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니어] 평화의 소녀상 작가2...김운성, 나는 끝까지 간다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8.14 22:27
  • 수정 2022.08.3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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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곁에서 지켜보는 듯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창이형이 살아 있으면 우리와 같이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김운성 조각가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해마다 8월 15일이 오면 두 개의 태극기를 다는 사람들이 있다. 문 앞에는 광복의 태극기를 달고 가슴에는 조기를 단다. 그 사람들은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동문이다. 조각가 김서경과 김운성도 이날이 오면 가슴앓이한다. 30년 전 가슴에 묻은 한 사람이 생살 돋듯 떠오르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 안성교정에 세워진 이내창 열사 조각상. 사진=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 제공)

두 개의 태극기를 다는 사람들

1989년 8월 15일, 한반도 남쪽 끝 거문도 앞바다에서 의문의 변사체가 발견됐다. 그는 중앙대학교 안성교정 총학생회장 이내창이었다. 예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하여 조각가를 꿈꾸던 청년 이내창의 죽음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운성 조각가는 그해 8월 말년휴가를 받고 이내창열사를 만났다. 조소과 선배이자 판화 동아리 '새김'의 선배였던 김운성 조각가는 학창 시절 이내창 열사와 막역한 사이였다. 후배지만 나이가 두 살 많았던 이내창 열사와 그는 터놓고 세상의 고민을 함께 나누었다. 휴가 나오기 전, 함께 미술 운동했던 '가는패' 차일환 선배가 '민족해방운동 걸개그림 사건'으로 구속되고 많은 동료가 수배 중이었다. 대학가는 연일 임수경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로 어수선했던 때였다.

(대학시절 김운성 조각가 표지작품(좌), 김서경 조각가 표지작품(우). 사진=김운성 조각가 제공)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진실을 표현한다

그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8월 말 제대하자마자 달려간 곳은 여수 전남대 병원이었다.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열사 옆에서 몇 날 밤을 새우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그래도 의문사의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2022년, 33번째 8.15가 왔지만,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진실을 표현하는 것보다 진실을 밝히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진실을 예술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운동권 예술대 학생회장

조각가 김운성은 강원도 토박이다. 춘천 성수고등학교를 다니며 조각가의 꿈을 키웠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지방에서 미대를 준비하긴 쉽지 않았다. 재수 끝에 중앙대 조소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는 조소과 학회장을 하고 예술대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신생 학과로 예술대에서 학생 수가 제일 적었지만, 당당히 학생회장이 됐다. 중앙대 예술대학에 ‘민족예술’이란 수식어가 붙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그는 예술대 역사상 최초의 운동권 학생회장이었다.

(예술대학 학생회장 시절 김운성 조각가. 사진=김운성 조각가 제공)

‘민중의 땅 전’ 그리고 1987

예술대 학생회장을 하면서 그는 예술대 안의 조소과, 회화과는 물론 사진과 문창과 등과 함께 ‘민중의 땅 전’을 기획했다. 그동안 대학 예술가에서 마이너로 인식돼왔던 ‘민중 예술’이 주류로 떠오르게 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6월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 그는 졸업반이었다. 어용 총학생회가 물러나고 단대연합 총학생회가 꾸려졌다. 그때 단대연합 총학생회장이 배우 박철민이다. 1년 후배였던 박철민 배우와 함께 총학생회를 맡으며 직선제 개헌과 이한열 열사 사망으로 뜨겁던 1987년 여름을 보냈다. 시위 주동자로 수배가 떨어질 때면 과 동기 김서경 조각가의 자취방으로 숨었다.

역사를 바꾼 보이스피싱

김서경 조각가와 그는 2학년 때부터 소문난 캠퍼스 커플이었다. 수배 중이던 어느 날 밤 김서경 조각가의 서울집으로 의문의 전화 한 통이 울렸다. 김서경 조각가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거짓 전화였다. 한밤중에 김서경 조각가의 부모님이 운전하고 안성의 자취방을 찾았다. 그리고 함께 있던 김운성 조각가와 대면했다.

