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5] 유럽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여왕은 지금도 열여섯 나라를 지배한다
[20세기 스토리박물관5] 유럽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여왕은 지금도 열여섯 나라를 지배한다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9.0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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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개국 25억 인구가 영연방(BCN) 소속…16개국은 직할
엘리자베스 1세가 기초 놓고 빅토리아 여왕이 키운 대영제국
서구 열강 식민지 경쟁에 아프리카 ‘초토화’ 부작용

유럽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 (1838)<br>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 (1838)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벨 에포크 (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이라 번역되는 이 프랑스어는 20세기로 들어서는 유럽의 한 시대를 표현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00년 뒤 홍콩에서 ‘화양연화’(花样年华, 2000년)라는 제목의 영화가 나왔던 일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다. 절정의 인생이거나 시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같은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벨 에포크’는 한 개인의 생애에서가 아니라, 1900년 전후 유럽사회가 전반적으로 누린 태평성대를 표현한 말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만큼 20세기로 들어 유럽사회는 문명적으로 완숙되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정치(시민혁명과 전쟁의 종결), 경제(산업혁명과 신기술의 발전), 종교(종교혁명), 문화(영화 축음기 전화기의 등장), 학술(학교교육 제도의 정착), 언론(출판산업과 라디오 등장), 여행(자동차, 철도, 항공, 항해) 등 많은 분야에서 엄청난 진전이 있었다. 적어도 ‘부르조아’라 지칭되는 중산층 이상의 시민들과 귀족층에 국한해서라면, 충분히 ‘벨 에포크!’라고 외칠 만도 했을 것이다.

가장 화려해 보이는 곳은 프랑스였지만, 강대국의 지위를 가장 확실하게 구축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세계 곳곳에 영토와 식민지를 개척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영국은 대영제국, 영국연방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빅토리아 여왕이 세계 각국의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그린 풍자만화. 여왕은 “오, 착하지. 조금만 참고 기다려. 때가 되면 모두 한 번씩은 방문할 테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지구상 1/4이 넘는 땅과 인구를 지배하는 영국의 위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분주함을 빗대었다. 그 지배자인 여왕의 150cm를 조금 넘는 단신을 도드라져 보이게 한 점도 인상적이다. 삽화가 사뮤엘 W. 포레스

1901년 런던에서는 19세기 영국의 왕이자 영국 연방의 수장인 빅토리아 여왕이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팍스 브리타니카’의 영광을 구현한 왕이었다.

여왕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의 여왕이었으며, 아프리카와 중남미 카리브해 연안에도 수많은 식민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이후 대부분의 식민영토를 독립시켜주었는데, 그 숫자는 50개를 훌쩍 넘는다.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하여 여왕의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들 대부분이 영국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 약칭 BCN, 지금은 그냥 코먼웰스 Commonwealth)의 일원으로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이제 옛말인 줄로 생각한다. 오해다. 영 연방의 회원국 혹은 자치영토는 지금도 56개나 된다. 50여개는 그들 자신들의 왕이나 대통령을 따로 갖고 있는 동맹 형태지만, 영국 왕을 국가 수장으로 받들고 있는 나라도 16개나 된다. 지금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수장이다. ‘대영제국’의 문장에도 나와 있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아일랜드를 비롯하여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자메이카,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투발루, 솔로몬제도, 바베이도스 등이다. 동맹국 중에는 아시아의 인도, 파키스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몰디브, 등이 포함돼 있다.

영국 여왕이 지배하는 영토에서 출발해 국제기구로 발전한 영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회원국들의 분포도와 표식. 영국 연방에는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과거의 기록을 찾아 비교해보면, 1백 년 전 영 연방에는 세계 인구의 1/4이 넘는 4억5천만 인구가 소속돼 있었는데, 2022년 현재는 25억의 인구가 소속되어 있다. 비율로는 세계인구의 30%가 넘는다.

대영제국은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며, 16개의 직할국, 40개의 동맹국과 협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코먼웰스 회원국들은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시대적 의제를 공유한다. 근래 최대의 관심사는 지구의 기후위기와 젊은 세대에 대한 격려가 주요 의제다. 회원의 다수를 점하는 남태평양과 카리브해 연안의 섬나라들에게는 하루하루 높아지는 해수면의 위협이 절박한 현실이다.

백년 평화시대 이끈 ‘키 작은 거인’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 시작되었다. 당시 열여덟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64년간 ‘영국의 어머니’이자 ‘유럽의 할머니’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 때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왕위에 머문 군주였다(이 기록은 현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의해 갱신되었다. 엘리자베드 2세는 1952년 왕위에 올라 올해 96세, 재위 70년을 맞고 있다).

