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니어] 보통시민 '허경무' 어릴 적 꿈 이루다...공무원에서 전기기사로
[스마트시니어] 보통시민 '허경무' 어릴 적 꿈 이루다...공무원에서 전기기사로
  • 고석배 기자
  • 승인 2022.08.04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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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상계동은 서울보통시였다. 말들이 뛰어다녔다는 마들평야에는 1980년대까지 벼농사를 지었고 인가는 없고 갈대만 무성했다는 노원은 돌로 골대를 만들어 축구하며 놀던 아이들의 공터였다. 상계동 한가운데에 ‘빡빡산’이라는 민둥산이 있었다. 빡빡산 꼭대기에는 당나무가 있었고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의 공알 같은 명당이어선지 무덤이 많았다.

(1980년대 노원역. 사진=노원구청 제공)

서울보통시 당고개 

상계3동 새마을에서 상계4동 달동네를 가려면 빡빡산과 불암산 사이의 당고개를 넘어야 했다. 바람 부는 날이면 당고개 옆 무당집 지붕마다 펄럭이는 오색깃발이 빡빡산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눈을 홀렸다. 당고개는 홍명희 ‘임꺽정전’에 내시의 아내였던 꺽정의 어머니가 도망치다 숨어 꺽정을 낳은 장소이다. 예부터 무당집이 많았던 그곳은 107번지다.

1960년대 서울 청계천을 철거하면서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이 성남과 상계동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상계동 107번지는 그때 만들어진 동네다. 6평짜리 집이 성냥갑 모양으로 바둑판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화장실은 공중화장실이었다. 청계천의 지게꾼, 날품팔이, 노가다꾼들이 주 단골이었던 청계천 색시들도 단골 따라 함께 이주했다. 107번지 입구에는 팻말이 하나 걸려있었다. ‘미성년자 출입금지’.

107번지 아이에서 구청공무원 30년만에 명예퇴직

허경무씨는 8살에 경기도 마석에서 상계동 107번지로 이사를 왔다. 1970년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왔다. 빌어먹어도 농사짓는 것보다 나았고 무엇보다 애들 공부를 위해서도 서울에 발을 디뎌야 했다. 미아리, 수유리는 이미 60년대부터 산마다 무허가 판잣집이 즐비해 막차 탄 이농민들은 상계동을 향했다. 구불구불 외길이었던 동일로는 맞은 편에서 차가 오면 기다려 비켜주고 시동을 다시 켜야 했다. 우스갯소리로 가다가다 지쳐 먼저 내린 사람이 하계동에 자리를 잡았고, 다음에 내린 사람이 중계동이고 끝까지 버티고 온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상계동이라 했다.

허경무 씨는 이 동네에서 50년을 살았다. 친구들도 모두 상계동 친구들이고 일터도 상계동이었다. 지금은 강북교육 특구가 되었지만, 당시 상계동은 중학교와 인문계 고등학교가 1개씩 밖에 없어 뺑뺑이 배정이 없었다. 최소 중학교까지는 다 동네 때복쟁이 친구였다. 그는 노원구청 공무원으로 1989년 3월에 임용되어 2018년 4월 퇴직할 때 까지 만 30년을 보냈다. 퇴직할 때 그의 나이 53살이었다. 5급 서기관을 막 달았지만 미련없이 그는 명퇴신청을 냈다.

(상계동 옛 골목. 사진=허경무 제공)

전기기사를 꿈꿨던 공무원

허경무 씨는 처음부터 공무원이 되고 싶어 공무원이 되지 않았다. 재수에 실패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꿈은 전자, 전기기사였다. 어릴 적 아버지가 두꺼비집을 내리면서 전기는 위험하니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할 때부터 전기에 대한 호기심이 유독 강했다. TV가 귀했던 시절 라디오를 만지다 혼도 많이 났다. 마음껏 전기 전자제품을 만지고 싶어 공고를 갔지만 막상 세상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분위기였다.