서울로 딸을 데리고 올라가는 내내 김서경 조각가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보수적인 옛날 사람이셨다. 그리고 처가 부모의 강권으로 김운성 조각가는 군대 가기 전 약혼식을 올렸다. 한 여자의 인생을 책임져야 했다. 그 시절은 그랬다. 제대 후 전통혼례를 올렸다. 한식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이었다. 웨딩드레스를 포기한 김서경 조각가는 그날 밤 자취방에 부모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김운성 조각가와 결혼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라 한다. 김운성 조각가도 그날 누군가 전화만 안 했어도 결혼하지 않았다 맞장구친다.

그날 사찰기관과 학생과에서 전화했다는 말도 있고 친구들의 장난 전화였다는 설도 있다.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그 전화가 없었으면 평화의 소녀상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김운성 조각가(좌), 김서경조각가(우). 촬영=고석배 기자)

찰흙은 때릴수록 강해진다

2011년 어느 날 김운성 조각가는 우연히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수요집회를 목격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는 얼핏 알고 있었지만, 수요집회 참가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몰랐다는 것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도울 것이 없을까 궁리하다 정대협 사무실에 찾아갔다. 마침 수요집회는 1,000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념 비석을 만들기로 계획했었다. 그런데 일본 측에서 온갖 통로로 방해하고 협박했다. 찰흙은 치대면 치댈수록 더 강해진다. 그는 오히려 비석보다 더 메시지가 강한 조각상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정대협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2011년 11월 14일 수요일, 그는 살아생전 그렇게 많은 후레쉬 세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국내 기자들뿐 아니라 일본 기자들까지 진을 치고 평화의 소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1992년 1월부터 시작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집회’ 1,000회를 맞는 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각상

조각상 하나의 힘은 위대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수요집회’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해외에서도 관심을 두고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5년도 채 안 돼 박근혜 정부는 2015년 덜컥 한일위안부 합의에 서명한다. 피해 당사자의 의견을 전혀 담지 않은 밀실 합의였다. 합의 내용에는 소녀상 문제도 거론됐다. 민간단체가 힘들여 세운 것을 정부가 나서서 철거 이전을 약속해버렸다. 2017년에는 한일 양국 간 이면 합의가 있었음도 밝혀졌다. 이면합의에는 정대협 등 위안부 할머니 관련 단체와 해외의 소녀상에 한국 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불가역적으로 사죄를 받아도 한이 풀리지 않을 것을 불가역적으로 사과를 거론치 않겠다는 치욕적인 합의였다.

(베를린시 미테구 평화의 소녀상. 사진=정의기억연대 제공)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독일에서, 그것도 공공 부지에, 조형물을 설치하려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은 독·한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 (Korea Verband)가 그 까다로운 조건을 힘겹게 감수하며 추진했다. 코로나가 극성인 2020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에 처음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알린 날, 드디어 베를린시 미테구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됐다. 독일에서 조형물 설치제도는 기본적으로 1년 설치 허가를 받은 후, 별문제가 없고 주민들의 반대가 없으면 계속해서 연장 신청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독일은 일본대사관의 집요한 철거 요청을 받아들여 2주 만에 철거명령을 내렸다. 독일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코리아협의회 중심으로 재독 한인교포들이 이국땅에서 온몸으로 저항했다. 하물며 주독 일본인 여성들까지 철거명령 철회를 촉구했다.

독일인이 막은 극우 한국인들의 원정시위 

어처구니없는 건 한국 내 극우 한국인들이었다. 소녀상은 한국과 일본의 문제이니 독일은 개입하지 말라는 일본의 극우들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는 거짓 사실이라며 독일 내 정치인들과 담당 공무원들에게 스팸성 이메일을 보내며 철거를 압박했다.

지난 6월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를 비롯한 극우 인사 4명이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앞에 나타났다. 한국인으로서 "위안부 사기는 이제 그만"이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원정시위를 온 그들에게 분통을 터트린 건 오히려 독일인 주민들이었다.

