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4] 과학관 : 라이트형제 최초의 비행기
[20세기 스토리박물관4] 과학관 : 라이트형제 최초의 비행기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8.25 16: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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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 : 라이트형제 최초의 비행기

라이트 형제. 왼쪽이 형 윌버, 오른쪽이 오빌 라이트. <br>
라이트 형제. 왼쪽이 형 윌버, 오른쪽이 오빌 라이트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태초부터 인간에게 있어 하늘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神)이 머무는 곳이고, 고통 없는 이상향(하늘나라)이 존재하는 곳이고, 가장 위대한 신화적 존재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 곳이다. 위대한 제왕(천자)과 성인들은 으레 하늘님의 아들이거나 사신(천사)으로 떠받들었다.

라이트 형제를 기념하는 헝가리 우표. 상단에는 현대의 초음속 제트기, 하단에는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가 추락했다는 전설 속 이카루스의 형상이 도안되어 있다. (1978년)<br>
라이트 형제를 기념하는 헝가리 우표. 상단에는 현대의 초음속 제트기, 하단에는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가 추락했다는 전설 속 이카루스의 형상이 도안되어 있다. (1978년)

나아가 사람들은 그런 하늘로 직접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수천 년의 전설과 신화들에 끊임없이 반영되어 나타났다. 그리스 신화 속에는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하늘을 나는 영웅이라든가, 새의 깃털을 붙여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까지 날아오르다 추락한 이카루스 같은 존재들이 등장한다. 중국의 <장자>에는 바다에서 날아올라 구만리를 솟아오른다는 붕(鵬)이라는 새 이야기가 첫머리를 장식한다. 인간이 도를 터득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 신선이 된다는 설정도 익숙하다.

그리고 이 오랜 숙원은 현실이 됐다. 중력을 거슬러 하늘에 날아오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초고속으로 사방을 누비고, 구만리 높이에 수많은 정지궤도 위성을 띄워놓고, 그 보다 훨씬 먼 달나라도 다녀왔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기적(?)이 처음 글라이더 비행으로부터 단 1백여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양한 초음속 항공기들이 하늘을 누비는 현대의 에어쇼 장면. 사진=게티이지미뱅크)
(다양한 초음속 항공기들이 하늘을 누비는 현대의 에어쇼 장면. 사진=게티이지미뱅크)

1896년 자전거 수리공의 무모한 도전

인간이 비행기로 공중에 날아오른 것은 바로 20세기 초엽이었다.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를 넣고 날아오르는 기구를 포함한다고 쳐도, 1백여 년이 앞설 뿐이다. 수소 풍선을 이용한 기구는 속도가 느리고 비행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비행(비행기)의 탄생 이야기는 20세기 기술혁명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비행은 열기구에서 먼저 실현되었다. '공기보다 무거운 것'으로 하늘을 날고자 하는 비행기(글라이더)의 등장은 그보다 1백년이 늦었다. 사진은 1796년 프랑스군이 정찰용으로 사용했던 열기구. 지금까지 원형이 보존된 가장 오래된 비행수단이다(Heeresgeschichtlichen Museum).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연합군보다 강했던 것은 공중정찰과 대포 등 신기술 덕분이었다. 사진=Heeresgeschichtlichen Museum

1899년 5월. 33세의 젊은 사업가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는 동생 오빌(Orville)과 함께 미국의 국립연구기관인 스미소니언연구소에 편지를 보낸다. 비행기에 대한 연구를 위해 최근 발표된 항공 관련 출판물과 사건들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찾아보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의 요청은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온 항공기술 관련 자료들을 꽤 많이 찾아 읽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들은 ‘연구 목적’으로 자료들을 요청했지만, 학자나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 비행기 발명과 개발에 뜻을 둔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였다. 학력으로 치면 고등학교 졸업장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스무 살 무렵부터 인쇄소를 운영하고 신문을 발행했으며,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해 나름의 자립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아직 자동차가 대중화되기 전이었으니 자전거는 당시 미국인들의 필수품과도 같았다. 때마침 자전거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던 때였다. 앞바퀴가 크고 뒷바퀴가 작아 운전하기 어려운 페니파딩 자전거를 대체할 오늘날 같은 '안전자전거'가 1880년대 등장하여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손재주가 좋은 형제의 자전거포(수리 판매점)는 번창했다. 점포를 차린 지 4년 만에 그들은 '라이트 사이클 컴퍼니(Wright Cycle Company)'라는 브랜드를 걸고 독립적인 자전거 생산을 시작했다.