대입 준비를 하면서 9급 공무원 시험 공고를 우연히 봤다. 모의고사 보는 셈 치고 시험을 봤는데 한 번에 덜컥 붙었다. 당시는 9급 공무원이 박봉이라고 인기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대학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갈등하다 야간대학을 가기로 했다. 1989년 3월 대학 신입생이자 새내기 직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직장에서는 4시에 퇴근을 시켜주는 배려를 해주었다. 한 번에 학업과 일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기란 힘들었다. 그런데도 그가 공무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군대 3년을 묵묵히 기다려준 동갑내기 여인이 있었다.

(허경무. 촬영=고석배 기자)

1인 4역

이듬해 그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학생, 직장인, 남편, 아버지로 1인 4역을 해야 했다. 힘들 법도 한 시절 그는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스스로 낙천적이라기보다 긍정적이라는 그는 힘들었던 기억도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당시는 여자 나이 스물일곱이면 결혼 적령기였다. 동갑내기 애인과 결혼을 결심하고 상계시장 앞 단칸방을 육백만 원에 계약하려 했을 때이다.

결혼 축하를 위한 상계동 친구들의 술판이 벌어졌고 술에 만취한 그는 그날 밤 육백만 원짜리 수표를 분실했다. 이튿날 좁은 상계동 바닥에 소문이 자자했고 그 소문은 수표를 다시 돌아오게 했다. 상계동 친구들이 다 아는 큰 사건을 주인공이었던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 후로도 심장을 도려내는 상실의 아픔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인생의 슬픔보다 기쁨만을 기억하려 한다.

고령화사회, 평생교육을 준비하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되고 기뻤던 기억은 노원평생교육원을 완성한 날이다. 평소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하나도 많다’고 하다 갑자기 아이 낳기 운동을 하는 근시안적 행정이 맘에 들지 않았다. 행정은 너무 앞서도 안 되지만 반보 앞서 미래를 예측하고 실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각종 통계자료에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되는 현상을 보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마침 박원순 시장이 새로 서울시장이 되면서 고령화에 대한 관심을 피력했다.

노원 평생교육원은 그가 기획부터 건물 완공까지 추진하고 마무리한 사업이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평생교육은 단지 기술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에 나가 활용하는 데까지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바리스타 과정을 만들고 카페 창업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직접 평생교육원에 카페를 차렸다. 실제 창업하기 전 몇 개월을 직접 운영해 보는 공간을 만들었다. 인테리어부터 메뉴까지 직접 실습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경영도 자율에 맡겼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노원평생교육원 사랑방 카페. 촬영=고석배 기자)

공무원도 삼식이가 되더라

공무원 생활 중 그가 가장 오래 한 일은 보건소에서 요식업 인허가 업무였다. 하루에도 수없이 개업하고 폐업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한번은 자체 통계를 내보니 정확히 10개 중 1개만 성공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폐업하는 자영업자의 상당수가 은행원이었고 공직 생활자였다.

정년 65살이 보장됨에도 그가 조기 퇴직을 신청한 이유는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 가끔 친했던 선배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공통으로 듣는 얘기가 있었다.

처음 1년 동안은 아내가 너무 잘해주었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해 준 것이 고맙다고 이제 여생을 편히 보내자고 했다. 못 갔던 해외여행도 다니고 제주도에서 1달살이도 했다. 전국의 유명산이라는 산은 다 올랐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연금도 나오는데 1년이 지나니 눈치를 주더라. 어느새 말로만 듣던 삼식이가 되어 있었다. 어디 나가서 친구라도 만나고 취미생활이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경비라도 하려고 알아보았는데 그때야 알았다. 공무원 했던 사람은 경비로도 채용해주지 않는다고. 민간에서 행정의 경험은 고위공직자가 전관예우 받는 것 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더라.

