가솔린 자동차보다 5년이나 빨리 나왔다?

파리에서는 막 등장한 가솔린 자동차들 사이로 전기자동차들도 적지 않게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사실 최초의 전기자동차는 본격적인 가솔린 자동차보다 5년이나 빠른 1881년에 이미 선을 보였다. 축전지나 모터의 성능이 초보적인 것이어서 21세기의 눈으로 보자면 전기자전거나 전동카트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고, 경쟁상대인 가솔린 자동차들도 빠르게 달리는 마차보다 속도가 빠르지 못했다.

하지만 장래(20세기)에 어떤 모습의 자동차들이 세계를 누비고 다닐지 상상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최소한 도심에서 말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만으로도 자동차들이 결국 마차를 대신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증기기관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도시들로부터 관람객을 싣고 와 새로 지은 오르세 역사에 내려놓았다. 유럽 남부나 다른 대륙으로부터 배를 타고 건너온 사람들도 기차를 이용해 파리로 들어왔다.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동양인들을 그들 나라의 전통의상과 함께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것도 관객들에게는 흥밋거리였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꼬레(Corée)라는 나라도 이 박람회에 전시관을 지어 참가하고 있었다.

(아르누보 양식의 파리 지하철 장식. 1900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가 만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7월 19일, 파리의 첫 지하철 개통

박람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단과 프랑스의 주요 정치인 문화계 인사들이 콩코르드 광장에 모여들었다.

파리의 첫 지하철이 개통된 날이다. 20만평에 이르는 박람회장에서 일부는 개막 이후까지도 공사가 끝나지 않고 있었는데, 박람회장으로 연결되는 지하철이 이날 비로소 개통된 것이다. 역으로 내려가는 중앙계단의 입구는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철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사진)

지금도 파리 메트로의 상징처럼 남아있는 이 장식은 당대의 유명 건축가 엑토르 기마르가 만국박람회의 이상을 기리기 위하여 특별히 제작한 예술작품이다. 주 전시관인 그랑 팔레(Grand Palais) 역시 화려하고 섬세한 꽃과 덩굴 모양의 아르누보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디자인은 건물의 형태 창틀의 모양은 물론 가구와 유리제품 각종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반영되었는데, 이것은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합심하여 박람회 준비에 공을 들였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박람회를 8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국제박람회가 유럽이나 미국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에게 이 기회는 특히 각별했다. 1789년 시민혁명 이후 거진 1백 년 동안 프랑스는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대외적인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그 중심에 나폴레옹 1세와 3세가 있었고, 프랑스인들은 이들 ‘황제’의 지휘에 따라 유럽 황제들의 연합군과 연거푸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나폴레옹 3세의 탐욕이 빚은 1870년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에서 완패한 뒤에야 프랑스는 비로소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이것은 분명 파멸적 상황이지만, 반면, 1백 년 전 프랑스시민혁명이 천명했던 민주공화정, 만인평등 국가의 진정한 출범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1900년 만국박람회를 20세기의 새로운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래형 문명국가의 출범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

사진2.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대한제국 전시관 모습을 소개한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 기사.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1월 12일. 5천1백만 명 박람회 다녀가

11월 12일까지 일곱 달 동안 이어진 이 박람회에는 당시 프랑스 인구 4천만명보다 많은 5천1백만 명이 다녀갔다.

거대한 바퀴 형태의 대관람차, 러시아의 마트료시카 인형, 디젤엔진, 유성영화, 에스컬레이터, 움직이는 도로(무빙워크), 텔레그라폰(최초의 자석식 녹음기) 등이 이 박람회에서 인기를 끈 품목들이다. 주전시장이었던 그랑 팔레와 쁘띠 팔레, 박람회를 축하하기 위해 러시아가 센강에 놓아준 ‘알렉산드르3세 대교’, 행사장 공사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위해 세운 ‘노동의 성모교회’, 기차역으로 지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이 된 ‘오르세 박물관’ 등이 지금까지도 파리의 상징처럼 이용되고 있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전기 기술, 유럽 과학자들에 의한 무선통신과 전자파 이용 기술, 자동차의 등장, 퀴리 부부 등이 발명한 방사선 기술… 아, 이 시기를 상징할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더 있다. 루이 카르티에 형제는 마침내 사진 필름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고 그것을 대중 앞에서 상영했으며, 유성영화도 뒤따라 개발되었다. 미국에서 라이트 형제가 마침내 동력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기 시작한 것은 3년 뒤의 일인데, 이미 유럽에서도 여러 기술자들이 4백년 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궁리했던 헬리콥터를 실현시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은 금세기에 이미 다 나왔다.
다음 세기가 오더라도 더 이상 새로운 과학기술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20세기에는 기존에 나온 발명과 이론들을 더 발전시키는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으리라는 자부심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새로운 세기에 과학자들에게 무엇보다 격려가 된 것은 아마 노벨상일 것이다. 20세기에 산업현장과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이용된 다이너마이트의 개발자, 알프레드 노벨은 1896년 사망 직전 전 재산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면서 인류에게 기여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상을 만들도록 부탁했다. 초기의 다섯 개 부문 중 세 부문이 과학 부문이다.

1900년 만국박람회와 함께 파리에서는 두 번째 근대올림픽 경기도 열렸다. 박람회의 부속행사로 치러지는 정도였지만, 이후 세계의 평화제전으로 승화되는 데 중요한 연결점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38세이던 쿠베르탱 남작의 공로를 또한 기억해야 한다.

20세기를 맞는 당대인들의 감정에는 뚜렷한 자신감과 함께 미묘한 불안감이 맴돌고 있었다. 당시를 ‘세기말’로 인식하는 예술가들도 있었다.

유명한 로댕과 톨스토이는 그들 생애의 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마네, 모네, 세잔, 르누아르, 폴 고갱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파리에서 노년의 절정을 보내고 있었고, 영국에는 ‘셜록홈즈 연작’의 대히트로 절정에 오른 안과의사 코난 도일 경이 41번째 생일을 맞고 있었다. 아직 젊은 나이로 20세기를 맞는 파블로 피카소, 구스타프 클림트, 앙리 마티스와 바실리 간딘스키,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헤르만 헤세, 유진 오닐, 아인슈타인, 루이 카르띠에, 코코 샤넬, 카프카, 아폴리네르, 가스통 바슐라르, 장 콕토 등의 내면에서는 또 다른 20세기가 숙성되고 있었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나 뭇솔리니 같은 괴물들도 동시대에 자라나고 있었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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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훈 2022-07-23 22:34:01
지하철의 역사가 이렇게 빠르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