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식의 인생 바라보기㊱] 야채장사 Y씨의 서울 나들이

윤창식 칼럼니스트
  • 입력 2022.08.2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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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식-수필가-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윤창식
-수필가
-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K시에 사는 Y씨(63세)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하나같이 뭐 찢어지게 가난하던 어린 시절, 눈만 뜨면 들로 산으로 함께 싸돌던 불알친구들 아니던가!

서울 강남 신사동에서 수십 년 만에 만난 동무들은 어릴 적 땟국에 절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모두 개기름이 잘잘 흘렀고 큰 차들을 끌고 나타났다. 정말 서울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 생각하며 꿈에도 그리던 녀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옛날로 돌아가 '불타는 까망돈' 삽겹살집에서 왁자지껄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Y씨는 비록 K시 대왕시장통 한켠에서 야채장사를 한다만 새끼들 고등학교는 모두 보낼 정도는 되었고, 그날도 시장통 간이농협에서 서울 갈 여비를 위해 그동안 아끼고 아끼던 구렁이알 같은 돈을 찾아 나오며 그래도 이 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에 겨워 코끝이 시큰거려 왔던 것!

"일차는 내가 쏘지!"

청량리에서 금은방을 크게 한다는 친구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칠 때만 해도 Y씨는 늘그막에 무슨 그런 말투를 다 쓰는가 싶게 "쏜다"는 말이 거슬린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날 밤의 화려한 끝자락이 보이는 듯해서 가슴이 마냥 설레었다.

"야 느그들아, 요 바로 앞에 '밤바다 노래방'이 있는디 끝내준다잉, 거그로 가자!"

누군가 그렇게 외쳤고 Y씨는 모처럼 노래를 불러보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자신의 애창곡을 꼽아보았다.

노래방 내부에 들어서자 우선 진한 지분 냄새가 진동하여 Y씨는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조명은 아리까리했으며 주인인 듯 보이는 40초반의 여자가 가슴부위가 사정없이 패인 까만 드레스를 걸치고 일행을 맞았다. 아까 이곳을 추천한 친구는 그곳이 처음이 아닌 듯 꽤 노련한 제스처로 그 아줌마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고, 일행은 난실(蘭室) 푯말이 붙은 내실로 안내되었다.

Y씨는 자기 키보다 훨씬 커 보이는 새파란 아가씨들 서넛이 초미니 차림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서울 노래방은 역시 다르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Y씨는 그 아가씨들이 따라주는 독한 술이 마음에 걸렸지만 마음속에 늘 간직해 둔 추억의 노래 <울면서 후회하네>를 목청껏 부르며 감격해 했다. 밤이 꽤 깊어갔다. 벌써 12시가 넘고 있었다. 개중에는 자리를 뜬 친구도 있었고 노래방 멀티비전에 얼굴을 묻고 연신 노래를 부르는 놈도 있었다.

이제 파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낀 Y씨는 양복 안주머니에 신경이 쓰였다. 비록 서울 친구들보다는 성공하지 못했고 지방에서 야채장사를 한다만 노래방비 정도는 낼 수 있겠다 싶었다. 친구들은 하나 같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으나 Y씨는 웬일인지 정신이 새벽처럼 멀쩡했다.

"술값은 누가 내나요?" 주인아줌마인 듯한 여자가 물었다.

"술값이요? 아, 내가 낼랍니다! 모두 얼맙니까?" Y씨는 주저 없이 말했다.

주인여자인 듯한 아줌마는 계산서를 Y에게 내밀었다. 계산서에는 14만원이 적혀 있었다. Y씨는 무려 14만원이나 나온 노래방비에 적잖이 놀랐으나 이 정도 돈도 한 번 못 써보고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하는 호기스러움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안주머니에는 5만원이 만져졌고 Y씨는 며칠 전 대왕시장 간이농협 청원경찰이 주선해서 만든 신용카드가 손끝에 잡혔다. Y씨는 생전 처음 카드를 ‘긁었던’ 것이다.

다시 K시로 내려온 Y씨는 마누라 눈치가 보이긴 했어도 평생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온 자신이 뿌듯했다. 다음 달에 돌아올 그 정도 카드값이야 일찍 서둘러 농산물시장에 가서 싸게 물건을 받아오면 금방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Y씨는 한 달 후 집에 배달된 카드대금 고지서를 받아보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4만원보다 열 배나 많은 '140만원'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이것이 뭔 일이랑가. 서울서 계산서를 봤을 적에는 분명히 14만원이었는디 공이 하나 더 붙어부렀으니 귀신 곡할 노릇이네잉!)

Y씨는 반 미치갱이가 된 채로 물어물어 서울 밤바다 노래방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용기를 내어 전화기를 돌렸다.

"아짐씨, 서울서는 14만원이었는디 140만원 이것이 어뜩케 된 일이당가요?"

"아, 그때 그 손님이신 모양이네요. 호호호. 계산서에 14O만원이었걸랑요!"

"뭔놈의 노래방비가 140만원이나 나올 수 있간디요?"

"호호호, 사장님 왜 이러셔~, 이런 곳에 처음 오셨나? 이곳은 유흥주점 노래방이걸랑요."

(워메, 요것이 뭔 소리랑가잉?) Y씨는 숨이 턱 막혔다.

그때 Y씨의 아내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야채 좌판에 쪼그리고 앉아 옆으로 고개를 한껏 제끼고 늦은 점심으로 띵띵 불은 라면을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아! "거룩한 식사"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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