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니어] 평화의 소녀상 작가1... 김서경, 나의 예술은 '공감'이다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8.12 17:21
  • 수정 2023.03.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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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봤을 때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살아주세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씨앗을 퍼트려주세요!” 

- 조각가 김서경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평화의 소녀상을 처음 세상에 낳은 김서경 조각가와 김운성 조각가는 해마다 이맘때가 가장 바쁘다. 1, 2월은 3·1절이, 7, 8월은 8·15 광복절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쁠 때면, 두 조각가는 간혹 트랜스포머가 된다. 합체로봇은 합쳐 있을 때 강한 에너지를 발생하지만 분리돼 있을 때도 충분한 시너지를 낸다. 올 7월에도 한 사람은 캐나다로, 한 사람은 독일로 날아갔다.

(작업하는 김운성 조각가(좌), 김서경 조각가(우). 촬영=고석배 기자)

조각가 김서경

캐나다로 날아간 김서경은 서울 토박이다. 동명여고 시절 서대문미술학원을 다니며 인생 항로를 결정했다. 그때 만난 학원 선생님이 민중판화가로 유명한 고 오윤 화백이다. 그때는 오윤 선생님이 그렇게 이름난 분인 줄 몰랐고 민중미술이 무언지도 몰랐다. 조소과를 나왔던 오윤 선생님처럼 그녀도 조각가의 꿈을 꾸었다.

1984년,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중앙대에 조소과가 새로 생겼다. 그녀는 조소과 1기로 입학했다. 군기 잡는 선배가 없어 좋았지만, 선배들의 울타리가 없어 1학년부터 자주적으로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실기 기자재 부족이었다. 동기들과 뜻을 합쳐 학내시위를 주동했다. 이를 지켜본 문창과 선배의 제안으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알에서 깨어나듯 자기 틀에 머물던 예술관이 ‘사회’로 확장됐다. 비로소 여고시절 은사인 오윤 화백이 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김서경 조각가가 제주 4.3 항쟁을 기리며 동료들과 함께 만든 작품, 한라산.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민중판화가 오윤 화백의 제자

학생회 활동도 하면서 틈틈이 작품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3학년부터는 당시 민중 미술 운동을 주도했던 민미협에 참여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대학 회화과 선배인 차일환 화가와 함께 ‘가는패’라는 민중미술 동인 활동을 했다. 민중미술은 돈이 되지 않았다. 택시 운전을 해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운전면허증도 땄다.

1989년 결혼과 함께 미술학원을 3년간 했다. 원생을 끌어모으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그보다 작품활동에 대한 미련이 더 컸다. 마침 학원이 있던 건물이 재개발에 포함되면서 가양동에 보증금 200만 원짜리 임대아파트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전업으로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미공개 작품명 '가끔은'. 촬영=고석배 기자)

연봉 300만 원의 전업작가 

김서경 조각가는 지금까지 5번의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의 반응도 좋아 IMF 전에는 제법 잘나가는 작가로 소문났다. 인사동과 강남의 화랑에 꾸준히 팔아주는 거래처가 생기고 단골 고객도 늘어났다. 보다 자유로운 작업환경을 위해 경기도 여주의 산골 마을로 들어갔다. 자연 속에서의 아이 교육도 도시보다 나으리라 생각했다. 귀촌한 이듬해 IMF를 맞았다. 대작을 좋아하는 다른 작가들의 부자 고객과 달리 김서경 작가의 고객들은 소품을 좋아하는 가난한 소시민들이었다. IMF의 직격탄을 맞았다. 일 년 수익을 계산해 보니 연봉 300만 원이었다.

(김규식 선생 동상 제작중인 김서경 조각가. 촬영=고석배 기자)

토론토 평화의 소녀상 

지난 7월 김서경 작가는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 오랫동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토론토는 해외에 세워진 세 번째 소녀상이 있는 도시다. 또 3·1운동 당시 화성시 제암리 마을에서 벌어진 일제 학살 사건의 참상과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린 석호필 박사가 살던 곳이다. 원래 화성시의 자매도시인 밴쿠버 버나비시에 화성시민의 모금으로 세워지려 했으나 일본 이민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마침 화성시가 석호필 박사 동상 제막식을 위해 토론토에 갔다가 밴쿠버가 못하면 토론토가 하겠다는 한인회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계획은 사전에 일본 이민자들의 방해를 피하고자 비밀작전처럼 진행됐다. 2015년 11월 18일, 동탄 신도시에 세워진 소녀상과 똑같은 소녀상이 토론토 한인회 마당에 세워졌다.