독일 여성단체 쿠라지 여성연합을 비롯해 독일 집권 사회민주당(SPD) 미테구 청년위원회, 베를린 일본 여성연합, 독일 금속노조 국제위원회, 그리고 코리아협의회가 한국에서 원정 온 극우단체들과 맞불 시위를 벌였다. 특히 ‘극우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이라는 시민단체 소속 독일 할머니들도 그 시위에 동참했다. 그들은 독일어와 한국어로 "집에 가!", "더 배워!"라는 구호를 외치고, 디제잉, 통기타와 노래, 살풀이, 부채춤, 사물놀이 등 문화제를 방불케 하는 평화 집회로 대응했다.

(맞불 집회하는 독일 미테구 시민들. 사진=코리아협의회 제공)

더 배워!

김운성 조각가는 극우단체의 방해와 협박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날에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주옥순 엄마부대가 지방의 한 소녀상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는 제보였다.

멀리서 사진만 찍고 무시해 버리세요! 그들이 유튜브용 카메라를 켜고 방송을 한다는 것은 일본과 친일 극우파들에게 "나 이렇게 하고 있으니 돈 줘"라는 행위입니다. 일본 서점에도 돈 되는 코너가 있는데 그 코너가 혐한 코너거든요. 저들은 유튜브 조회수 올리는 데 더 목적이 있습니다. 돈이 되거든요.

- 김운성 조각가

그는 역사 왜곡과 피해자를 모독하는데도 처벌 못 하는 대한민국의 수준 낮은 입법권에 혀를 찼다.

(작업하는 김운성 조각가. 촬영=고석배 기자)

카셀대학교 평화의 소녀상 

김운성 조각가는 지난 7월 홀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엄마처럼 늘 동행했던 김서경 조각가가 먼저 캐나다로 출발한 뒤였다. 엄마가 없으니 더 잘해야겠다는 긴장감에 기차를 거꾸로 타기도 했다. 그의 이번 행선지는 독일 중부의 헤센주 북쪽 ‘카셀’이었다. 카셀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폭격으로 도시의 90%가 파괴되어 다시 복원된 도시다. 당시 1평당 3발의 폭탄이 떨어져 역사상 평양 다음으로 많은 양의 폭탄을 맞은 도시다. 나치가 일으킨 전쟁의 직접적 피해 도시인 카셀시는 전쟁의 치유를 극복하고자 1955년부터 5년마다 현대미술 전시회 도쿠멘타를 개최한다. 지금은 명실공히 세계적인 미술의 성지다.

이번 독일행은 카셀대학교 캠퍼스 내 평화의 소녀상 영구 설치 요청에 의해서였다. 독일의 총학생회는 마치 1980년대 한국의 총학생회를 보는 듯했다. 특히 총학생회장 토비아스 슈니어는 위안부 문제를 보는 일본의 시각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를린의 소녀상을 2년 전 일본 정부가 강하게 철거하고 압박하는 행태를 보고 평화의 소녀상에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시민사회 운동과 식민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작품이 존재 자체만으로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는다는 게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일입니다.

- 카셀대 총학생회장 토비아스 슈니어

김운성 조각가는 토비아스 슈니어 총학생회장을 보면서 젊은 날의 대학시절 자신이 생각났다. 그리고 학생들의 사정을 감안해 ‘평화의 소녀상’ 영구 임대를 흔쾌히 결정했다.

(카셀대학교 앞에서 김운성.  사진=김운성 조각가 제공) 

굿바이전 시즌2

김운성 조각가는 웬만해서 작업실을 기자들에게 노출하지 않는다. 일본 신문기자들 때문이다.

