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以目視目] 끝이 좋아야 다 좋다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08.26 10:44
  • 수정 2022.08.2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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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비지뱅크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All is well that ends well(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속담은 셰익스피어 희곡의 제목으로도 쓰인 말이다.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한 평생을 어떻게 살았든, 살면서 어떤 곡절과 실패와 실수들이 있었든, 남에게 마음의 빚을 남기지 않아 말년을 흔쾌히 웃으며 지낼 수 있다면 이 속담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주변에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요 몇 년 사이에는 한층 많은 부음을 접하고 있는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도 작년 올해 연속하여 집안 어른들을 영결하였는데, 전전년도에 아버님의 형제분들이 차례로 떠나신 일까지 치면 마치 몇 년째 연례행사 같았다. 지인들의 부모상 조문을 포함하여 장례와 조문을 거듭하노라니 요즘은 삶과 죽음에 대한 반성도 많아진다.
과연 ‘잘 살고 잘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조만간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를 위하여 묻고 답해야 할 화두이기도 할 것이다.

일전에 장모님 장례를 치렀다.
먼저 간 둘째 아들을 제외하고 2남2녀의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들, 그리고 여러 손자녀들까지 모두 내려가 입관을 지켰다. 부모님을 작별하면서 눈물 흘리는 것이야 본능적으로나 도리와 관습 차원에서나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이날 어머님 앞에서 자손들이 흘리는 눈물에는 한 점 가식도 없어보였다. 늘 연결되어 있는 가족들 사이에 그 눈물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왜 모르겠는가. 아들 따님들만이 아니라 손주들까지도 진실로 눈물을 흘렸다.

요즘 장례에서 눈물은 얼마나 희귀하며, 또 눈물을 흘린들 얼마나 진정일까. 10년 가까이 요양원에 계시다 가시는 길이건만, 자식과 손주들의 송별하는 눈물이 이렇게 뜨거울 수 있다니. 한 사람의 생이 어떠했는지를 그의 마지막 의식을 통해 엿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분이야말로 진정 ‘잘 살고’ 가시는 것 아닐까 싶었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우셨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신 뒤에는 더욱 힘드셨다. 연애시절 여자친구의 가족은 미아리 언덕배기의 작은 구옥에서 살았는데, 오죽하면 자기 집이 너무 조악하다는 이유로 내게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자식교육에 사력을 다하여 다섯 남매 모두를 대학까지 보냈다. 거기서 국가고시를 각각 거쳐 고위 공직자가 나오고 중등학교 교장이 나오고 의사가 나왔으며, 외국 유학을 거친 사업가도 나왔다.

자식들이 결혼 직후 아직 자립이 어려울 때에는 기꺼이 방 한 칸을 내주시고 손자 손녀들의 양육도 맡아주셨다. 양가 부모세대가 모두 넉넉지 않았던 우리 부부는 자수성가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때 기꺼이 살림을 합치자 하시고 첫 아이의 양육까지 맡아주신 분이 바로 장모님이셨다. 그것이 신세지는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장모님의 도움은 아무런 생색도 없이 이루어졌다. 우리 부부만이 아니었다. 먹고살기 바쁜 자식들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기꺼이 아이들을 맡아 돌봐주셨다. 두 손을 들어 꼽아보니, 10명의 손주들 가운데 최소 예닐곱은 할머니가 챙겨주시는 이유식을 먹고 자라났다. 갓난아기이든 사춘기의 아이들이든 할머니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걱정이나 불평을 앞세우지 않고 말없이 받아주셨다.

자녀들과 손주들이 다 독립해 나간 얼마 뒤에 어머니는 치매가 시작되었고, 자식들의 보살핌을 몇 년 받다가 요양병원으로 가셨다. 병원에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가장 얌전한 할머니로 계시다가 이제 자손들 앞에 돌아와 영별을 고하셨다. 그야말로 한평생이 자손들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이셨다.

돌이켜 생각하니 어머니가 자녀들이나 손주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시는 동안 싫은 소리 한 마디 안 하신 건 물론이고, 그렇다고 그 누구에게 공부를 해라마라든가 혹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는 등의 말씀도 한번 하신 적이 없다. 자식들이 어떤 전공을 택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하거나 직장을 바꾸거나 간에, 간섭하는 말도 일절 들어본 적이 없다. 그저 짧게 ‘잘 됐다’라든가 ‘아이고, 어쩌나’ 정도가 고작이셨다. 오직 먹이고 입히는 일만을 당신의 의무로 여기시는 듯 묵묵히 가정을 지키셨다. 다만 기억에 짙게 남는 것은 푸근하게 미소 짓는 모습인데, 그 미소야말로 자식들의 선택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허락의 느낌이 담긴 것이었다.

가시는 마당에도 별다른 당부의 말씀은 없으셨다. 말씀은 없으시지만 그의 삶에서 울려나오는 큰 가르침을 어찌 모를 수 있으랴.
뉴델리에 있는 마하트마 간디 기념관에서 본 어록 하나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나의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My life is my message).’
말보다는 오직 삶으로 보여주신 인내와 헌신, 그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가르침이 가슴에 큰 울림을 남긴다.

'잘 산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평생 많은 고생과 자기희생만이 있었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가 그러지 못했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뜻을 맘껏 펼치고 권세를 누리고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한들, 그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애도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오히려 원망이나 질시나 자식들의 암투가 무성하다면 저승엔들 편히 갈 수 있겠는가. 자손들이 진정으로 슬퍼하는 작별이야말로 ‘실로 아름답게 잘 사시고 아름답게 잘 떠나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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