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以目視目] 우정...내 곁을 누가 지켜주었던가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08.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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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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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말이 있다. 간과 쓸개를 서로 다 꺼내 보여주는 사이라는 비유이니, 아무 것도 감출 게 없이 막역한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이 처음 사용된 당(唐)나라 문호 한유(한퇴지)의 시에서, 이 비유는 아름다운 우정을 노래하면서 사용된 말이 아니었다.

한유와 더불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당나라와 송나라 때 이름을 날린 8명의 대표적 문인들)의 한 사람인 유종원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조정의 관리로서 환관과 귀족 세도가들에 맞서 개혁을 시도하다 실패한 후 좌천되어 먼 지방관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사실상 유배다. 그때 종원은 동료였던 유몽득이 자기보다 더 멀고 험난한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 헌종에게 상소를 올려 간청했다. ‘몽득은 노모를 모시고 있어 그렇게 멀리 가기가 어렵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소신과 임지를 바꾸어 떠날 수 있도록 선처해주소서.’ 헌종이 그들의 우정을 갸륵히 여겨 청을 들어주었다.

유종원은 친구를 대신하여 길도 험하고 관사마저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오지로 유배를 떠났는데,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장사를 지낼 때 한유가 자청하여 종원의 묘비명을 썼다. 이런 내용이다.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 비로소 절의가 드러나는 법이다. 평온하게 살아갈 때에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불러 어울린다. 서로 간과 쓸개를 내보이며(간담상조)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일단 털끝만큼이라도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꾸기 일쑤다. 더욱 상대가 함정에 빠질 때는 손을 뻗어 구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들도 세상에 널려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의 간사함에 대비하여, 친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대신했던 종원의 순수한 우정을 치하한 것이다.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 또한 오랜 우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말이 처음 사용된 동기는 깊은 우정을 가리키려는 게 아니었다. 4세기 진나라(東晉)의 황제 간문제는 재상이자 대장군인 환온의 위세가 너무 강해져 고민이 되었다. 그를 견제할 인물을 물색한 끝에 은호라는 인물을 발탁했는데, 그는 재상 환온과 어릴 적의 친구였다. 그럼에도 환온은 그의 등장을 탐탁지 않게 여겨 그날로 정적이 되었다. 마침 호족들 사이에 내분이 생기자 황제는 은호를 중원장군으로 임명해 이를 평정하도록 하였다. 보란 듯이 전공을 세웠다면 환온의 콧대를 꺾을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은호는 중도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쾌재를 부르며 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은호는 어릴 때 나와 죽마를 끌며 같이 놀던 친구(죽마고우)인데, 늘 내가 타다 버린 죽마나 주워 놀던 녀석이다. 그러니 지금도 내 밑에서 머리를 숙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은호는 결국 변방으로 유배를 가고 거기서 생애를 마쳤다(<晉書>).

우리는 어지간히 아는 사이면 다 ‘친구’라고 표현하지만, 친구관계라는 건 다양한 유형이 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늦은 나이에 만난 사이지만 끝까지 친구로서의 의리를 지키는 귀한 관계도 있고, 어릴 적부터의 오랜 인연이면서도 상대를 헐뜯거나 심지어 등쳐서 곤경에 빠뜨리기까지 하는 악연도 있다.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이를 말하는 걸까.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가 되는 동기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첫째 유용성(이해관계), 둘째는 즐거움. 그리고 선을 기반으로 하는 우정이다. 유용성이나 즐거움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은 쉽게 친구가 되지만 이런 우정은 그만큼 쉽게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선(善)을 기반으로 하는 우정은 유용성이나 즐거움이 따르지 않더라고 지속될 수 있는 참된 우정이다. 이런 친구는 드물다. 실로 선한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니코마스의 ‘윤리학’)

요즘 시대에는 ‘우정(友情)’이란 말 자체를 어디서고 듣기가 쉽지 않다. 지금 사람들은 즐거움조차도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유익만 따지는 경향이 있다. TV에선 ‘생기는 것 없이 즐겁기만 한’ 코미디 프로는 거의 전멸이다. 음악 프로그램들은 음악 자체보다는 경쟁의 재미가 핵심인 경연/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세다.

누구를 믿고 기대하고 의리를 지키거나 보답한다는 등의 말은 이제 고전 낭만주의자들이나 쓰는 말같이도 들린다. 예외 없이 이해득실 하나의 잣대로 인간관계가 결정되는 지금 시대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이런 ‘시대의 상식’을 넘어서는 순수하고 변치 않는 우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가.

역시 옛날 사람이지만, 1백 년 전 마크 트웨인은 친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당신의 형편이 나쁠 때 당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친구의 본래 역할이다. 당신이 적당한 자리에 있을 때는 누구나 당신을 편들어 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나는 누구에게 친구 본연의 역할을 잘 해준 적이 있는가.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 편에 선 친구는 누구였던가. 이익을 좇아 배신과 이합집산이 무수히 벌어지는 시대에, 조용히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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