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3] 과학관 : 영화의 탄생...뤼미에르 ‘60초 영화’에서 할리우드까지
[20세기 스토리박물관3] 과학관 : 영화의 탄생...뤼미에르 ‘60초 영화’에서 할리우드까지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8.16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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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 : 영화의 탄생...뤼미에르 ‘60초 영화’에서 할리우드까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새겨진 루이 뤼미에르의 명판 <br>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새겨진 루이 뤼미에르의 명판. 사진=뤼미에르박물관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900년 무렵의 유럽 문명의 가장 화려한 정점은 파리였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무렵에 시작하여 20세기 내내 파리는 당대 인류의 문화수도와도 같은 곳이었다. 문학,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 등 전통예술의 정상급 예술가들과 이들에게 배우려는 지망생들이 몰려들어, 파리는 문화예술과 과학기술 그리고 인문학과 정치외교의 중심도시로 자리 잡았다.

20세기의 주요한 신문명 가운데 하나인 영화가 유료관객을 상대로 처음 상영된 곳도 파리였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대중상대 영화 상영을 알리는 포스터 (1895)<br>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대중상대 영화 상영을 알리는 포스터 (1895)

#1. 파리 그랑카페, 1895년 겨울 ‘기차의 도착’...루이 뤼미에르 형제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한 카페. 신문광고와 포스터를 통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한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페 지하에 안내됐다. 흰 벽을 마주보도록 놓여진 33개의 의자들 뒤편에는 목제 골격 위에 복잡하게 설치된 낯선 기계가 서있었다. 이윽고 전등이 모두 꺼지고 기계에 불이 들어오자 맞은편의 하얀 벽에 흑백의 그림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것이 사진을 매우 크게 확대한 환등기 영상과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주 생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사진기가 세상에 등장한 것은 벌써 50년이나 됐다. 사진은 이미 1861~1865년 사이 미국의 남북전쟁시기에 그 위력을 발휘해 전쟁터의 참혹한 모습들을 미국시민들 뿐 아니라 멀리 유럽인들에게도 생생하게 전달해준 바 있다. 더구나 그 즈음에는 사진기에 한 장씩 원판을 끼워 촬영하던 방식에서 기술이 진일보하여 35밀리 롤필름을 사용하는 방식의 카메라도 등장한 터였다. 벌써 6~7년 전의 일이다. 최초의 영화를 보러 찾아올 정도의 호기심을 가진 일종의 ‘얼리어답터’들이고 보면 초보적인 환등기 영상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직접 발명해 사용한 시네마토그래프. 출처 뤼미에르박물관 <br>
뤼미에르 형제가 직접 발명해 사용한 시네마토그래프. 사진=뤼미에르박물관

다만 지금 카페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은, 그 사진이 어떻게 움직임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화면은 ‘기차의 도착’이라는 제목 글자를 보여준 뒤 멀리서부터 기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화면에 몰입한 나머지 빠른 속도로 객석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 때문에 놀라서 움찔 몸을 피하거나 비명을 지르는 관객도 있었다. 1분.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관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차가 진짜 앞으로 달려드는 것 같았어. 아주 실감나네.’ ‘벽 뒤에 기차나 사람들을 숨겨둔 건 아니겠지?’ 영화가 지나간 하얀 벽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다음 편이 또 있습니다.” 하고 영사기를 돌리던 사람은 말했다.

다시 불이 꺼지고 두 번째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일을 마친 사람들이 퇴근하기 위해 몰려나오는 장면이었다. 모자를 쓴 여공들, 앞치마를 두른 직공들, 자전거를 탄 남자, 그 앞을 어슬렁거리는 강아지, 짐을 실어내는 마차… 이밖에도 배에서 내려 흩어지는 승객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와 아기를 안고 아침식사를 하는 부부의 모습, 공사장의 인부들이나 정원에 물을 주며 장난치는 남자들의 모습이라든가, 와인을 마시며 카드를 치는 남자들의 모습 등이 차례로 상영됐다. 일상에서는 매우 익숙한 모습들이었다. 카메라는 고정돼 있고, 렌즈 또한 고정식이기 때문에 화면은 단순했지만 움직이는 영상이라는 이 놀라운 기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매우 흥분된 기분으로 돌아갔다.

이날 상영회의 모습은 아주 소박한 것이었지만, 이후 인류 대중문화의 양식을 바꾸는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이벤트였다. 관객들에게 1프랑씩 입장료를 받았으니 ‘최초의 상업영화’였고, 이 카페는 최초의 극장이 된 셈이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하루에 2천 프랑이 들어온 날도 있었다.

