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론...냉면에 얽힌 11가지 스토리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8.01 13:16
  • 수정 2022.08.0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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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김치저장고)로 가고
마을을 구소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중략)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국수'.  백석 시인 

(비빔냉면과 물냉면. 촬영=고석배기자)<br>
(비빔냉면과 물냉면. 촬영=고석배기자)

#1. 외롭고 그리우면 냉면을 찾는다

육수를 들이켜며 그리움을 마신다. 
시원한 육수에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면발을 넘기며 기억을 지운다.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외롭지 않다가도 배가 고프면 갑자기 외로워진다. 1인 가족 시대에 해 먹는 것보다 사 먹는 게 더 싸다. 그렇다고 줄 서서 기다리는 전문 맛집은 가지 않는다. 집밥이 그리워도 백반집은 더욱이 가지 않는다. 어쩌다 여행을 떠나면 폭식한다. 2인 이상 메뉴라고 벌교 가서 꼬막을, 영덕 가서 게장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있지도 않았던 애인이 그리워진다. 끼니때마다 외롭고 그리운 혼밥의 시대다.

분식집은 혼자 가도 눈치 보이지 않아 좋다. 김밥으로 혼밥도 하고 라면과 쫄면으로 혼면도 한다. 여름이면 계절 메뉴로 콩국수와 냉면도 있다. 분식집에서 콩국수는 먹어도 냉면은 망설여진다. 줄 서서 기다릴지라도 냉면만은 ’면옥‘이 붙은 전문식당을 찾아간다. ‘면옥’이 붙은 집은 사시사철 면만 파는 식당이다. 혼자 찾아가도 눈총 주지 않는다. 냉면은 1인 가족의 어깨를 당당히 펴게 하는 최고의 음식이다. 혼면의 시대다.

#2. 냉면은 K-푸드다

냉면은 말 그대로 차가운 국수다. 세계적으로 냉면처럼 노골적으로 차가운 국수는 없다. 국수요리가 발달한 중국에도 랑멘(凉麵)이라는 요리는 있지만 단지 뜨겁지 않은 요리다. 유럽의 이탈리아에도 샐러드 비슷한 파스타가 있을 뿐이다. 일본의 소바도 미지근한 쯔유에 국수를 말아 먹는 거지 냉면이라 하기엔 급이 떨어진다.

한국의 냉면에는 종류가 많다. 주로 지역으로 분류하여 평양냉면, 함흥냉면, 진주냉면, 해주냉면 등으로 나누고 단순히 물냉면과 비빔냉면으로도 나눈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평양냉면을 냉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메밀 때문이다. 한국은 토양 상 밀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척박한 땅에서도 쑥쑥 잘 자라는 메밀이 밀을 대체했다. 그리고 메밀의 주산지는 우리 민족의 기원설이 있는 바이칼호와 만주, 아무르강변 등에 걸친 지역이다. 삼국시대부터 메밀요리를 먹었다고도 하고 제주가 몽골의 속국이던 시절에 메밀이 들어와 쌀이 부족한 제주의 구황작물이 되었다고도 한다.

제주만큼 쌀이 부족한 지역이 평안도 지방이었다. 굶지 않기 위해 강원도와 더불어 메밀 농사를 많이 지었다. 양식이 떨어지는 겨울이면 메밀로 만든 음식이 일상이었고 그 중 메밀국수가 으뜸이었다. 더군다나 평안도 무로 만든 동치미는 국수 말기에 딱이었다. 1930년대 평양 거리의 냉면집은 80군데나 되었고 당시 서울은 40군데였다. 양적 수요가 많으면 질적 깊이도 달라진다. 당시 최고의 냉면은 자타공인 평양냉면이었다. 6·25 이후에야 남한에 냉면이 생겼다는 말도 잘못 알려진 상식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남한에 냉면을 대중화한 사람들은 이북 피난민이었기 때문이다.

(우래옥 냉면. 촬영=고석배기자)

#3. 냉면은 제사와 잔치 음식이었다

‘고려사’에 “제례에는 면을 쓰고 사원에서 면을 만들어 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은 최소 고려시대부터 면요리를 먹었다. 특히 ‘고려도경’에는 “나라에 밀 산출이 적어 송나라에서 사오며 값이 비사서 잔치에만 쓴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상시 민중들이 먹었던 면요리는 메밀면이라 추정된다. 재밌는 것은 지금 잔치국수라고 명명되는 저렴한 밀국수가 당시에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 제례에 면을 쓴다는 점도 주목된다. 멥쌀의 벼를 ‘메벼’라고 하는데 여기서 ‘메’에는 ‘산’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산신의 음식’이라는 의미도 있다. 산신이나 조상신에게 올리는 밥을 아직도 ‘메’라고 한다. 국수를 제상에 올렸다고 하니 메밀의 ‘메’ 역시 ‘산신의 밥’이라는 의미의 ‘메’가 아닐까 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한식(寒食)날 제사에는 찬 음식으로만 제를 지낸다.