영국에서는 1688년 ‘명예혁명’과 이듬해 ‘권리장전’을 통해 입헌군주제와 책임내각제가 확립된 후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Kings reign but do not govern)’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나라 살림은 의회와 내각이 알아서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왕의 관심사는 국정의 방향에 큰 영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왕이 굳이 내정에 간섭하고자 시도한다면 책임내각제의 원칙이 위협을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64년 동안이나 재임하면서 왕의 권한과 내각, 의회의 권한 사이에 최적의 균형을 유지하며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루어냈다. 빅토리아여왕의 역할은 영국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지혜로웠고 결과적으로 훌륭한 편이었다.

영국의 왕실 문장. 1837년 빅토리아여왕 즉위 이래 사용되는 것으로, 4등분으로 나뉜 방패의 좌우측에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져 있다. 방패 속 사자 세 마리가 그려진 두 개의 그림은 잉글랜드의 왕실 문장이며, 우측 위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좌측 아래는 아일랜드의 국장이다. 대영제국이 이 세 나라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국가임을 보여준다.방패 밑 프랑스어 문장은 영국 군주들의 표어인 "신과 나의 권리"(Dieu et mon droit), 방패를 둘러싼 리본에는 "악한 생각을 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Honi soit qui mal y pense)는 표어다.
영국의 왕실 문장. 1837년 빅토리아여왕 즉위 이래 사용되는 것으로, 4등분으로 나뉜 방패의 좌우측에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져 있다. 방패 속 사자 세 마리가 그려진 두 개의 그림은 잉글랜드의 왕실 문장이며, 우측 위는 스코틀랜드의 왕실, 좌측 아래는 아일랜드의 국장이다. 대영제국이 이 세 나라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국가임을 보여준다. 방패 밑 프랑스어 문장은 영국 군주들의 표어인 "신과 나의 권리"(Dieu et mon droit), 방패를 둘러싼 리본에는 "악한 생각을 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Honi soit qui mal y pense)는 표어다.

많은 역사서들이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1815년(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부터 1914년(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로 꼽고 있다. 그 백년이 바로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의 기간이었다. 유럽에서는 평화가 이어졌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도발로 인한 잠깐의 전쟁이 있지만, 이런 저런 전쟁이 진행된 기간은 다 합쳐도 44개월 정도. ‘유럽의 백년 평화’에 큰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백년 가운데 64년이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프랑스, 프로이센(독일), 러시아 등 대륙의 강대국들은 정치적으로 큰 격변을 겪으면서 대부분 전통왕조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영국만은 산업화아 민주화의 대세를 수용하면서도 왕권은 오히려 탄탄해지는 독특한 결과에 도달한 점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시대의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시민들이 자유선거를 통해 뽑은 선출권력(의회)과 전통권력(왕권) 사이에 균형을 존중한 왕조의 태도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빅토리아 여왕만의 독특한 개성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837년 왕위에 오를 때, 빅토리아는 이제 18세 성년의 생일을 갓 지난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키마저 작은 소녀왕의 대관식을 바라보는 당대 권력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나 경계심 같은 것이 별로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권력자들은 그녀의 당찬 태도에 이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우선 빅토리아는 왕이 되자마자 여왕의 어머니로서 권세를 마음껏 누리고자 이 날을 고대하던 자신의 어머니를 버킹엄 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별궁으로 보내버렸다. 어머니의 정부(情夫)이자 비서였던 콘 로이에게는 섭섭지 않을 정도의 퇴직금을 주어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나고 왕으로 자라나다

여왕이 왕의 후계자로 자라난 과정부터가 좀 드라마틱하다.