그런 라이트 형제가 항공기 연구에 눈을 돌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국의 과학자 조지 케일리가 1852년 설계한 글라이더. ‘하늘 높이에 인간을 신뢰할만한 수준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보고된 최초의 글라이더로 꼽힌다. <br>
1852년 영국의 과학자 조지 케일리가 설계한 글라이더를 소개한 당시 과학잡지의 표지. ‘하늘 높이에 인간을 신뢰할만한 수준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고안한 최초의 글라이더로 꼽힌다.

형제는 3년 전에(1896년) 구독하는 신문과 과학잡지를 통해 항공과 관련한 몇 가지 새로운 소식들을 접했다.
첫째는 미 국립학술기관인 스미소니언연구소 새뮤얼 랭글리 소장이 증기기관을 이용한 무인항공기(글라이더)의 비행을 성공시켰다는 내용. 둘째는 시카고의 항공연구가 옥타브 샤누트가 미시건호 백사장에서 다양한 글라이더 시험에 성공했다는 뉴스. 셋째는 독일의 저명한 글라이더 연구가 오토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추락으로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라이트 형제가 1895년 자전거회사를 차렸던 오하이오 데이턴의 건물. 이 자전거 회사는 이후 형제의 비행기 발명에 재정적,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br>
라이트 형제가 1895년 자전거회사를 차렸던 오하이오 데이턴의 건물. 이 자전거 회사는 이후 형제의 비행기 발명에 재정적, 기술적 기반이 되었다.

라이트 형제는 이제야말로 자신들이 예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항공기계 연구에 뛰어들 때라고 판단했다. 자전거 회사가 번창해 어느 정도 재정적 여유도 생겼고, 글라이더를 만드는 문제라면 자신들의 작업실에서도 어느 정도는 제작이나 연구가 가능할 것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연구자들의 글라이더가 실패를 거듭하는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빨리 기술적 과제를 해결해보고 싶은 기술자로서의 도전욕구도 있었다. 어쩌면 가시화되는 유인 항공기의 성공 가능성에 남보다 먼저 동력 항공기를 성공시켜 특허권을 선점해야 한다는 사업적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를 띄워라” 백년의 경쟁

당시 항공기 연구는 많은 과학기술자들의 과제였다. 그보다 37년이 빠른 1852년 영국의 조지 케일리 경(1773-1857)이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로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항공수단의 모델을 정립하고 최초의 유인 글라이더 설계도를 발표한 이후 많은 과학자들이 경쟁적으로 글라이더 개발에 나서고 있었다. 이론적 설계를 완성한 뒤 그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글라이더를 공중에 띄워야만 했는데, 대개의 경우 과학자들은 자신이 직접 글라이더에 매달려 언덕에서 뛰어내리는 방식으로 테스트를 진행했다. 추락할 경우 큰 부상을 입거나 심하면 사망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어서 남을 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비오(Biot), 영국의 호라치오 필립스, 미국의 존 조셉 몽고메리,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 미국의 새뮤얼 랭글리와 옥타브 샤누트를 비롯해 수많은 연구자들의 이름이 그들의 논문, 보고서, 그리고 글라이더 실물과 함께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1896년 프로이센(독일)의 과학자 오토 릴리엔탈이 자신이 설계한 글라이더를 타고 언덕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사람이 인공기체를 타고 활공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증명한 사상 최초의 인물로, ‘항공학의 개척자’가 되었으나, 이 해에 글라이더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 중에서도 오토 릴리엔탈은 특히 유명했다. 사실 그 비행은 언덕 위에서 자체동력 없는 글라이더를 타고 점프해 내려오는 수준이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낙하비행의 거리나 안정성은 개선되었다. 1891년부터 96년 사고를 당할 때까지 무려 2천회 이상 몸소 비행하면서 그때마다 사진과 데이터 기록을 꼼꼼히 적어 남겨두었다.

스미소니언 연구소 소장이기도 한 새뮤얼 랭글리는 피츠버그대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학자이자 이론가였다. 글라이더가 안전하게 날 수 있는 공기역학적 안정성에 목표를 두고 디자인을 거듭 개선했으며 시험비행에(횟수도 적었지만) 직접 몸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립연구기관의 수장으로서 탄탄한 인적, 물적 자산에 힘입어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연구에 가장 큰 영향과 도움을 준 항공학자 옥타브 샤뉴트(Octave Chanute). ‘항공기의 아버지’로 불린다. 당시 60대 후반이던 샤누트는 젊은 라이트 형제에게 2천여 회에 걸친 자신의 글라이더 비행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들의 활공시험 캠프에도 시즌마다 찾아와 참관하는 등 기술적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옥타브 샤누트(Octave Chanute, 1832-1910)는 프랑스에서 대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온 뒤 엔지니어로 자라난 사람이다. 51세에 교량 건설 기술자에서 퇴직한 뒤 전부터 흥미를 두었던 항공기 연구에 뛰어들어 2천 회에 가까운 비행실험을 했다.

