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 96] 베트남ㆍ중국 접경 지역, 소수 오지마을 7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8.31 11:45
  • 수정 2022.09.0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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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ㆍ중국 접경 지역, 소수 오지 민족들'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어쩌다 낡은 버스가 지나가고
아카시아 꽃이 눈부시게 흩날리던 고향

턱을 괴고 동구 밖을 내다보다
누렁개와 놀다
소나무 위에 올라가
장에 간 어머니가 돌아오시는지
손차양을 하고, 실눈을 뜨다가
아이의 한낮은 빨랫줄 위의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다
- ‘마른버짐’, 윤재훈

(항저우 풍경, 촬영=윤재훈)
(항저우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경제적으로는 빠른 성장을 하는 것 같지만, 문화가 너무 낙후되어 몇십 년은 더 가야 선진국에 진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특히나 돈과 군사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작금(昨今)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길거리에는 수많은 플랭카드와 포스터가 붙어있어 <캠페인의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부에서도 그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느꼈으면, 거리마다 <문화국민>이 되자는 계도성 포스터들이 붙어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실감이 난다.

중국 여행을 하면서 박물관과 유명한 관광지들은 꼭 들리려고 하는데, 입장료가 너무 비싼 곳은 배낭여행자를 망설이게 만든다. 특별하지 않은 곳도 문을 막고 입장료를 받는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황산을 갔던 기억이 새롭다. 폭설이 와서 입산이 통제되고 며칠을 기다리다 게스트에서 만난 중국 청년들과 의기를 투합해 갔다. 산 아래에서 그들과 겨울 산속에서의 1박 2일 먹을 인스턴트 음식 몇 가지, 없으면 안될 기본 장비들만 준비했다. 인스턴트 음식은 따뜻한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황산이 크다 보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산의 입구에 도착하니 중턱까지 오르는 케이블카 요금이 200(36,000원)원 씩이었다. 부담스러웠는데 왠일인지, 외국인들에게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에서 처음 보는 풍경이다. 오지에서 문도, 옆 벽도 없이 서로 마주보고 변을 보는 화장실에서도 돈을 받았는데, 횡재한 느낌이다.

(깔깔거리며 벌을 받은 아이들, 촬영=윤재훈)
(깔깔거리며 벌을 받은 아이들, 촬영=윤재훈 기자)

오지 마을을 걷다가 학교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벌도 재밌게 받는다. 깔깔거리면서 운동장을 도는데, 벌을 받는 건지, 놀이를 하는 건지, 잘 구분이 안 간다. 어쩌면 우리의 어린 시절, 내가 다니던 산골 학교 풍경도 저랬던 것 같다.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부모님들이 대부분 나오셔서 만국기가 흩날리던 운동장을 손잡고, 같이 달렸다. 그날은 온 동네가 잔칫날 같이 흥성거렸다.

만일 요즘 같은 한국사회에서 선생님들이 저런 벌을 내리면, 아마도 불 위에서 끓고 있는 냄비처럼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공동체사회에서는 잘못된 행동을 하면 기본적인 벌을 받아야 되지 않을까? 특히나 모든 인성이 결정되는 어린 시절에는 말이다. 인간은 말로만 해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절 우리는 그런 벌로 인하여, 공동체 사회에서는 지켜야 할 기본을 익혀 나갈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일어나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들, 무책임하고 싸이코 같은 행동들,

가장 큰 잘못은 부모님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선생님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머리에는 기계충이 돋고
얼굴에는 영양부족으로
하얗게 마른버짐이 내려앉던
6, 70년대 한국의 아이들

누런 코가 턱 아래까지 내려오다
훅, 하는 소리에
다시 급하게 따라 올라가던,
소매에는 항상 하얀 코가
두껍게 눌어붙어 있어도
그냥 그렇게 살아가던 시절,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어쩌다 낡은 버스가 지나가고
아카시아 꽃이 눈부시게 흩날리던 고향

턱을 괴고 동구 밖을 내다보다
누렁개와 놀다
소나무 위에 올라가
장에 간 어머니가 돌아오시는지
손차양을 하고, 실눈을 뜨다가
아이의 한낮은 빨랫줄 위의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다

산모롱이 먼지가 날리며
버스가 돌아오고
아이는 급하게 내려가
신작로에 서던
그러다 운전수 아저씨 몰래
버스 뒤에 올라타기도 하던
6, 70년대 한국

엄마는 언제 오실까
아이는 해종일 기다리고 있다

- ‘마른버짐’, 윤재훈

그 옛날 어린시절 마땅한 놀이기구도 없던 아이들은 그저 친구들과 하루종일 흙 위에서 노는 것이 전부였다. 만세방, 가위샌, 말좆박기, 칼싸움, 연탄 던지기, 고물줄, 오자미, 공돌줍기…

동무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앵두 따다 실에 뀌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그래도 스승이 있었고, 평생 기억나는 선생님들이 있어 ‘스승 찾기’도 하고 했는데, 요즘은 아예 그런 풍경들이 사라진 것 같다. 나아가 요즘은,

스승이 없다는 시대

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선생님들의 자조만 있고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 주위에서는 너무 ‘보신주의’에 물들어있지 않나 하는 우려를 많이 한다.