이야기는 할아버지 조지3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노버 왕조의 세 번째 왕이었던 조지3세에게는 15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 중 여섯 명이 아들이었다. 빅토리아의 아버지 캔트공작 에드워드는 그 중 네 번째 아들로, 왕위 계승 서열로 보면 위의 세 형과 그들의 자손들 뒤로 밀려 거의 왕관에 관심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선지 에드워드는 중년까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고적하게 살았는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조지3세의 재위 기간이 길어지는 동안(60년) 형들의 후사가 모두 끊어지고 만 것이다. 조지3세의 후계 1순위는 장남 프레더릭이었는데, 그가 아직 왕위를 물려받기도 전에 딸 샬럿 공주(후계 2순위)가 요절했다. 둘째 요크 공작(3순위)은 자식이 하나도 없었던 데다 형 조지4세가 재위하는 동안 세상을 먼저 떠나버렸다. 셋째아들인 클래런스(4순위)에게는 딸 둘(5, 6순위)이 있었는데 모두 어려서 죽었다. 그 바람에 넷째 아들 에드워드는 승계 7순위에서 용약(勇躍) 3순위로 올라섰다. 에드워드는 그제야 50대의 나이로 결혼을 서둘러 첫째 딸 빅토리아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듬해 죽었기 때문에, 그 후계 서열은 자연히 빅토리아에게로 돌아갔다.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화가에게 여왕의 작은 키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당대 중견 화가 Charles Robert Leslie(1794-1859)의 작품으로 대관식으로부터 2년 후 완성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화가에게 여왕의 작은 키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당대 중견 화가 Charles Robert Leslie(1794-1859)의 작품으로 대관식으로부터 2년 후 완성되었다.

조지3세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큰아버지들인 조지4세(프레더릭)와 윌리엄4세(클래런스)의 뒤를 이어 재론할 필요도 없이 빅토리아가 왕이 되었다.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다.

선왕인 삼촌들은 왕위에 오를 때 이미 나이가 많았다. 이 때문에 어쩌면 빅토리아가 성년이 되기 전에 왕위에 오를 가능성도 있었는데, 빅토리아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은 자신이 어린 여왕의 섭정이 되어 그 권한을 한껏 누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왕실의 종친들은 이런 켄트 공작부인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편을 일찍 잃은 공작부인에게는 콘 로이라는 궁중비서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선왕 윌리엄 4세가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것은 1937년 6월20일. 빅토리아 공주가 18세 생일을 지난지 20일째 되는 날이었다. 켄트 공작부인에게는 아쉽게도 섭정이 필요치 않은 나이였고, 공주는 취임 후 첫 번째 조치로서 자기 어머니와 콘 로이를 왕권에 근접할 수 없는 거리로 내보냈던 것이다. 왕실 사람들은 윌리엄 4세가 빅토리아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생일 전에는 죽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라고들 했다.

“내가 이 나라의 여왕이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라고 그녀는 임기 첫 날의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조국을 위하여 내 임무에 최선을 다하리라”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나고 왕으로 길러진 그녀가 스스로도 왕의 본분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왕은 13세부터 어머니의 권유로 일기를 쓰기 시작해 죽기 직전까지 68년 동안 일기를 멈추지 않고 썼다. 뒤에 여왕의 막내딸 베이트리체 공주가(너무 적나라하다고 생각되는) 일부 내용을 뜯어 폐기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일기들이 보존되어 2012년부터 ‘여왕의 일기(Queen Victoria’s Journals)’라는 제목으로 공식 웹 사이트를 통해 공개되고 있다.

여왕의 결혼식
여왕의 결혼식

노예 해방 지지… ‘선물 받은 흑인 노예’를 딸로 삼다

여왕은 왕실 종친들의 권유에 따라 1840년 그녀의 외가쪽 사촌인 독일 작센의 귀족 앨버트와 결혼했다. 러시아 왕실이 영국 왕실과의 혼사에 잔뜩 공을 들이고 있었고, 덴마크나 다른 왕국에서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여왕을 떠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극성에 지친 여왕은 독일 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려 했으나, 그녀의 20회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방문한 앨버트를 보는 순간 이내 친근감을 느꼈다. 어릴 적에 보았던 동갑내기 앨버트가 늠름하고 믿음직하게 보였던지, 종친들에게 곧 자신의 결심을 전하고 혼담을 추진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과 함께 왕궁으로 격상되어 지금까지 영국 군주가 상주하고 있는 버킹엄 궁. 동서쪽 별관 등이 증축되어 대정원 무도회장 음악당 미술관 접견실 도서관외에 알현실 19개, 영빈침실 52개, 욕실 78개, 사무실 침실 등 775개의 방을 갖춘 현대식 시설로 거듭났다. ⓒ게티이미지뱅크

앨버트는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결혼 직후에는 지은 지 오래되어 을씨년스럽고 연기 그을음과 곰팡이에 찌든 왕궁을 시종들과 함께 쓸고 닦고 수리할 것은 수리하여 석 달 만에 왕궁다운 왕궁으로 바꿔놓았다. 이 궁전이 지금까지 영국 왕실이 사용해온 버킹엄 궁이다. 현재는 450명의 스태프가 상주하며 해마다 4만여 명의 손님들을 맞고 있다고 한다.