글라이더 연구가 옥타브 사뉴트의 디자인 중 하나인 12날개 글라이더가 미국 대서양 해변의 밀러비치 모래언덕에서 활공을 준비하고 있다(1896년). 라이트 형제는 샤누트의 글라이더 설계를 항공기 동체의 기본설계로 채택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글라이더 연구가 옥타브 사뉴트의 디자인 중 하나인 12날개 글라이더가 미국 대서양 해변의 밀러비치 모래언덕에서 활공을 준비하고 있다(1896년). 라이트 형제는 샤누트의 글라이더 설계를 항공기 동체의 기본설계로 채택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라이트 형제는 바로 이들의 경험과 시험 데이터들을 고스란히 자신들의 연구에 기초로 삼았다. 꼼꼼한 자료 분석과 앞선 연구자들의 경험 데이터 분석을 통해 새로운 글라이더 설계를 마친 라이트 형제는 1900년 여름. 대서양 해변 키티 호크 해변에 그들만의 비행 시험 캠프를 차렸다. 그들이 사는 오하이오 데이턴(Dayton)으로부터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 호크 해변까지는 지금도 잘 닦인 I-64번 고속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11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120년 전의 도로사정과 자동차 속도를 감안하면 가는 데에만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넘게 걸렸을 것이다(약 1천Km).

라이트 형제의 초기 시험용 글라이더(1900년). 꼬리날개가 없는 대신 수평 유지를 위한 엘리베이터를 앞쪽에 달았다. <br>
라이트 형제의 초기 시험용 글라이더(1900년). 꼬리날개가 없는 대신 수평 유지를 위한 엘리베이터를 앞쪽에 달았다.

이 먼 곳까지 이동한 이유는 경험 많은 샤누트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는 바람이 온화하고 넓은 백사장이 있는 대서양 해변이 글라이딩 시험에 적합할 것이라고 추천했다. 그들은 미국 기상청의 장기예보를 입수하고 키티 호크 지방 기상대에도 기후자료를 요청해 분석하는 등 최대한 정밀한 정보를 가지고, 시간낭비가 없도록 기간을 정했다. 오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들의 캠프는 1년 중 2~3달씩 집중적으로 운영됐다. 

캠프를 진행할 때마다 당시 68세의 샤누트가 멀리 시카고로부터 직접 찾아와 참관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항공연구자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샤누트는 항공학계에 아무런 면식이 없던 젊은 기술자들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고 필요한 지원을 주선하고자 애썼다. 윌버가 자신의 연구서를 읽고 처음 편지를 보낸 1900년부터 안전하고 완성된 비행이 가능해진 1910년까지 10여 년 동안 라이트형제와 샤누트가 주고받은 편지만 수백 통에 달했다.

글라이더가 모래사장에 착륙한 직후 모습. 조종사 윌버 라이트가 복엽기 아래날개에 바짝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1901년, 노스 캐롤라이나 키티 호크 해변). <br>
글라이더가 모래사장에 착륙한 직후 모습. 조종사 윌버 라이트가 복엽기 아래날개에 바짝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1901년, 노스 캐롤라이나 키티 호크 해변).

샤누트는 헌신적인 항공연구자였다. 그는 비행에 관한 모든 기술이 각자의 연구를 수행하는 여러 나라의 과학자 기술자들 사이에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온 과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들이 연구자들 사이에 제한 없이 공유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 자신의 연구 성과를 후배 연구자들에게 아낌없이 제공하고 공동연구를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와도 협력하는 열린 연구자였다.

뒤에 최초의 유인 동력비행에 성공한 라이트형제는 '최초기술'의 인정과 특허권 등 문제로, 스미소니언연구소의 랭글러 소장이나 그 관계자들과 첨예하게 다투며 긴 소송전을 벌였는데, 샤누트는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라이트 형제가 그들의 소중한 일-기술개발에 집중해야 할 시간을 특허소송 같은 일로 낭비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과정에서 라이트 형제는 아버지 같고 스승 같았던 샤누트와 사이가 소원해졌다.