(의정부 평얀냉면. 촬영=고석배기자)

#4. 여름냉면과 겨울냉면은 계급이 달랐다

냉면의 최초 기록을 살펴보면 ‘냉면’의 면은 메밀이 아니라 녹두다. 1600년대 초 장유의 ‘계곡집’에 ‘자장냉면(紫漿冷麪)’이라는 시가 있다. 시에는 "육수는 자줏빛이라 하고 면 색깔은 투명하다"고 쓰여졌다. 이것으로 보아 육수는 오미자 국물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냉면 육수에는 오미자 국물을 비롯해 콩물, 깨물, 꿀물, 동치미 국물 등이 있었다.

요즘 냉면과 비슷한 동치미 국물에 메밀면을 말아 나온 국수는 ‘동국세시기’에 비로소 나타난다.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메밀국수를 말고 여기에 돼지고기를 섞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 홍석모, 동국세시기(1849)

1917년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에는 여름냉면과 겨울냉면이 제조법이 다르다. 여름냉면도 두 가지로 나누는데 ‘가게에서 파는 냉면’은 고깃국이나 닭국을 식힌 후 금방 내린 국수를 말고 한가운데 얼음과 수육을 비롯한 고명을 올렸다. ‘집에서 하는 냉면’은 콩국이나 깻국이나 장국에다가 오이를 채 쳐서 고명과 함께 올리고 잣을 뿌려 만들었다. 100년 전만 해도 현대의 ‘콩국수’가 냉면으로 분류됐음을 알 수 있다.

겨울냉면은 지금의 동치미 국물 냉면이다. 특히 겨울냉면의 여러 가지 고명을 언급하면서도 “냉면에 김치 무와 배와 제육 그리고 고춧가루 이 네 가지를 넣는 것 외에는 더 맛 나는 게 없다”는 내용이 돋보인다. 여름냉면에 얼음이 언급된 것을 보아 1910년 부산에 처음 생긴 제빙공장이 1917년경에는 이미 냉면 가게에서는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무인 할인 판매점까지 생겨 겨울에도 아이스크림을 즐긴다. 냉면을 한겨울에 먹었다는 것은 오히려 MZ세대가 더 쉽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냉장고와 인공 얼음을 만드는 제빙공장이 없던 시절에 여름냉면은 아무나 만들어 먹을 수 없었다. 동빙고와 서빙고는 왕실 소유였다. 여름냉면과 겨울냉면에는 계급 차이가 있었다. 여름에 먹는 건 양반이나 왕실의 ‘냉면’이었고 겨울에 먹는 건 민중들의 동치미 ‘국수’였다. 지금도 평양에는 냉면을 냉면이라 하지 않고 국수라 부른다.

(흥남집 회냉면. 촬영=고석배기자)

#5. 냉면은 야식 '배달음식'이었다 

1926년 1월 6일 자 동아일보에 냉면 배달 관련 기사가 실렸다.

평양의 냉면집 자전거 배달부 16명이 동맹 파업을 벌인다. 일급 60전을 1원으로 올려달라는 요구다.

- 동아일보, 1926년 기사

1월 6일이면 엄동설한이다. 요즘도 겨울에는 배달기사가 인력난이다. 춥고 위험해 전직하거나 봄이 올 때까지 쉰다. 1920년대에는 한겨울이 배달 대목이었다. 배달기사가 파업하면 평양시민의 원성이 자자해 평양경찰서장이 중재에 나서야 했다. 평양에서 냉면 한 그릇 가격이 15전이었으니 냉면 네 그릇 값이 시급이었다.

한겨울에 무거운 목판을 한 손에 이고 놋그릇 냉면 10여 그릇을 배달하려면 힘도 세야했고 운전기술도 곡예 수준이어야 했다. 원래 냉면은 세숫대야 정도로 큰 놋그릇이었는데 배달을 많이 하기 위해 지금의 작은 그릇으로 바뀌었다는 말도 있다.