인터뷰를 응하지 않으니까 일본의 기자가 작업실에 몰래 숨어들어온 적도 있습니다. 일본 신문은 90%가 극우 신문이고 그나마 10%도 우익신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는 그들이 인터뷰를 요청하면 계약서를 요구해요. 인터뷰 내용을 편집에서 교묘하게 뒤바꿔 놓으니까요.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일본 언론사는 아직 없습니다

- 김운성 조각가

김운성 조각가는 현재 서울민족예술총연합회 시각예술분과장이다. 그는 지난 6월 광주에서 언론개혁을 위한 예술가의 행동 굿바이전 시즌2를 직접 기획하고 개최했다. 일명 ‘기레기전’이다. 언론이 적극 홍보해 줄리 만무한 행사였다. 기레기전 자체보다 기레기전을 고소하겠다는 기자협회가 오히려 네티즌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기레기’는 이제 국어사전에도 올라온 보편적 단어가 되었다. 굿바이전 시즌2는 오는 8월 25일부터 제주시 삼도이동 ‘포지션 민 제주’에서 한 달간 계속된다.

(굿바이전에 출품하는 김서경 조각가 작품, 힌치피터 기자 동상. 사진=김서경 조각가 제공)

언론의 친구, 기레기의 적

조각가 김운성은 언론의 적이라기보다 친구다. 1994년에는 KBS 방송민주화투쟁을 기념하며 IBC 센터에 파도치는 형상의 돌조각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10년 전부터는 1달에 1번씩 언론재단에서 교육받는 수습기자들과 만나 김운성 조각가 스스로 인터뷰어의 텍스트도 되어주었다. 2019년 7월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26개 단체가 동참해 프레스센터 앞에 세운 ‘굽히지 않는 펜’도 김운성 조각가와 김서경 조각가의 작품이다. ‘굽히지 않는 펜’ 건립 1주년 축하 자리에서 그는 자기 작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간 너무 많은 가짜뉴스와 혐오뉴스가 판을 치고, 돈에 굽신거리는 유튜버들이 너무 많은데, '굽히지 않는 펜'을 보면서 좀 더 많은 언론인이 힘을 내 가짜뉴스를 퇴출하는 데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 조각가 김운성

(프레스센터 앞 '굽히지 않는 펜'. 사진=뉴시스 제공)

‘미선·효순 추모비'와 '강제징용노동자상'

평화의 소녀상 외에 그가 아끼는 작품을 꼽으라면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효순 추모비’와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징용자들을 기리는 ‘강제징용노동자상’이다. 특히 강제징용노동자 문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의 10분의 1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한다. 얼마 전에는 난데없이 부산의 강제징용노동자상 옆에 일장기가 세워지기도 했다.

(미선·효순 추모비. 촬영=고석배 기자)

3인 공동작품 - 전차와 지각생 

김운성 조각가는 2번의 개인전과 김서경 조각가와 함께 11번의 공동작품전을 열었다. 그런데 세 사람이 공동작업한 작품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 ‘전차와 지각생’이다. ‘전차와 지각생’ 작품 속 남학생의 명찰에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아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차와 조각생' 내부. 사진=뉴시스 제공)

부부 교사

결혼 후 여주에서 살던 시절 아들이 다닌 학교는 전교생이 30명 남짓이었다. ‘방과 후 수업’에 김운성 조각가 부부가 참여하면서 차츰 다른 학부모들도 동참했다. 모두 하나씩은 특기를 갖고 있었다. 가정주부만 해서 특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학부모는 ‘음식 만들기’를 했다. 어떤 부모는 오래된 나무 국수틀을 갖고 와 구수한 메밀국수를 직접 뽑아주기도 했다. 소문이 나면서 전학을 오는 학생들이 늘기 시작했다. 아들이 졸업할 때쯤 그 학교의 정원은 8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후 아들은 대안학교를 다녔다. 경쟁 속에서 경쟁의 승자가 되라 교육하고 싶지 않았다. 딸 역시 초등학교 2학년이 최종 정규 학교 경험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딸을 데리고 나가 비를 맞았다. 비의 종류별 느낌과 비의 냄새에 대해 딸과 토론했다. 바람 부는 날에도 바람을 가르치러 나갔다. 마당굿을 보고 온 어느 날은 마당굿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여 장구도 가르치고 판소리도 가르쳤다. 김운성, 김서경 조각가는 부부 조각가이자 부부 선생님으로도 살아왔다.