파리에서 사상최초로 일반 대중 상대의 유료영화를 상영한 뤼미에르 형제.(1895) <br>
파리에서 최초로 일반 대중 상대의 유료영화를 상영한 뤼미에르 형제.(1895) 사진=뤼미에르박물관

영화가 1분짜리로 짧게 만들어진 것은 당시 한꺼번에 긴 필름을 걸어 돌릴 수 있는 릴 방식의 영사기가 없는데다 편집 기술도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사상 최초로 일반 관중 상대의 ‘영화’ 상영에 성공한 사람은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였다. 그해 2월에 시네마토그래프 영사기 특허를 받은 후 3월부터 촬영을 시작하여 수십 개의 필름을 만들었다. 나름으로 상업적 성공을 노려 영화사도 먼저 설립했는데, 그들이 만든 인류사상 최초의 영화사 고몽(Gaumont, 1895. 6. 23 설립)은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영화들을 출시하고 있다. 하여튼 상당히 인기를 얻은 뤼미에르 형제는 이듬해 그들의 영사기와 필름들을 들고 런던과 베를린 등을 돌며 상영을 이어갔다.

최초의 극영화를 만든 조르주 멜리에스. 직업마술사로서 자신의 모든 트릭기법을 영화에 접목하여 순식간에 영화제작의 기법을 한 차원 높여놓았다. 오늘날 ‘현대영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br>
최초의 극영화를 만든 조르주 멜리에스. 직업마술사로서 자신의 모든 트릭기법을 영화에 접목하여 순식간에 영화제작의 기법을 한 차원 높여놓았다. 오늘날 ‘현대영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사진=뤼미에르박물관

#2. 마술사 출신 감독이 공상과학영화를 만들다...‘조르쥬 멜리에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필름들은 ‘신기하다’, ‘놀랍다’는 반응 외에 그 이상의 것을 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 여운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더구나 당시는 새로운 기술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표되던 시기였으니까. 단순한 영상에 사람들이 식상해진 무렵에 새로운 영화 혁명가가 등장했다. ‘조르쥬 멜리에스’라는 마술사 출신의 흥행가였다.

마술사로서 자신의 극장을 가질 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던 멜리에스도 1895년 뤼미에르의 그랑카페에 영화를 보러 갔었다. 멜리에스는 영화를 보자마자 이 신기한 매체에 매료됐다. 자신의 마술기법을 접목한다면 훨씬 재미있는 영화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에게 거금 1만 프랑을 제시하고 시네마토그래프 영사기 한 대를 사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사실 그날 뤼미에르 형제는 다른 이들의 2만 프랑과 5만 프랑 구매제의도 거절했다고 한다. 영사기를 파는 것은 곧 자신의 기술을 넘기는 것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크래프. 필름을 감는 롤이 개발되기 전, 국수가락처럼 늘어뜨려 장착하는 캐비넷이 독특하다. 화면에 영사기능이 없어 한사람씩 파인더에 눈을 붙이고 영상을 들여다보게 되어 있다.<br>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크래프. 필름을 감는 롤이 개발되기 전, 국수가락처럼 늘어뜨려 장착하는 캐비넷이 독특하다. 화면에 영사기능이 없어 한사람씩 파인더에 눈을 붙이고 영상을 들여다보게 되어 있다. 사진=뤼미에르박물관

멜리에스는 유럽의 다른 개발자들에게로 눈을 돌려 런던으로 달려가 애니메토그래프라는 영사기를 구입하고, 미국에서 에디슨이 만들었다는 단편영화들도 사들였다. 1896년 4월부터는 멜리에스의 마술극장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본래 기술자였던 멜리에스는 영사기의 원리를 간단히 개조하여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카메라도 만들었다. 런던에서 필름을 공수해와 영화를 찍고 영사기도 개선했지만 아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해서 마치 영화를 보는 동안 커피 그라인더를 돌리는 것 같았다. 카메라를 개발하는 것보다는 그보다 먼저 시중에 나온 신형 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이 빨랐다. 어차피 그의 관심은 카메라나 영사기 개발보다는 그것을 이용해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적성에도 어울렸다. 뤼미에르의 고몽영화사가 개발한 카메라를 구입한 뒤 그는 열정적으로 새로운 영화들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뤼미에르의 영화를 흉내 낸 장면들에 약간의 스토리를 더하는 정도였지만, 차츰 창의력을 발휘하여 기승전결을 갖춘 ‘극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영사기의 기능도 개선되어 한 작품의 상영분량도 15분 정도로 늘어났다. 자신의 극장을 채광이 가능한 유리 건물로 개조한 뒤 대형 스튜디오를 꾸며 ‘달세계 여행’(1902)과 ‘원맨밴드’(1900), ‘불가능한 여행’(1904) 등 500여 편이나 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마술의 트릭 기법들을 다양하게 영화에 적용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본적인 촬영‧편집기법들의 효시가 됐다.