워낙 극성인 학부모, 인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학부모들 때문에 선생님들이 많이 위축되어 있지만, 그래도 스승의 도리마저 사라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이들의 잘못을 보고도 고개 돌리고, 오늘 하루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할수록, 학교 폭력은 더욱 심해지고, 선생님 위상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교장으로 정년한 지인에게서 퇴임 2, 3년 앞두고는 날아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군대 말년 같은 소리를 들을 때면, 제자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자신의 사비를 털어 굶고 있는 제자의 도시락까지 준비해주시던 그 선생님이, 두고두고 그립다.

(오지학교 상록수 교사들, 촬영=윤재훈)
(오지학교 상록수 교사들, 촬영=윤재훈 기자)

안이 훤히 넘어다 보이는 교무실에는 컴퓨터도 없어 생소하다. 젊은 선생님들이 몇, 문 앞에 옹기종기 앉아 뭔가를 자르고 있다. 맞아, 옛날 우리네 학교 풍경도 저랬을 것이다. 먼 남쪽 끝, 삼산 초등학교, 겨울이면 늑대가 내려오던 그 마을.

(우리 편 이겨라, 촬영=윤재훈)
(오지학교 운동회, 우리 편 이겨라, 촬영=윤재훈 기자)

조그만 산골학교, 조그만 운동장, 오늘은 운동회라도 있는 모양이다.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운동장이 너무 좁아 아이들의 야생마 같은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다음에는 병에 물을 채우기인데, 편을 갈라 사이다 병 같은 곳에 먼저 채우는 팀이 이기는 것이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그 시절 둥무들의 함성이 지금도 들려오는 듯 아련하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변변한 장비 하나 없었던 가난했던 산골 학교, 운동회 날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먼지 날리는 운동장과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었던 것, 그런 것들이 놀이의 재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고생한 만큼만 바랐고, 하늘이 주는 만큼에 만족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파괴하지 않고 공존했으며, 소의 커다란 눈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소박했다.

(순박한 아이들, 촬영=윤재훈)
(운동회날, 오지학교 순박한 아이들, 촬영=윤재훈 기자)

산골마을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며 아예, 뭔가를 달라고 해 나를 슬프게 한다. '머니, 머니' 이 단어만 아는 것 같다. 어쩌다가 지나가는 여행자들이 이런 현실을 만든 모양이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음식은 나누어 먹어도, 절대 돈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 옛날 우리 아이들이 미군들의 매연 풍기는 지프 뒤꽁무니를 따라가며, “give me, give me”하던 그런 살풍경(殺風景)은 벌어지지 말하야 한다. 이것은 ‘있는 자들의 폭력’이다.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이번에도 아주머니 한 분이 자기가 안내해 주겠다고 하면서, 집으로 데려간다.

(집 안 풍경, 촬영=윤재훈)
(오지마을 집 안 풍경, 촬영=윤재훈 기자)

옥수수 가마니 몇 푸대 쌓인 바닥, 불을 때면서 한 공간에 사니 온통 그을름이다. 밥을 해 먹다가 밤이 되며 가족들은 저 안으로 들어가고, 아침이면 다시, 부스스 밖으로 나온다. 

벽에 나무부터 문 앞, 선반을 비롯해 시커먼 냄비에, 모기장이 쳐진 나무 침대, 더 새까만 모기장 줄에는 어지럽게 걸린 옷들도 새까맣다. 그 옆에 땔나무로 반쯤 막아 그 안에도 온통 새까만 탁자, 그 위에 시커먼 냄비, 그 옆에 나무로 쓰러질듯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살강 위에 밥그릇 서너 개.

찌그러진 솥단지 하나
저것이 우리 식구를
이만큼 키웠구나

때로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내던지기도 하고
어머니가 팔이 시리도록
닦아내기도 했던,
숱한 양념들이 표피마다
빗살무늬처럼 깊게 배어
맛을 우려내던
그 흔적들이 햇살 아래
반짝이는구나

그동안 많이 낡았구나
가만히 한 번 쓸어보는,
언뜻언뜻 찌그러진 틈으로
지나온 세월이 깊게 배어
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구나!

할머니가 끝내 버리지 못하고
우리 집 살강에 엎드려
없는 듯 조용히 굴신(屈身)한 지가
언제였던가

숱하게 내동이 쳐지고
때로는 찌그러지고,
그럴 때마다
허리춤을 추스르고
호두알처럼 더 단단해지고 싶었을 세월

그 세월을 같이 견뎌온
바람 잦은 언덕 같은 날들
한 그루 나무 같았던 세월

낡은 솥단지 하나
살강 위에서
가을볕만 서럽게 살갑다
- ‘양은솥 하나’,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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