경쟁 속에서 교육받지 않은 아들이 군대에 갈 때는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최우수 모범상을 받았다. 뺑뺑이를 돌릴 때 어차피 1등이나 꼴등이나 같다는 원리를 빨리 깨닫고 소대원들을 모아 낙오하는 동료를 챙기며 함께 뛰고 함께 들어가자고 설득했다 한다. 어느 해인가 아들은 자신을 경쟁 밖에서 키워줘 그들 부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녀들의 사진만은 노출되기를 꺼린다, 일본과 한국의 극우세력과 기레기의 타깃은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김서경, 김운성 조각가 아들을 형상화한 작품. 촬영=고석배 기자)

반성과 용서가 전제되어야 진정한 평화

2022년 1월 5일은 수요집회를 시작한 지 30년을 맞는 날이었다. 하지만 30주년 행사를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원래의 자리에서 하지 못한 채 30미터 밖에서 해야 했다. 극우 단체가 집회신고를 선점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평화의 소녀상이 반일을 선동한다는 피켓을 들었다.

김운성 조각가는 화해를 거부하지 않는다. 화해는 평화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해는 반성과 용서가 전제될 때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일본은 아직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사죄는커녕 존재 자체마저 부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들의 헌법마저 고쳐 군국주의 시대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끝까지 평화의 소녀상 만들겠다

김서경 조각가와 김운성 조각가는 작품의 희귀성을 고려해 평화의 소녀상 제작을 일정 단계에서 멈추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역사 앞에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부정하는 일본을 보면서 서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평화의 소녀상은 자신들의 작품이 아니라 끝내 사죄를 못 받아내고 돌아가신 할머니들과 남아 있는 한국민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운성 조각가는 일본이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는 한 지구촌 어디라도 소녀상을 계속 세우겠다고 힘주어 밝혔다.

(광화문 1인시위. 사진=김운성 조각가 제공)

프로듀서와 연출가

김서경 조각가와 김운성 조각가는 결혼 33년 차다. 연애 기간을 합치면 38년이다. 결혼 초 학원을 하던 시절 김서경 작가는 학원 아래 찐빵집을 기억하고 김운성 작가는 감자탕집을 기억한다. 김서경 조각가와 김운성 조각가는 종교가 없다. 같은 무신론자이지만 다르다. 김서경 조각가는 모든 종교를 부정하고 김운성 조각가는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 계획성 있는 김서경 조각가는 운전면허증이 있고 기획력 있는 김운성 조각가는 운전면허증이 없다. 김서경 조각가는 보통 여성 평균보다 1센티 작고 김운성 조각가는 보통 남성 평균보다 10센티 크다.

김운성 조각가는 기획력 뛰어난 프로듀서다. 김서경 조각가는 연출력 섬세한 연출가다. 한국의 교양방송은 PD 혼자 기획도 하고 연출도 하지만 대작 드라마나 영화는 프로듀서(PD)가 기획을 맡고 연출자는 디렉팅을 맡으며 역할 분담을 한다. 연극이나 뮤지컬 역시 PD와 연출자의 호흡이 맞아야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

(작업하는 조각가 부부. 촬영=고석배 기자)

평화의 소녀상은 역사가 함께 만든다 

김서경 조각가와 김운성 조각가가 젊은 날 학교 교정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소녀상은 지금 우리 앞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 유명한 조각가와 훌륭한 미술운동 활동가가 되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현대 조형물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탄생할 수 없었다.

2022년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30주년이 되는 해이고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이내창열사가 의문사한 지 33주년이 되는 해이다. 김운성 조각가는 8월 이맘때가 돌아오면 상념에 빠진다.

가끔 곁에서 지켜보는 듯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창이형이 살아 있으면 우리와 같이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김운성 조각가

(김서경, 김운성 조각가의 작업을 지켜보는 평화의 소녀상. 촬영=고석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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