냉면 배달 주문은 주로 저녁부터 새벽 2시까지가 많았다. 1930년대 평양에선 냉면 한 그릇 먹지 않고는 잠을 못 잤다고 한다. 요즘 밥 먹고 치킨을 먹듯이 그때도 저녁을 먹고 출출할 즘에는 냉면을 배달해 먹었다. 특히 술 한잔 곁들인 저녁에는 어김없었다. 평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선주후면’이라는 말이 있었다.

(냉면배달부. 사진=국가기록원 ) 

#6. 냉면은 숙취 해소 ‘컨디션’이다

선주후면은 ‘술을 마신 뒤 냉면을 먹는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숙취는 술꾼을 괴롭히는 가장 큰 적이었나보다. 더군다나 한국인이 즐기는 막걸리나 동동주는 양조주라 증류주에 비해 숙취가 심하다. 숙취는 심해지기 전보다 술 마시고 바로 해소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래서 술 마신 뒤 밥이나 면을 먹는 게 좋다. 술 마신 뒤 냉면은 숙취 해소용으로 딱 맞았다. 과학적으로도 냉면 육수에 들어가 있는 아르기닌은 콩나물이나 황태 못지않게 풍부하다. 물론 육수가 없는 비빔냉면은 효과가 없다. 제대로 우려낸 육수에는 아미노산이 풍부하고 아미노산 속 아르기닌은 에탄올을 분해한다.

그러고 보니 고기집 후식 메뉴에는 냉면이 꼭 있다. 고기를 먹으면서 술 한 잔 안 할 수 없고 술 한잔하면 냉면을 찾았으리라. 1946년 개업한 우래옥은 처음부터 불고기를 팔았다. 봉피양, 배꼽집은 물론 벽제갈비와 삼도갈비는 평양냉면집인지 고깃집인지 헷갈린다.

평양에서 선주후면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연유는 평양기생도 한몫한다. 평양은 기방문화가 발달했고 여염집에선 쉽게 먹을 수 없는 고기와 술문화가 발달했다. 그리고 당시 재래 한우는 지방마다 품종이 달랐는데 평양소의 고기맛이 일품이었다. 평양소를 사기 위해 전국의 소장사들이 평양우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평양우시장은 동치미 국물에서 고기 육수로 바뀌는 환경을 제공했다.

(평양우시장. 사진=국가기록원)

#7. 육수는 ‘에피타이저’다

그런데 평양냉면 본 메뉴에 앞서 나오는 육수는 육수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메밀면을 삶을 때 나온 면수다. 메밀은 성인병에 좋다는 루틴 함량이 높다. 루틴은 수용성이기에 삶은 물에 용해되어 나온다. 오랜 음식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가끔 평양냉면집에서 밍밍한 면수가 나오면 육수를 달라고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오해할만하다. 함흥냉면집에서는 면수가 아닌 뜨거운 육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함흥냉면은 메밀면으로 만들지 않기에 면수가 없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은 지용성이다. 매운 음식을 먹기 전에 육수로 입안을 코팅하라는 지혜다. 면수나 육수가 나오는 집은 직접 면을 뽑거나 육수를 만드는 집이다. 면수가 나오는 가게에서는 물냉면을 먹고 육수가 나오는 집에 가서는 비빔냉면을 먹으면 된다.

(메밀 면수. 촬영=고석배기자)

#8. 냉면의 어머니는 김치다

한국인은 국수를 좋아한다. 우동과 라면의 나라 일본인이 1909년 쓴 ‘조선만화’에는 “조선의 음식점 어느 곳을 보아도 국수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국수를 좋아하는 국민으로 보인다”고 쓰여있다. 1890년 쯤부터 서울이나 평양 사람에게는 이미 국수를 돈으로 사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생겨났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국수틀이 귀해 먹고 싶어도 먹기가 힘들었다. 국수보다는 맹물에 장을 풀어 넣은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 국수는 잔칫날이나 되어야 먹을 수 있었다. “국수 언제 먹여주냐?”는 결혼식 잔치를 은유했다.

더운 여름에는 김치국물이 있었다. 지방마다 김치맛이 달랐다. 잔치국수는 참밀이 비교적 많이났던 남쪽지방에선 김치말이 국수가 되었고 메밀이 많이 났던 북쪽지방에선 동치미 메밀국수가 되었다. 처음을 따지면 동치미와 수제비가 먼저다. 배추와 고추는 아메리카가 발견되고 나서 조선 중기에 이민 온 식재료다. 이전의 김치는 무를 소금으로 간한 백김치였다.