조기 퇴직을 결심하다

50이 되면서부터 그는 고민했다.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공무원의 꽃이라는 동장도 해보고 승진해 어깨에 힘 좀 주다 60 넘어 정년퇴직하는 게 요란한 잔치 뒤에 적막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갈등도 했다. 다행히 동반자인 아내가 이해해주고 흔쾌히 응원했다.

3년을 준비하다 53살에 명퇴했다. 그가 명퇴신청을 하니 선후배들은 물론 가까운 동료들 조차 의아해했다. 응원보다 위로의 말을 더 많이 받았다. 그는 아무 말없이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말보다 결과로 보여주고 싶었다.

퇴직 준비를 하면서 그가 세운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경쟁이 심한 자영업을 하지 않겠다’였다. 두 번째는 ‘남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도전하자’였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요시한 세 번째는 ‘하고 싶고 재미있는 일을 하자’였다.

많은 사람이 귀농과 귀촌을 생각해요. 특히 퇴직 공무원들은 연금이라는 빽이 있어서인지 전원생활의 꿈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게 하고 싶은 일이었다면 좋은 거죠. 그런데 귀농으로 수익까지 생각한다면 절대 반대해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으면서 귀농으로 수익까지 연결하기란 자영업에 성공하는 것보다 확률이 더 낮다고 생각해요.

- 허경무

(교대시간 직장동료와 담소를 나누는 허경무.  촬영=고석배 기자)

젊은 날의 꿈을 이루다

그의 이모작은 전원생활보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릴 적 꿈이었던 전기기사의 꿈을 꾸었다. 퇴직을 준비하면서 옛 전공 서적을 틈틈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퇴직한 다음 날부터 동네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전기기사 1차 이론은 한 번에 붙을 수 있었다. 하지만 2차 실기는 쉽지 않았다. 학원에 다니기보다 유튜브 강의를 보고 준비했다. 젊은 친구들의 이해 수준 속도에 맞추는 학원 강의보다는 이해될 때까지 계속 돌려 볼 수 있는 유튜브 강의가 만학도에게는 더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그 어렵다는 전기기사를 1년 반 만에 합격했다.

전기기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곳은 많았다. 특히 아파트나 빌딩의 전기직은 젊은 층이 별로 선호하지 않아 50대 중년에게도 기회가 많았다. 처음 이모작 직장은 집에서 꽤 떨어진 하남의 빌딩이었다. 연고도 없었지만, 서류와 단독면접만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현장 실무를 익힐 기회였다. 그러다 집 가까운 119구조대에서 공채 공고가 났다.

공무원도 은퇴 준비를 해야 한다

1명을 뽑는데 면접장에만 10명 가까운 응시자가 보였다. 모두 자신보다 어린 젊은이들이었다. 면접관들 역시 자신보다 어렸다. 면접관 중 한 명이 왜 5급 공무원까지 하셨으면서 계약직 전기기사에 응모했냐 물어보았다. 허경무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면접관님들도 공무원이시니까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무원으로 정녕 퇴직하면 민간에서 퇴직 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자칫 놀기 무료해 사업한다고 뛰어들었다가 연금을 빚 갚는데 쓰는 경우가 허다하죠.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가 힘든 나이가 돼요. 그래서 저는 조금이라도 기회가 열려 있는 50대에 인생 이모작을 시작했습니다. 고령화사회라고 하지만 아직 60을 넘으면 사실 자격증이 있어도 이모작을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가 돼요.

- 허경무

젊고 스펙 좋은 응시자가 많아 기대하지 못했는데 최종 합격했다. 허경무 씨는 2021년 3월 이후 새로운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계약직이기에 엄밀히 공무원은 아니다. 직장 내에서 주로 상대하는 동료들이 소방공무원일 뿐이다. 이모작 직장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5급까지 했던 자신에 대한 선입관을 동료들이 갖지 않도록 하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남아있는 공무원 마인드를 제거하고 겸손해지려 노력했다.