멜리에스가 일인 다역의 기법으로 제작한 ‘원맨밴드’(1900)<br>
멜리에스가 일인 다역의 기법으로 제작한 ‘원맨밴드’(1900)

영화 제작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음에도 그는 파산하여 영화계를 떠나야 했다. 첫째는 미국의 탐욕스런 발명사업가 토마스 에디슨이 그의 영화를 무단 복제하여 미국 시장에서 이익을 가로채는 바람에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계속해야 했고, 둘째는 1914년 7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사람들이 영화 볼 틈이 없게 된 것이 주원인이었다. 멜리에스는 모든 것을 잃고 영화계를 떠나 잠적해 지내다가 20년대 후반 그를 찾아 나선 몇몇 영화관계자들에 의해 60대에 명예를 회복하였다. 분실되었던 그의 작품들도 복구되어 다시 세상에 나온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생애를 소재로 한 전기영화 휴고(HUGO)의 한 장면<br>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그리피스 (1875~1948) 사진=뤼미에르박물관

#3 유럽의 예술영화와 미국영화의 거장 ‘그리피스’

영화는 유럽 각국에서는 활발히 제작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폼페이 최후의 날’, ‘쿼바디스’, ‘카비리아’(1903) 등 대서사 영화가 의욕적으로 제작됐다. 상영시간도 두 시간 이상으로 긴 본격적인 영화들이다. 그 스펙터클한 영상은 이후 새로 제작된 같은 제목의 영화들이 모델로 삼기에 충분하며 스토리도 본격적이었다. 이제 영화는 대중의 흥미를 넘어 예술의 하나로 승격되어갔다.

1911년,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리치오토 카뉴도는 ‘제7예술선언’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영화를 제7의 예술로 명명했다. 각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영화를 그들의 예술적 실험작업에 포함시켰다. 1916년에는 리치오니 카뉴도, 다눈치오, 아폴리네르, 피카소, 페르낭레제, 라벨, 스트라빈스키 등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미래파 영화선언’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지상주의적 실험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영향에다가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으로 유럽의 영화가 대중의 외면을 받는 사이, 미국에서는 대중문화로서의 영화가 급속히 발전을 이룬다. 1903년 에드윈 포터가 12분짜리 <대열차강도>라는 영화를 만들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미국인들의 관심이 높아진 참이었다.

카메라와 영사기를 만든 토마스 에디슨의 탐욕은 미국 영화사에서도 의미 있는 에피소드로 남는다. 미국의 문화산업도 본래는 뉴욕 등 동부지역이 중심이었다. 영화가 이쪽에서 주로 만들어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발명특허를 통해 사업적 ‘독점’의 재미를 톡톡히 경험해온 에디슨은 영화 제작자나 극장들이 자신의 발명품만을 쓰도록 강제하기 위해 특허의 위력을 남발하고 심지어 코닥 필름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화사에게만 필름을 납품하도록 요구할 정도로 그 도가 심하였다. 견디다 못한 독립영화사들은 에디슨의 힘이 미치지 않는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사철 햇빛이 좋고 기후가 온화한 천연환경을 발견한다. 조명기술이 부족한 당시로선 이보다 좋은 제작조건이 없었다. 1910년대 캘리포니아 LA에 ‘할리우드(Hollywood)’라는 영화의 특별구가 설립된 배경이다.

국가의 탄생, 1915비난의 대상이 된 포스터[ The Birth Of A Nation, 1915 ]
데이비드 그리피스가 감독 작품,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 포스터

할리우드 초기 대표적인 개척자로 데이비드 그리피스를 꼽는다. 데이비드 그리피스가 감독 제작하여 1915년 2월에 개봉한 <국가의 탄생>은 뉴욕에서 44주간 상영되는 등, 첫 2년 동안 무려 2천5백만 명의 관객이 보았다고 하는 대작이다. 러닝타임 190분으로 중간에 휴식시간도 따로 두었다고 한다(당시영화 대부분은 50분 이내).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에이브러햄 링컨의 암살까지 포함하여 미국 역사의 중요부분을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그려냈다. 격렬한 흑백갈등과 전쟁의 참상 등을 그리는 가운데 사실적 묘사에 충실한 나머지 인종갈등을 부추긴다는(특히 KKK를 미화한다는) 등의 시비로 격렬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리피스는 이러한 대중의 반응에 <인톨러런스>(Intolerance; 불관용, 편협)라는 제목의 새 영화를 만들어 응답을 대신한다. 할리우드 초기를 대표하는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영화는 이후 빅스타 시스템과 대작주의 등 할리우드영화의 특징적 시스템이 형성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정의‧용기‧관용‧애정과 같은 굵직한 주제들로 긴 호흡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저력으로 그는 할리우드의 구축에 기여했다. 오늘날까지 ‘미국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미국 할리우드는 20세기 영화역사를 대표할만한 키워드다. 이번 기사에서는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영화의 태동까지가 주제이므로, 할리우드에 관한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은 다음 기회로 넘긴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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