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3] 스포츠관: 쿠베르탱의 올림픽정신2...1924년 vs 2024년 파리올림픽 스토리
[20세기 스토리박물관3] 스포츠관: 쿠베르탱의 올림픽정신2...1924년 vs 2024년 파리올림픽 스토리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8.02 14: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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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 쿠베르탱과 올림픽정신2
               1924년 vs 2024년 파리올림픽 스토리

 2024년 파리올림픽

1924년 파리올림픽...쿠베르탱의 명예회복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파리에서 죽을 쑤는 바람에 올림픽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잠시 시들해졌던 것 같다. 대회 이듬해인 1901년 쿠베르탱 위원장은 미국의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몇 통의 편지를 보냈다. 아첨에 가까울 정도의 겸손을 담아 1904년으로 예정된 세 번째 올림픽 대회가 무산되지 않도록 협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를 염두에 두었지만, 여러 차례의 조정 끝에 결국 그 해에 국제박람회를 계획하고 있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 수 있었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지리적 한계로 유럽 선수들이 대거 참석을 포기하여 12개국 651명의 선수들만 참가한 가운데 비교적 조촐한 대회가 열렸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서 치러진 줄다리기 경기 모습.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3회 올림픽 '줄다리기 경기'

박람회의 부대행사라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개회선언을 박람회조직위원장에게 맡기긴 했지만, 쿠베르탱은 1900년의 실패를 교훈삼아 최대한 박람회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세심히 일정을 조정하여 대회를 진행했다. 지금은 그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런던 스톡홀름 안트베르 등으로 대회는 이어졌다. 1924년 파리에서 올림픽이 다시 한 번 열렸다. 그 해에 쿠베르탱은 61세가 되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의 모든 실무에서 물러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올림픽 사업에서 물러나기 전 자신이 구상했던 모든 꿈과 이상을 담아 올림픽다운 올림픽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당초 1924년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열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지만, 쿠베르탱의 요청은 어렵지 않게 양보를 얻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는 24년 전 두 번째 대회에서 그가 겪은 거의 치욕에 가까운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소망과 노력이 반영됐다.

파리올림픽이 남긴 것들...첫 방송중계·동계올림픽·선수촌 제도 시작

1924년 파리올림픽 마라톤 모습

파리 교외에 올림픽을 위하여 대규모 스타디움(4만6천명 규모)이 새로 건설되었고, 경기장 가까이에 외국 선수들이 체류할 단체 숙소가 처음 마련됐다. 이 경기장 스타드올랭피크 드 콜롱보는 이후 FIFA월드컵에도 사용되었고, 이 숙소는 이후 모든 대회에 도입된 선수촌 제도의 시작이었다.

올림픽 본 대회를 ‘하계대회’로 규정하고 겨울에 열리는 별도의 ‘동계올림픽’을 신설하여 같은 해에 몽블랑 지역의 샤모니에서 첫 대회를 개최했다.

44개국 3,089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였고, 육상 종목의 경기에는 매일 3천명 이상의 관객이 몰렸다. 첨단 과학장비들도 사용됐다. 1922년 미국에서 최초의 상업방송이 시작된 이래 영국 BBC, 프랑스와 독일의 국영 라디오 방송들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여 신매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을 때였다. 

올림픽의 경기상황과 결과는 그때그때 전화선을 타고 각국 방송국에 전달되고 다시 전파를 통해 지역 청취자들에게 전달됐다. 그때만 해도 스포츠인들이나 관심 갖던 올림픽이 '첨단기술'과 연계되어 세계인의 축제로 승화되었다. 장내의 스피커(확성기) 방송도 이 대회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경비행기의 축하비행이라든가, 열기구를 통한 지상통제 수단들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대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과 도시들이 올림픽 개최에 관심을 두고 올림픽 유치를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기업과 상인들, 명성을 얻고자 하는 문화예술인들의 관심도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1924년 대회가 끝난 뒤 쿠베르탱은 IOC의 명예 위원장으로 물러섰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한 평생을 세계평화를 위한 올림픽의 완성에 바쳤던 쿠베르탱은 이후 스위스 로잔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1937년 제네바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IOC가 있는 로잔에 안장되었으나 심장은 고대 올림피아 유적지의 올림픽 기념비에 따로 안치됐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쿠베르탱의 묘비

쿠베르탱의 구설과 시비

어떤 위인의 경우에도 예외가 없듯, 쿠베르탱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구설과 시비가 따른다. 예를 들면 남성우월주의나 인종차별주의자였다든지, 현대 자본주의·상업주의의 놀이터를 만들었을 뿐이라든지, 스포츠를 통해 세계평화를 구현하겠다는 그의 이상이 과연 그런 효과를 거두었느냐는 등의 시비들이다.