앨버트는 주관이 강하며 영리하고 자존심도 강한 여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해 조언하곤 했다. 여왕 또한 사려 깊고 해박한 앨버트를 신뢰하여 중요한 국사의 논의에 그를 공식적으로 동반하곤 했다. 앨버트는 19세기 중반의 급격한 변화 가운데서 앞을 내다보고 발전적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여왕을 이끌었다. 당시 열강들 사이에 주요 주제였던 흑인노예제 폐지, 의무교육 도입 같은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인 귀족이나 자본가들의 의견에 끌려가지 않고 과감히 진보적 결단을 내린 데에도 사려 깊은 앨버트의 조언이 유효했을 것이다.

1788년 일반적인 영국 노예무역선의 선실 구조. 잡혀온 흑인들이 3단 높이 선반에 층층이 누운 자세로 수용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흑인들은 이런 상태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이나 아메리카까지 ‘운송’되어 노예시장에 공급되었다.
1788년 일반적인 영국 노예무역선의 선실 구조. 잡혀온 흑인들이 3단 높이 선반에 층층이 누운 자세로 수용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흑인들은 이런 상태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이나 아메리카까지 ‘운송’되어 노예시장에 공급되었다.

당시 흑인노예 문제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양쪽에서 첨예한 관심사였다. 18세기 말에 영국의 자본가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사로잡아 유럽과 미 대륙에 파는 노예무역으로 큰 재미를 보고 있었다. 수백 척의 무역선이 만들어지고 노예무역과 파생무역에서 생산되는 이익은 영국 경제의 5%를 차지할 정도였다.

1786년 ‘노예무역폐지협회’가 설립되고 몇 년에 한 번꼴로 노예무역 금지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었으나 번번이 부결되었다. 그러다가 법안이 영국 하원과 상원을 통과한 것은 1807년이다. 이것은 노예무역의 금지일 뿐 아직 노예제도 자체의 불법화는 아니었다. 노예시장이 있는 한 불법적인 노예사냥과 무역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수년의 세월이 흘러 1833년 영국의회는 노예제도 자체를 불법화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제 대영제국 통치권이 미치는 지구상 1/4 지역에서 적어도 법적으로는 더 이상 노예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영향은 프랑스(1848년, 의회 결의), 미국(1863년, 노예해방선언), 브라질(1888년, 노예해방령) 등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은 남북전쟁이 벌어지는 한 가지 동기였다.

아직도 불법적인 노예무역선이 감시의 눈길을 피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빅토리아여왕의 해군은 이들을 해상에서 강력히 단속하기 위해 아프리카 지역에 파견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 사이에 벌어지는 부족간 전쟁이나 노예매매는 열강들이 간섭하여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빅토리아 공주에게 입양된 사라 포브스의 이야기를 크게 보도한 데일리 미러 기사(2017년 12월)

한번은 나이지리아의 해군 주둔지역에서 부족간 전쟁이 벌어져 한 나라가 망하고 부족장의 딸이 죽거나 노예가 될 처지에 빠졌다. 그때 해군 지휘관은 승전국 부족장을 찾아가 그녀를 죽이지 말고 영국 여왕에게 노예로 선물하는 것이 어떠냐고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지휘관은 아프리카 공주인 흑인소녀를 영국으로 데리고 돌아갔다.

빅토리아 여왕은 선물로 받은 아프리카 소녀를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사라 포브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수양딸로 삼았다(1851년). 사라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아프리카인으로 살았다. 이 일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는데, 2000년 무렵 선조의 구전을 확인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한 후손에 의해 사실이 다시 밝혀진 후 매스컴의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평화를 사랑하는 ‘유럽의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중신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자신이 정한 입장에 맞지 않을 때는 단호히 자르는 과단성도 있었다.