화성시와 화성시민의 역할이 컸다. 이웃 성남시에서도 미국의 한 도시에 소녀상 건립을 추진했지만, 일본의 극렬한 반대로 제동이 걸린 상태였다.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은 화성시가 큰일을 했다며 지자체가 앞장서 해외 우호 자매도시에 소녀상을 세워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글을 블로그에 남겼다.

(토론토 평화의 소녀상. 사진=화성시청 제공)

하나의 사랑, 하나의 공감

토론토에 소녀상이 세워진 지 7년 만에 김서경 작가는 자기 작품들과 함께 도착했다. 평화행동과 국제연대를 위해 3년 전부터 약속된 전시회를 위해서였다. 이번 전시회는 캐나다 교포 작가와 2인전 형태였다. 전시회 이름은 Peace Exhibition, One Love, One Compassion(평화 전시, 하나의 사랑, 하나의 공감)으로 지난 7월 6일부터 17일까지 토론토 1313 갤러리에서 열렸다,

김서경 작가는 기존 130cm 평화의 소녀상 외에 축소된 미니어처 평화의 소녀상들도 준비했다. 그리고 국내에서 위안부임을 최초로 밝힌 김학순 할머니와 ILO(국제노동기구)에 찾아가 피 토하듯 자신의 기억을 증언하고 2015년 한일 합의 무효를 외치며 위로금 수령을 거부한 안점순 할머니의 조각상도 모셔왔다.

(Peace Exhibition, One Love, One Compassion(하나의 사랑, 하나의 공감 평화전시회).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마지막 자장가

평화와 국제연대라는 전시 주제에 맞게 ‘한국과 중국 평화 소녀상’과 필리핀의 ‘에스텔리타 바스바뇨 디’ 할머니의 동상,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아이 품은 어머니를 형상화한 ‘베트남피에타’도 공수했다. 베트남피에타의 베트남 작품명은 ‘마지막 자장가’다. 그녀는 조각가 김운성과 함께 베트남 중부지역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평화의 소녀상을 볼 때마다 아이를 안고 죽은 베트남 여인이 자꾸 떠올랐다.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듯 한국도 전쟁에서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에 슬픔과 비탄에 빠졌다. 그리고 작가로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우선 사죄와 위로의 피에타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국가를 대신해서라도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사죄하고 싶었다.

마을에 가면 한국군 증오비가 있어요. 비문에 죽은 사람들의 나이를 보니 대다수가 어린이와 노인이었어요. 아이들 대부분은 이름도 없었어요. 세상에 나와 명찰도 달기 전에 죽임을 당한 거죠. 아이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 베트남피에타(마지막 자장가) 작가 김서경

김서경 조각가는 엄마가 아이를 보듬고 위로하는 모습, 대지의 여신이 생명을 위로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아이들과 베트남의 희생당한 자연 또한 위로하고 싶었다.

(베트남피에타(마지막 자장가).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필리핀 소녀와 네덜란드 여인

에스텔리타 바스바뇨 디 할머니는 어린시절 시장에서 강제로 트럭에 태워져 위안소로 보내졌었다. 그녀는 2016년 도쿄 재일본한국YMCA에서 한국·일본 양국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며 "피해국은 11개국에 달한다. 모든 나라의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라"고 외쳤었다.

전시회에는 또 한 명의 여성 초상화도 있었다. 2019년에 고인이 된 네덜란드 출신의 유일한 백인 위안부 ‘얀 루프 오혜른’ 할머니다. 살아생전 그녀는 위안부라는 말을 거부했다.

나는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말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니까요. 저희는 위안부가 아니라 강간 피해자들(rape victims)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얀루프 오헤른 (Jan Ruff O’Herne)

(토론토 전시회에 출시된 얀 루프 오헤른 (Jan Ruff O’Herne) 초상화.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캐나다에서 만난 김복동

김서경 작가는 캐나다 방문을 통해 전시회 밖에서도 많은 사람과 소중한 만남을 가졌다. 캐나다 여성 예술인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 하고 작은 평화의 소녀상도 기증했다. 특히 캐나다 작가 ‘아만타 스콧’과의 만남은 잊을 수 없다. 그녀는 한국의 김복동 할머니를 초상화로 담은 아이링 메두사(EYEING MEDUSA) 시리즈의 작가였다. 예술의 힘은 서로가 모르는 세계에 살면서도 철저히 연결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힘은 서로 손을 잡을수록 더 강해진다.

김복동 할머니는 1940년 14살의 나이로 일본 정부가 조직한 일본군성노예제도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다.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성노예로 끌려다니다 일본군 병원에 버려져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1992년 일본군성노예 피해자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1993년 빈 세계인권대회에 참석, 북측 피해자 장수월 할머니를 만났고 2000년 미국 하원 의회 위안부 결의안 상정을 위한 증언 집회에도 참여했다. 2015년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는 김복동 할머니에게 ‘대한민국인권상’을 수여했다.