미 국회의사당 원형 홀에 새겨진 미국의 역사 프리즈 중 ‘항공의 탄생’ 부분. 왼쪽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새뮤얼 랭글리, 옥타브 샤뉴트, 그리고 라이트 형제. <br>
미 국회의사당 원형 홀에 새겨진 미국의 역사 프리즈 중 ‘항공의 탄생’ 부분. 왼쪽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새뮤얼 랭글리, 옥타브 샤뉴트, 그리고 라이트 형제.

1910년 샤누트는 그 유감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윌버 라이트는 샤누트 가족의 추도식에 초청되어 그를 추모했으며, 이듬해 샤누트가 회장을 지낸 일리노이 항공클럽에도 초대되어 존경심과 애도가 가득한 추모연설을 했다. 샤누트의 이름은 지금도 샤누트항공우주박물관과 캔자스의 샤누트마을, 미국항공우주연구소가 항공학 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샤누트상(賞) 등의 명칭에 남아있고, 미 국회의사당 건물에 새겨진 미국역사 프리즈 가운데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사무엘 랭글리, 라이트 형제와 함께 조각되어 있다.
 

 

라이트형제의 비행 성공 비결은 ‘3축 조종’ 

1900년 캠프에서 라이트 형제는 처음으로 실제 글라이더에 매달려 점프를 체험했다. 그들은 오토 릴리엔탈의 항공역학 데이터를 사용하고 글라이더 기체는 샤누트의 설계를 기본으로 택하여 만들었는데, 감각 있는 기술자답게 곧바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앞으로 개선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들을 정리하고 메모했다.

그 중에 하나가 조종술에 관한 것이었다. 수년간 자전거를 수리하고 만든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 자전거는 운행하는 동안 몸의 감각으로 자전거와 일체가 되어야 한다. 잠시라도 그 호응이 중단되면 곧 쓰러진다. 똑바로 선 자세에서 핸들만 틀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몸으로 차체를 기울이며 핸들을 돌려야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글라이더 역시 조종사가 감각적으로 일체가 되지 않으면 곧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수단이었다. 

라이트형제 비행 연습 (1901)

이를 기초로 라이트형제는 항공기의 조종술에 관한 개념을 먼저 정립하고, 이러한 기술을 기체에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완전한 조종 장치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던 점이었다.

형제들은 항공기 기술에서 중요한 요소를 날개와 엔진, 조종술 세 가지로 파악했다. 엔진과 날개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종방식의 연구가 그들이 주력할 세 번째 영역이라 판단했다.
3년 뒤 라이트형제가 마침내 안정적인 비행기술을 완성했을 때 당국에 신청한 특허도 기체가 아닌 조종방식에 대한 특허였다. 그것은 ‘3축 조종’으로 불리는 것으로, 현대 항공기의 조종 장치는 모두 이 기술을 따르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항공기 제작기술의 ‘최초 발명자’임이 분명하다).

비행기는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움직여 운항한다. 자동차가 땅 위에서 평면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자동차는 앞뒤 진행과 좌우로의 회전만 가능하면 되는데, 비행기는 앞뒤 좌우 회전과 함께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운동도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이 ‘3축’의 기본 개념이다.
당연히 비행기를 움직이는 조종 장치도 X축(롤링) Y축(피칭) Z축(요잉)을 따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작은 행글라이더에서는 조종사가 자신의 몸을 뒤트는 것으로 기체를 움직일 수도 있지만, 완전한 고정날개를 가진 항공기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두를 조종간만 움직여 대응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들이 필요했다. 

조종법에 관한 특허를 제출한 뒤에도 라이트 형제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이미 연구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날개나 엔진 부문도 그들이 만족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스프러스(Spruce) 목재를 깎아 만든 회전 날개들은 가장 효율적인 회전 비를 얻을 때까지 풍동실험을 반복해야 했고(무려 2백 개의 서로 다른 날개들을 깎아 바람에 대한 반응을 시험했다), 항공기에 무게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량 고출력의 엔진도 직접 만들어야 했다. 이것을 모두 자신들의 자전거공장에서 해결했다. 1903년에 그들이 만든 날개로 조립한 프로펠러는 회전 효율이 66%에서 82%로 높아졌다. 20세기 말까지 항공기 프로펠러의 효율이 85% 정도라는 걸 보면 대단히 완성도가 높은 것이었다. 