(비상발전기 점검. 촬영=고석배 기자)

과거는 잊어라

3교대 근무에 밤을 새워야 하고 급여도 자신이 받던 연봉의 30%도 안되지만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직접 119대원은 아니지만, 자신이 안에서 건물의 안전을 지키기에 안심하고 대원들이 밖에서 시민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생각에 소명감도 갖게 되었다.

이모작에서 중요한 태도 중 하나가 일모작의 위치에서 배인 습관을 버리고 거라 생각해요. 육군대장이나 대통령도 퇴직하면 다 보통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 허경무

노조도 만들었다. 전국 소방서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적지 않음에도 그동안 노조가 없었다. 공무원 시절 노조 활동을 한 경험이 도움이 됐다.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선지 과거 공무원노조 설립 당시는 색안경을 쓰고 보던 시선이 있었는데 오히려 협조적이었다. 비단 임금협상뿐이 아니라 공무원과 계약직 노동자들 간의 유대강화를 비롯한 소통창구가 마침 필요했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 등초본을 찾아서 복사해주던 시절에는 비리도 많았다. 상계동이 재개발될 때는 한몫 챙긴 동료들도 보았다. 자기는 정직해서라기보다 겁이 많아 그러지 못했다 한다. 당시만 해도 쥐꼬리 월급에 집 장만하려면 눈 한번 질끈 감아야 했다. 그는 첫월급 19만 8천 원을 아직도 기억한다.

용기 없는 공무원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88올림픽을 맞아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청계천에서 이주해왔던 많은 상계동 사람들이 다시 상계동을 떠나야 했다. 그중에는 친구 가족들도 많았다. 대학생이 되어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많은 상계동 친구들이 상계역 앞에서 철거반대 투쟁을 하다 감방에 갔다. 용기가 없어 친구들과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끌려가는 모습을 상처처럼 기억하며 공무원 생활을 했다. 그래서 비리를 저지를 용기도 없었고 아부할 용기도 없었다.

행정 서류가 디지털 전산화되면서 많은 비리가 사라졌어요. 공대를 나왔다고 제가 동사무소에서 디지털 전산화 작업 책임자가 되었어요. 밖에서는 별거 아니지만 공무원 사회에서 지방자치제와 함께 일대 혁신적인 사건입니다.

-허경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지금은 공무원이면 엘리트 대우를 받는다. 그래도 지자체가 되면서 승진권이 지자체장의 권한으로 넘어갔기에 힘든 부분도 있다. 그것이 허경무 씨가 조기 퇴직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임을 숨기지 않는다.

공무원도 위로 올라갈수록 정치적이어야 해요. 성격상 눈치도 없고 아부도 못 해서 회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허경무

(119 구조대. 촬영=고석배 기자)

나는 보통시민이다

정신노동하던 중견 공무원이 육체노동하는 계약직 전기기사가 되었지만, 마음은 편하다. 허경무씨의 향후 인생 계획은 거창하지 않다. 지금처럼 긍정적이며 둥글게 살고 싶을 뿐 특별한 계획은 없다. 그는 단지 전기기사 자격증이 있기에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한다.

그는 전직 공무원의 경험으로 상계동 옛친구들의 크고 작은 일에도 앞장선다. 집 없는 친구들에겐 임대아파트 받는 조건을 가르쳐 주고 돌봄이 필요한 부모를 둔 친구들에게 돌봄 요양 컨설팅을 마다하지 않는다. 늦게야 마련한 집 한 채가 전부지만 술도 잘 사주고 가끔 옷도 사준다. 경조사에 함께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한다.

주변에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은 인생 이모작이 아니라 인생 일모작도 아직 못 마치고 힘든 일을 찾아요.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요. 저는 단지 운이 억세게 좋은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 허경무

허경무 씨는 운이 좋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운을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했다. 허경무 씨는 특별시에 살지 않는 보통 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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