(동치미. 촬영=고석배기자)

#9. 냉면은 공동체다

국수틀이 있다고 국수를 뽑을 수 없었다. 국수를 만들려면 메밀의 겉껍질을 벗겨야 했다. 이때 맷돌을 사용했다. 맷돌은 힘과 정성이 필요하지만, 맷돌이 껍질을 분쇄할 때는 열이 나지 않기에 메밀의 향과 맛이 살아났다. 전기와 기계를 쓰는 현대의 메밀국수와 향이 달랐다. 맷돌 한번에 말끔하게 벗겨지지 않아 대여섯번 번복하여 겉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고운 채로 쳐서 겉껍질과 메밀가루를 분류했다. 사실 막국수와 냉면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메밀가루를 얻는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메밀은 점성이 없어 반죽이 잘 안된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나마 시간이 절약 되지만, 찬물로 해야 제맛이 난다. 한두 시간 온몸에 힘을 실어 주무르면 반죽이 완성된다.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가마솥 위에 국수틀을 올린다.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국수 가닥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장정 두세 명이 붙어 눌러야 한 올 한 올 메밀국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냉면을 먹기 위해서는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야 했다. 아이들은 꿩사냥을 하고 남자들은 메밀가루를 빻아 면을 뽑고, 여자들은 육수를 만들면서 온 동네가 축제가 된다. 백석은 시에서 이 모습을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라고 표현했다. 잔치가 아니면 먹을 수 없었던 국수, 국수는 공동체 자체다.

(김준근 작. 국수내리는 모양. 연대미상) 

#10. 냉면은 그리움이다

그리고 냉면은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였다. 이북 실향민이 많이 살았던 오장동과 을지로에 냉면집이 번성한 이유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혼자서 고생하다 쉬는 날이면 냉면집에 와서 고향 사람을 만나고 고향 소식을 들었다. 오늘날 이주노동자들이 안산으로, 가리봉으로, 동대문으로 모여 고향 음식을 먹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초가을이다. 메밀꽃은 가을 달빛 아래 파도가 일었을 때 부서지는 하얀 포말과 같다. 장돌벵이 허생원은 젊은 장돌뱅이와 달밤에 메밀꽃 흐드러진 산길을 걷는다. 소설 속에서 평생을 외롭게 떠도는 허생원의 인생이 달 밝은 밤 하얗게 메밀꽃 피어난 산길을 걸을 때면 고통스럽기 보다 낭만적으로 채색된다. 고통의 인생 여정에서 단 한 번뿐이었던 사랑의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허생원, 그의 삶을 견디게 한 것은 그리움이었다.

인간의 삶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한가지 씩 갖고 산다. 그리움이 동력이 되어 산다.

(시장통 국수집.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11. 냉면은 다시 시작이다

1인 가족 시대가 늘어나고 있다. 결혼 적령기는 점점 높아가고, 굳이 결혼을 인생의 절대 명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혼율도 높아간다. 디지털 시대에 굳이 만나지 않고 카톡이나 줌으로 대화한다. 코로나는 술도 줌으로 마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혼자가 더 편한 시대다. 더운 여름날 혼자서 밥을 해먹기 귀찮아 집을 나선다. 인스턴트 냉면도 있고, 밀키트 냉면도 있지만 굳이 냉면집에 줄을 선다. 냉면을 기다리는 동안 본능의 세포가 살아난다. 

그립다. 옛사람들이 냉면 가닥처럼 떠오른다. 살아가면서 전화번호는 늘어나고 전화 걸 곳은 줄어든다. 육수를 들이켜며 그리움을 마신다. 시원한 육수에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면발을 넘기며 기억을 지운다. 면발 하나하나에 사람의 이름이 묻어있다. 함께 했던 기억은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다. 디지털을 버리고 아날로그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문명을 버리고 원시공동체로 돌아 갈 수는 없다. 고향을 가슴에 품고 떠난 실향민처럼, 월요일 새벽부터 일터를 나가야 하는 이주민 처럼, 냉면 한 사발 시원하게 비우고 다시 혼자만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돌아와 우리는 다시 접속 한다. 함께하지 않아도 세상은 연결 되어 있다. 따로 있어도 같이 한다. 1인 독립군 협력의 시대다. '원시 공동체'는 구심으로 살을 맞댄 공동체였지만 '미래 공동체'는 원심으로 개인을 거리를 존중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의 동물이다. 과거는 아무리 그리워해도 돌아갈 수 없다. 집착하면 꼰대가 된다. 냉면 한 그릇으로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미래 공동체에 적응해야 한다. 아니 미래세대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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