1911년 10월 24일.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해변에서 10분 가까이 날며 완벽하게 원을 그린 오빌 라이트의 비행모습. 승강키와 방향키가 달린 러더를 뒤쪽으로 옮긴 후 비행기는 훨씬 안정적이고 빠른 비행이 가능해졌다. 1939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오빌 라이트의 생일(8월19일)을 미국항공의 날로 선포했다. <br>
1911년 10월 24일.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해변에서 10분 가까이 날며 완벽하게 원을 그린 오빌 라이트의 비행모습. 승강키와 방향키가 달린 러더를 뒤쪽으로 옮긴 후 비행기는 훨씬 안정적이고 빠른 비행이 가능해졌다. 1939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오빌 라이트의 생일(8월19일)을 미국항공의 날로 선포했다.

비행기 최초 발명가 논쟁 종지부를 찍다

인간은 20세기 들어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 수 있게 됐다. 그 비행기의 최초 발명가는 라이트형제다. 그러나 정말 1903년 그 해에 완벽한 비행기가 만들어졌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초’라는 명예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중요한 문제지만, 사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비는 1900년대 초반에 이미, 다른 경쟁자들에 의해서, 공공연히 일어났다. 1880년대부터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글라이더 실험에 나섰던 점을 생각하면 과연 누가 최초로 하늘을 날았느냐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사진을 찍어두거나 미디어의 기록에 남지 않아 안 알려지거나 결정적 증거가 없는 인물들이 있다. 예를 들면 1901년 8월에 4기통 가솔린 엔진을 단 단엽기로 800미터를 날았다고 주장되는 코네티컷 주의 구스타프 화이트헤드(그는 2013년 코네티컷 주에서 주 법률에 의해 최초의 동력비행 성공자로 인정받았다). 미국 뿐 아니라 영국 독일 프랑스까지, 한둘이 아니다.

다만 ‘완성된 수준으로 안전하게 사람을 싣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동력 비행기’를 누가 최초로 만들었을까. 이후의 항공기들이 예외 없이 라이트형제의 ‘3축 조종’에 기초한 장치로 발전된 것을 보면, 라이트형제야말로 진정한 비행기의 발명자라는 결론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한편 스미소니언연구소 소장으로서 권위를 잃고 싶지 않았던 새뮤얼 랭글리는 자신이 연구한 글라이더가 이미 1898년에 자신의 보조연구원 무어 헤링을 싣고 15미터와 22미터를 날았으며 3마력 압축공기 엔진도 달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 비행체를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최초 비행기’ 타이틀과 함께 전시했다. 이로써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라이트 형제와 스미소니언 측 사이에 길고 지루한 소송전이 벌어졌다. 

새뮤얼 랭글리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는 항공학계와 기술계는 이 싸움에서 어느 편도 들지 못했다. 랭글러의 영향아래 있는 학자들(더구나 항공학 공학자들)은 계속해서 라이트형제의 약점과 흠을 잡으며 공격을 가했다. 언론들도 학자들의 편이었다. 윌버는 이 문제가 ‘도덕적 문제’라고 판단했다. 더욱 양보할 수 없다며 고독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역사적인 최초의 비행기 ‘라이트 플라이어-1’을 국립박물관이 원했지만 거절하고, 소송이 끝나면 언제든 반환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영국의 런던 박물관에 맡겨두었다. 샤누트가 ‘쓸데없는 시간낭비’라며 형제에게 핀잔을 준 것도 바로 이때 일이다.

사실 새뮤얼 랭글리와의 기술 대결은 1903년 시험 비행에서 이미 한 차례 가려진 바 있다. 1903년 10월에 워싱턴DC 인근에서 랭글리의 항공기는 발사대를 출발했으나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포토맥강에 추락해 조종사가 익사할 뻔했다. 두 달 뒤인 12월 다시 비행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그로부터 9일 뒤인 12월17일 라이트형제는 키티호크에서 보란듯이 첫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몇 차례의 비행에서 최대 59초간 260미터를 날았다. 평생의 학문적 노력에서 실패를 맛보고 일개 자전거 기술자들과의 대결에서도 패배한 랭글리 소장은 패배의 울분을 풀지 못한 채 1906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이때 랭글리 소장이 비행기 개발에 사용한 비용은 정부지원금 5만 달러와 협회원들이 모금해준 2만 달러 등 막대했다. 자전거 기술자들이 손수 만든 글라이더는 1천 달러 기체에 자전거공장에서 만든 엔진을 더한 것에 불과했다.