(김서경 조각가(좌), 김복동 초상화-아이링 메두사(가운데 상), 아만타 스콧 화가(우).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김복동의 희망 

김서경 작가는 김복동 할머니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녀는 비영리단체 ‘김복동의 희망’ 공동대표다. ‘김복동의 희망’은 2016년 5월 김복동 할머니가 “내가 전쟁 때 태어나서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하시며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5천만 원을 기부하며 시작됐다.

‘김복동의 희망’은 재일조선학교뿐 아니라 한글연구사지원사업에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의 유지를 잇기 위해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한미일 군사동맹 반대’ 행사에도 연대하고 앞장선다. 김서경 ‘김복동의 희망’ 대표는 지난 9일 서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발족식에 참석했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소속 609개 단체의 일원인 '김복동의 희망'은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한반도의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과 정의, 화해와 협력, 시민들의 안전과 인권 보장,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공존과 모든 생명체의 공생을 위해 한·일 시민들과 함께 행동할 것입니다. 

김서경 ‘김복동의 희망’ 공동대표

(한일역사정의평화연대 발족식.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희망 학교 

‘김복동의 희망’은 올해로 3년째 ‘김복동의 희망학교’도 진행하고 있다. 김서경 대표는 특히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다. 한번 예술가라는 직업은 영원히 예술가라는 직업으로 남는다고 하지만 그녀는 인생 이모작의 계획도 갖고 있다. 60이 넘어서는 5년 뒤에는 교육사업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조심히 말한다.

소녀상이 국민의 관심을 받으면서 그녀도 각종 강연에 연사로 초대된다. 그녀가 가장 기억에 남는 강연이 하나 있다. 레드카펫을 밟은 기억이다. 소녀상에 대해 강의를 요청했던 모당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의 선물이었다. 너무 벅찬 선물에 울컥했다. 그 감동으로 정작 수업은 제대로 못 했다며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며 웃는다.

그녀가 생각하는 교육사업이 궁금했다. 흔히 생각하는 대안학교나 그녀가 미술인이기에 미술학교일 거라고 지레짐작해 보았다. 아니었다.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두 자녀를 키우고 교육하면서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남매 모두 정규학교 졸업장이 없다. 그녀는 좀 더 구체화 되면 밝히겠다며 단지 구상하고 있는 교육사업의 화두는 ‘치유와 공감’이 될 거라고 말한다.

(김서경 조각가를 반기며 레드카펫을 준비한 모당초등학교 아이들.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나의 예술은 '공감'

김서경 조각가에게 예술이란 한마디로 ‘공감’이다. 경기도 외곽의 좁은 길을 지나 그녀의 작업실 앞에 내비게이션이 멈췄을 때 비닐하우스 한 채가 보였다. 하우스 앞에는 낙서처럼 '공감'이라는 글이 그려져 있었다.

평화의 소녀상 어깨 위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이 새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영적으로 연결해주는 영매이다. 과거의 소녀들과 현재의 우리들을 오가며 서로의 마음을 전해주는 전령조이다. 서로의 마음이 오가면 그게 ‘공감’이다.

2022년 7월 17일 캐나다 토론토 1313 갤러리에서 구슬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화 전시, 하나의 사랑, 하나의 공감(Peace Exhibition, One Love, One Compassion) 마지막 날 행사였다. 객석에는 소녀상도 앉아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이는 전시회에 공동 참여한 비주얼 아티스트 타이 김(Tai Kim)이었다. 그녀는 영혼을 담고 있다는 레게 음악으로 할머니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었다.

(김서경, 김운성 조각가 작업실. 촬영=고석배 기자) 

민들레 씨앗 

김서경 조각가는 음악에 몸을 맡겼다. 음악과 미술은 본질적으로 같다. 때로 절규하면서 때로 도도하고 담담하게 흐르는 진혼곡은 소녀상과 그 곁에 함께 앉아 있는 다민족 캐나다인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되었다. 그 순간만은 모두가 ‘하나의 사랑 하나의 공감’을 이루었다. 진실은 덮을수록 더 강해진다. “역사는 ‘교육’되어야 하고, 오직 ‘진실’로만 가르쳐야 한다.” 김서경 조각가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진실을 봤을 때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살아주세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씨앗을 퍼트려주세요!” 

(소녀상 앞에서 레게음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재캐나다 교포, 비주얼 아티스트 타이 김(Tai Kim).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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