글쎄, 무언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당대의 상식이 가진 모든 모순들을 한꺼번에 바꾼 뒤에 그 업적을 이루지 않은 책임을 묻는다면 과연 우리에게는 본받을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있을까.

다만 그가 독일의 히틀러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이야기에는 약간 갸웃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연대로 보아 확신하건대’ 히틀러가 살인마로 변신하는 것까지 보지 못했다.

1896년 아테네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들

오히려 그가 세계평화에 대한 깊은 열망을 지닌 평화애호가며 휴머니스트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가 IOC를 이끌고 있던 1916년 베를린 올림픽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으로 인해 취소됐다. 이때 그는 53세였는데, 올림픽을 치르지 못하는 대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으로 달려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회고에 의하면 그는 올림픽이라는 스포츠 제전을 통해 전쟁이 억제되고 세계 평화가 신장되리라는 믿음에 심각한 한계를 느꼈음이 분명하다.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상에 ‘환멸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그는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순간적으로, 평화의 전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전선의 투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프랑스 육군성에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도록 입대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나이 때문에 거절당했다.
1936년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수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추천인이 히틀러였기 때문이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올림픽정신의 무력감과 한계를 느낀 그가 스스로 거절한 것일 지도 모른다.

2024년 백년만의 파리올림픽...남녀비율 5천250명 : 5천250명

2024년 파리올림픽 이벤트 참가자

앞으로 2년 뒤, 2024년 파리는 다시 올림픽을 주관한다. 1924년 대회로부터 1백년 만이다.

쿠베르탱이 1900년에 못 이룬 것을 1924년 대회에서 만회하였듯, 20세기 최고의 문화도시 파리는 1924년에 부족했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2024년 대회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말 많았던 성 평등 문제에 남녀 선수를 정확히 같은 수로(5천250명 대 5천250명) 맞추고 주요일정에 남자 경기보다는 여자 경기를 배치하는 일정조정 등으로 응답했다. 파리 올림픽의 마지막 경기는 여자마라톤 경기가 될 예정이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에 단 하나의 슬로건 단 하나의 엠블럼을 함께 사용하는데, 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차이조차 넘어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젊은 층의 참여를 넓히기 위해 스케이트보드 스포츠 클라이밍 등외에 이번에는 브레이크 댄스(B-boying)종목도 추가했다.

(2024 파리올림픽 슬로건 ‘게임스 와이드 오픈’(Games Wide Open). 사진=파리올림픽 홈페이지)

‘와이드 오픈’(Games Wide Open). 지난 25일 파리 올림픽조직위원회가 발표한 2024 대회의 슬로건이다. ‘완전히 개방된 대회’ ‘활짝 열린 경기’ 다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종류의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자는 의지가 엿보인다.

쿠베르탱 ‘올림픽 선언문 친필원고’의 정신

(쿠베르탱이 직접 쓴 올림픽 선언문이 소더비 경매에서 880만달러(약 102억원)에 낙찰됐다. 스포츠 관련 기념품의 낙찰가 중 사상최고치를 기록. 사진=소더비경매 홈페이지)

지난 2019년에는 쿠베르탱이 1892년 올림픽경기의 부활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올림픽 선언문 친필원고가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880만 유로에 낙찰됐다. 우리 돈으로 1백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는 소더비의 예상을 거의 10배로 뛰어넘는 금액이었는데, 그 후의 이야기가 더 놀랍다.

엄청난 금액으로 올림픽 선언문 원고를 사들인 사람이 이 원고를 들고 IOC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는 ‘이 유물은 마땅히 올림픽박물관에 있어야 한다’며 이를 IOC에 기증했다. 그는 잘 알려진 러시아의 철강재벌이며 스포츠맨(국제펜싱연맹의 회장)이기도 한 알리세르 우스마노프란 사람이다. 쿠베르탱 ‘올림픽 선언문 친필원고’에는 쿠베르탱이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경기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던 이유와 스포츠를 통해 세계 평화에 공헌하자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올림픽이 치러지는 동안에도 세계는 전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꾸준히 이어지는 올림픽을 통하여, 평화를 향한 인류의 공통된 열망과 이상은 반복적으로 격려를 받는다. 올림픽은 단순히 돈벌이에 목적을 둔 상업주의 자본주의나, 승리에 눈먼 선수들의 부정행위, 약물, 세 과시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정치가들의 야심 등으로 끊임없이 상처를 받았다. 그럼에도 본연의 목표, 인류의 화합과 문명, 평화주의 이상의 실현을 향한 올림픽 제전은 여전히 다수 인류의 호응 가운데 지속될 것이다.

큐레이터 & 도슨트 = 정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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