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엔딩] 어서 와, 이런 장례는 처음이지 2..."장례식장에서 떠들썩하게 엄마를 보내기 싫었어요"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8.10 11:46
  • 수정 2022.08.1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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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장례식장에서 떠들썩하게 엄마를 보내기 싫었어요

(채비플래너 전승욱. 촬영=고석배 기자)
(채비플래너 전승욱. 촬영=고석배 기자)

[이모작뉴스=고석배 기자] 장례는 생애주기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다.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마을살이가 가능했던 시절에는 온 마을이 한 사람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고인의 삶을 이야기하며 떠난 이와 남겨진 이들을 애틋해 하였다. 장례에 필요한 음식과 예식 그리고 모든 과정을 함께 준비하며 공동체로 살아갈 힘을 다시 끌어올렸다. 어서 와, 이런 장례는 처음이지 2편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전승욱 채비플래너의 인터뷰와 기고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채비플래너 전승욱은 신학대학을 나와 목회활동을 하다, 신도들의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대학원에서 사회적 경제를 공부하고 웰다잉과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조합원으로 있던 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만나 2020년 부터 뜻을 같이 했다. 10여차례의 '채비장례'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작은장례식. 사진=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제공)
(작은장례식. 사진=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제공)

부의금과 육개장 한그릇에 효율성

최근 40여 년간 우리 사회는 장례를 단순한 행사 정도로 여기고 있다.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 전문장례식장에서 빈소를 차리고, 조문받고, 부의금 받고 육개장을 먹여 보내는 방식은 한편으로 매우 효율적이다.

이렇게 바쁘고 효율적인 장례 과정에서 고인은 잊힌 사람이 되었다. 고인의 삶은 조문하는 이들의 관심밖에 있다. 문상객의 대부분은 상주를 위로하러 온다. 사는 일이 고되고 험난한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빨리 처리해야 할 행사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은 어둡고 두려운 존재다.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몰라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저 달릴 뿐이다.

예술적 치유의 힘을 주는 ‘채비장례’

‘채비장례’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공간을 제공한다. 고인의 인생을 마지막 편지로, 간단한 생애 이야기로, 고인의 사진으로, 그가 사용하던 일상 소품으로 추억을 다시 살리는 시간을 가진다. 고인이 함께여서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지 이야기하고 확인한다. 평생 가족을 위해 밥하고 일상의 노동을 반복해온 평범한 삶이지만 그의 삶도 의미 있는 역사였음을 환기하는 시간이다. 채비추모장례를 하면서 유족과 직원들은 상실치유를 경험한다.

추모예식은 예술적 치유의 힘을 준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020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10여 차례 추모장례를 진행하고 있다. 같은 양식을 제공하지만 모두 다른 자기들만의 독특한 추모식을 진행한다. 그중 2020년 후반에 진행했던 추모식을 소개한다.

다른 선택, 나보다 고인을 위한

상주는 어머니를 추모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사회적 위치로 볼 때 그와 그의 배우자가 일반 3일장으로 치르면 많은 손님을 접객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보낸 3단 근조화환을 울타리처럼 세워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의 엄마는 평생 가족을 위해 수고했고, 임종 막바지 몇 년 동안 요양원에서 병환으로 고생하며 어린아이처럼 살았다. 코로나로 만나기도 어려워 마지막 생일 선물은 요양보호사를 통해 전달하고, 요양보호사가 대신 축하해주는 모습을 휴대폰 영상으로 보았다. 그는 친정엄마의 삶을 잘 기억하고 싶었다. 피할 수 없는 상실을 깊이 슬퍼하고 엄마에게 추모를 보내고 싶었다.

('채비'공간에서 추모식. 사진=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제공)
('채비'공간에서 추모식. 사진=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제공)

임종 첫날

임종 첫날 엄마를 집 가까운 D 병원 안치실에 모시고 장례 일정을 잡았다. 빈소 없이 서울시 중구 충무로에 있는 공간채비에서 추모식만 진행하기로 했다. 엄마가 생전에 좋아하던 갈비찜을 제사상에 올리려고 준비했다. 조문보를 만들기 위해 엄마의 생애사를 간단히 쓰고, 엄마의 생전 사진을 모았다. 사진을 모으는 동안 가족들과 엄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딸이 할머니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썼다. 미국에 있는 큰딸은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동시간에 접속하기로 했다. 장례식장과의 복잡한 계약과 행정일 대신에 첫날을 집에서 고인을 기억하고 정리하는 시간으로 잘 쉬었다고 했다.

임종 둘째 날

다음 날 충무로 공간채비에 그의 가족 3명과 남편 쪽 가족 몇 명이 모였다. 미국에 있는 큰딸을 포함한 가족 네 명과 아주 친밀한 친척 몇 분 모여서 10명 남짓 추모식을 시작했다. 준비된 제단에 영정사진을 놓고 헌화했다. 고인의 사진과 유품 여러 점을 흰 테이블 위에 정돈했다.

엄마의 생애사를 읽고, 추모 영상을 보는 동안 그는 슬퍼했고, 가족들의 위로를 받았다. 미국에서 접속한 큰딸도 자신을 지극히 이뻐해 주던 할머니에게 눈물로 작별 편지를 읽었다. 큰 화면으로 미국과 동시 추모식을 진행하면서 모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정성스럽게 종교행사도 진행했다. 한 시간 반이 넘는 추모식 동안 그는 엄마의 삶을 되새김질하고 천천히 엄마를 놓아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여성이었지만 당연히 상주를 맡았다. 아직도 집안에 아들이 없으면 사위를 상주로 세워야지 여성을 상주로 세울 수 없다고 고집부리는 이들이 있다. 채비장례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 여성이든지, 막내든지, 장애인이든지 유족이 합의하면 누구나 상주를 할 수 있다. 유족을 제외한 참석자들은 낯선 장례예식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추모식을 마친 뒤 그들은 고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깊이 추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채비'공간에서 추모식. 사진=한겨레두레협동조합 제공)

임종 셋째 날

셋째 날에 입관과 발인을 한 후에 화장하고 봉안하였다. 생전에 좋아하던 꽃으로 가득 채운 관에 편안하게 눕혀드렸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는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상실의 섭섭함과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겠는가! 그러나, 최소한 보내는 시간이라도 충실하게 채워 나가야 한다. 그래야 남은 이들이 남은 시간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례

어머니 임종 후 일 년이 지났을 즈음에 그에게 전화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례라고 말했다. 앞으로 사랑하는 이를 보내게 될 경우 다시 채비 추모식으로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추모식을 준비하고 진행했던 플래너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추모식은 중요한 출발이지만 우리 사회의 빈약한 죽음 과정은 많은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이별할 방안을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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