라이트 형제는 최초의 완성된 비행 이후 그야말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랭글러와 ‘최초’ 타이틀을 다투는 동안 미국 내에서 언론이나 학자들이 라이트형제를 대하는 시선은 차가웠다. 형제는 미국 내에서 더 이상의 시험비행을 멈추고 유럽으로 건너가 자신들의 발명품을 소개했다. 그곳 과학기술자와 대중매체, 각국 왕족과 정치지도자, 군사관계자들로부터 큰 환대와 관심을 받을 때에도 미국만이 냉랭했다. 국립 스미소니언연구소의 소장과 감히 대척한 대가였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1903년에 제작된 ‘라이트 플라이어-1’ 실물이다. (스미소니언 국립 항공우주박물관)<br>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1903년에 제작된 ‘라이트 플라이어-1’ 실물이다. 사진=스미소니언 국립 항공우주박물관

후일 일련의 소송은 라이트형제의 승리로 끝나고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는 1948년 스미소니언 국립박물관에 기증됐다. ‘최초’라는 명예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새뮤얼 랭글리도 이미 죽고, 라이트형제들도 죽은 뒤였다. 스미소니언박물관은 라이트 플라이어-1을 기증받는 조건으로 다시는 라이트형제의 발명품이 '최초'라는 데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다.

뒷얘기

랭글러와 다툼이 시작된 후 라이트형제는 마음 고통이 컸다. 형 윌버가 겨우 45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오빌은 긴 소송전에 상심한 것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1908년 8월8일. 라이트형제가 프랑스의 한 경마장에서 1분45초 동안 완벽한 원을 그리며 공개비행에 성공하고 이어서 8자 비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행을 선보였을 때, 그동안 랭글러의 영향으로 라이트형제를 의심하고 악평을 이어나갔던 대중매체들은 라이트형제에게 깨끗이 사과했다.
“그들의 비행이 모든 의심들을 없앴다. 이제 그 누구도 감히 형제의 결과를 의심할 수 없다.”
또 다른 프랑스 전문가들은 말했다.
“긴 시간 동안 라이트 형제는 유럽에서 ‘허풍쟁이’ 소리를 들으며 무시도 당했지만, 그들은 오늘 프랑스에서 칭송을 받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과를 구한다.”

라이트 형제를 기념하는 헝가리 우표. 상단에는 현대의 초음속 제트기, 하단에는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가 추락했다는 전설 속 이카루스의 형상이 도안되어 있다. (1978년)<br>
라이트 형제를 기념하는 헝가리 우표. 상단에는 현대의 초음속 제트기, 하단에는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가 추락했다는 전설 속 이카루스의 형상이 도안되어 있다. (1978년)

그러나 호사다마. 형 오빌은 1908년 시험비행에서 추락해 심하게 다쳤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비행할 수 없게 되어 이후 모든 시험은 동생 윌버에 의해 수행됐다. 처음 글라이더를 시험할 때부터 형제는 한 번도 같은 비행기에 탄 적이 없었다. 두 아들을 함께 잃을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우려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다치더라도 시험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0년 5월 25일. 오빌은 처음으로 형 윌버와 함께 6분 동안 고향 상공을 비행했다. 형제가 함께 탑승한 유일한 비행이었다. 또 역시 최초로 82세의 아버지를 옆에 태우고 7분 동안 비행했는데, 고도 100미터를 넘어가자 흥분한 아버지가 외쳤다고 한다. “오빌, 더 높이, 높이!” 

두 사람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윌버가 그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아내와 항공기 모두를 위한 시간은 없다.”
역시 독신으로 살았던 유명한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가 ‘결혼생활과 발명을 모두 잘해낼 수 없어서’라고 했던 말을 연상시킨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공장. Dayton, Ohio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공장. Dayton, Ohio

오빌은 뒤에 미국 내 여러 항공단체, 그리고 NASA(당시 NACA)의 자문관이자 종신회원이 되었다. 그들이 비행기를 시험했던 장소들은 오늘날 미 공군과 항공관련 박물관, 기념 공원 등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들의 비행기 사업은 이후 록웰인터내셔널을 거쳐 보잉사에 승계되었으며, 록히드사에도 사업 DNA 일부가 전수되었다. 20세기의 수많은 여객기, 화물기, 전투기, 나아가 우주 로켓에 이르기까지, 모두 라이트형제의 발명으로부터 가지를 뻗어나간 결실들이었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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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훈 2022-08-26 11:34:03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