중신들은 여왕이 일반 평민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데 자주 놀랐다고 한다. 서민들과 함께 살아본 적이 없는 왕녀가 다수 귀족들이 무시하려고 하는 평민들의 입장을 자주 대변하였기 때문이다. 남편 앨버트의 조언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빅토리아는 사치하고 뻐기기 좋아하는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위선을 꿰뚫어보면서 보편상식을 추구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열린 마인드의 보유자로서 민심을 폭넓게 수용할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1951년 런던 박람회에 맞춰 건립된 수정궁(Crystal Palace)을 가족들과 함께 관람했다. 영국인들은 이때만 해도 드물었던 ‘가족동반 나들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박람회는 남편 앨버타 공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br>
빅토리아 여왕이 1951년 런던 박람회에 맞춰 건립된 수정궁(Crystal Palace)을 가족들과 함께 관람했다. 영국인들은 이때만 해도 드물었던 ‘가족동반 나들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박람회는 남편 앨버타 공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종종 ‘유럽의 할머니’로 불린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대영제국의 군주로서 어머니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과 금슬이 좋아서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들이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결혼하거나 조상의 재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군주가 있는 주요 국가들은 대개 혼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첫째 딸 빅토리아는 프로이센 국왕이자 독일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3세와 결혼하였고, 독일의 평화시대를 일궈낸 빌헬름 2세를 키워냈다. 둘째 딸 엘리스 공주는 독일 헤센공국의 대공이었으며, 자신의 딸을 러시아 황제(니콜라이 2세)에게 시집보냈다. 엘리스의 첫째 딸의 후손 가운데서 애든버러 공작 필립이 태어났다. 지금 엘리자베드 여왕의 남편으로 얼마 전 작고한 필립공이다.

셋째딸 헬레나 공주는 덴마크 왕가와 결혼했고, 막내인 베아트리체 공주는 스페인으로 시집 가 후안 카를로스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 첫째 아들 에드워드 7세가 빅토리아여왕의 뒤를 이어 영국 왕이 되었는데, 그의 딸 중 하나가 노르웨이 왕비가 되었다. 현 여왕인 엘리자베드 2세는 에드워드 2세의 증손녀다.

빅토리아의 둘째 아들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독일 작센부르크고타의 공작이 되었다. 그의 첫째 딸은 루마니아 왕 페르디난트와 결혼했고, 둘째딸은 러시아 왕족과 결혼했다. 러시아 왕실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녀의 남편은 니콜라이 2세를 뒤이어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여왕의 삼남 코넛스트래선 공작은 프로이센 공주와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마거릿 공주가 스웨덴 왕과 결혼하여 구스타프 왕가의 모계가 되었고, 증손녀 중 한 명은 덴마크의 여왕이 되었다. 요약하면,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스페인 등 여러 유럽국들의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 루이스 캐럴이 삽화까지 직접 그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빅토리아시대의 영국 사람들의 게으름과 위선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풍습들을 가장 잘 풍자한 작품으로 꼽힌다.
작가 루이스 캐럴이 삽화까지 직접 그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빅토리아시대의 영국 사람들의 게으름과 위선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풍습들을 가장 잘 풍자한 작품으로 꼽힌다.

그늘과 양지를 함께 흐르는 역사

유럽의 평화시대, 벨 에포크의 시대에 기여했던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를 살펴보았지만, 어느 단면에 불과하다. 모든 일이나 현상에는 양지와 그늘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유럽 열강의 전성기를 위하여 ‘의문의 고난’을 겪어야 했던, 수많은 식민지들, 노예들과 빈국의 농민, 노동자들의 관점에서도 이 역사를 뒤집어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잉글랜드와 마주보면서 끝없는 합병시도와 수탈에 맞서느라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아일랜드의 수난에 대해서도. 특히 빅토리아 치세에 있었던 중국(청)에서의 아편전쟁,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강제수용과 학살사건, 인도에서 벌어진 세포이 탄압 등등에 대해서는 비판할 점도 많이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스토리를 펼쳐나가는 동안 각각의 사건을 좀 더 자세하게 밝혀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Luddites smashing a power loom in 1812 “기계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산업혁명의 반작용으로 19세기 영국에서는 기계파괴 운동(러다이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Luddites smashing a power loom in 1812 “기계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산업혁명의 반작용으로 19세기 영국에서는 기계파괴 운동(러다이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영국 역사에서 여왕들의 역할은 막연히 짐작하기보다 상당히 크고 구체적이었다. 로마를 무너뜨린 오스만제국의 강고한 예봉을 꺾은 것은 16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였는데, 그런 스페인 해군을 다시 꺾은 것은 영국함대였다. 당시 일개 해적에 불과하던 드레이크 선장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면서 해군 사령관으로 삼는 창의적 발상으로 스페인의 도도한 콧대를 꺾은 영국 군주는 바로 엘리자베드 1세 여왕(1558~1603)이었다. 이때부터 유럽의 해상권은 영국으로 넘어왔고, 세계 각처를 자유롭게 개척하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엘리자베드 2세 영국 여왕은 재위 70년째로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 기록을 갱신했다. 그는 50년대 이후 서구 자유세계의 정신적 지주로 ‘세계의 할머니’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들은 살아있는 역사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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