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론1. 여성 흡연 잔혹사...담배 차별 누가 만들었나?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9.08 11:06
  • 수정 2022.09.1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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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이른바 노예를 갖기 위해 여자와 결혼한다. 여성들은 이름도 없다. 이들은 없는 존재로 치부되며, 이들에게 적용되는 법도 없다.

그녀들의 유일한 친구는 담배 파이프인 것처럼 보인다.

- 조선, 1894년 여름,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 (오스트리아). 조선여행기 중에서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옛날 옛적 호랑이도 담배 먹던 시절은 언제인가? 담배의 원산지 아메리카에는 호랑이가 없으니 한국에 담배가 처음 들어온 때로 어림잡아 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담배가 1618년에 전래하였다고 기록됐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그러나 1614년 조선 최초의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이미 담배가 민간에 퍼져 재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영·정조 시대의 유학자 백규창, 이영옥 등은 담배가 선조 때(1568-1607)부터 있었다고 말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100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담배는 임진왜란 때 왜군 침략자와 함께 들어왔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호랑이도 담배 먹던 시절은 아무리 넉넉잡아도 4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니 허무하기도 하다.

(서울대공원, 담배피우는 아기호랑이. 사진=뉴시스 제공) 

담배와 임경업 장군 

담배가 중국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15세기 유럽의 식민지였던 필리핀과 네덜란드를 통해 중국 남부에서부터 올라왔다는 설인데 이는 중국 북부로까지 전파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명청 전환기 1640년에 임경업 장군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에 나선다. 이때 군량미가 떨어지자 담배를 수레에 싣고 가 비싼 값으로 중국인에게 팔아 군량미를 보충하고 나라에도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한말 간도에 간 조선인이 담배 말리는 사진을 보면, 담배 농사는 중국보다, 조선이 한 수 위였을 것이다. 

임경업 장군과 담배에 관해 웃지 못할 사건도 있다. 1790년 8월 10일, 한양 종로의 한 담배 가게 앞에서 소설 '임경업전'을 낭독하던 한 전기수(사람들을 불러 모아 책 읽어주는 직업)가 살해당한 일이다. 전기수가 '간신 김자점이 충신 임경업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게 만드는' 대목을 들려주는 순간 한 청중이 "네가 김자점이더냐?"라고 분노하며 전기수를 담배써는 칼로 쳐 죽인 사건이다. 그 시절 담뱃가게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목 좋은 장소였다. 그 시절 담뱃가게 아저씨는 부자였다.

(담배가게. 사진=낙안읍성 민속마을 제공) 

양반만이 향유하던 값비싼 약초  

담배가 처음 일본을 통해 들어왔음은 민요 ‘담바귀 타령’만 들어보아도 알 수 있다.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은을 주려 나왔느냐 금이나 주려고 나왔느냐
은도 없고 금도 없고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
저기 저기 저 산 밑에 담바귀 씨를 솔솔 뿌려…

- 담바귀타령

동래와 울산은 왜란 당시 일본군이 장기간 주둔하던 지역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조 때는 담배 한 근의 가격이 은 한 량과 같았다. 소문에는 기막힌 약초라고 하지만 일반 백성은 꿈도 못 꾸었다. 담배는 애초부터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지배계급과 침략당한 봉건 지배계급간의 산물이었다. 

하멜표류기 속 조선의 담배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네덜란드 상인의 배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 해변에 난파됐다. 36명의 생존자 중 ‘하멜’이라는 상인이 쓴 조선에서의 14년간의 기록, ‘하멜표류기’에는 조선의 담배 문화도 언급됐다. 

현재 그들 사이에는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아이들이 네다섯 살 때 이미 이를 배우기 시작하여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 하멜표류기

하멜의 기록은 담배가 조선에 들어오고 50여 년이 지날 즘이었다. 당시 신망규의 글 ‘남초음’에는 열의 여덟이 담배를 피웠다고 쓰여있다. 통계에 근거하지 않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2020년 대한민국 흡연율 20.6%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기산풍속도, 부화랑거. 사진=숭실대 박물관 제공)

남녀노소 없는 초기 담배문화 

하멜의 기록에서 인상적인 것은 ‘남녀노소’라는 문구다. 세 살 외손녀가 '할아버지와 함께 맞담배를 종일 피우면서 단 한번도 담배에 취하지 않았다'는 전설이 우스갯 소리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왕실 밭에 약초로 키워졌던 담배는 조선에서도 처음 약초로 소개 되었지만, 약초를 넘어 기호품으로 대중에게 흡수되는 데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노소에 평등했다는 담배는 어쩌다 상하관계가 철저하고, 여성이 피우면 사회적 경시의 눈초리를 받는 물건이 되었을까? 여러 지방의 민담에 신하가 임금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임금의 곤룡포를 태우는 일이 벌어지면서 그게 일반화되어 부모, 연장자, 상사 앞에서는 담배를 삼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럴듯한 가설이다.

담배에 '계급'이 생기다

실제 담배가 유입된 초기 광해군은 담배를 무척 싫어했다. 광해군에게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된 인조 때는, 조선 최초의 골초 장유가 왕과 정사를 의논하다 담배를 피우자, '장인 김상용이 왕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나무랐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효종 무렵에는 불문률로 정립되어 왕 앞에서 흡연은 금기가 되었다.

광해군은 왜 담배를 극혐 했을까? 임진왜란 시절 그토록 미워한 왜놈들이 갖고 온 물건이라 그랬을까?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의 담배는 처음부터 평화 시대 무역이 아닌 전쟁을 통한 침략자의 계급적 산물이었다. 초기에는 양반계급이나 피울 수 있는 귀한 약초로 통용되었고 민중들에게 담배는 얄미운 왜놈과 다를 바 없었다.

(신윤복, 세 기녀의 봄소풍. 사진=간송미술관 제공)

효자 수출품 담배

인조 때 와서야 전국에 담배씨가 빠르게 보급되며 민중들에게도 확산됐다. 호랑이도 담배 먹던 시절은 바로 이때다. 여기서 ‘호랑이도’에 ‘도’라는 보조사에 집중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백성이 차별과 금지의 공포 없이 담배를 맘 편하게 피웠으면 호랑이‘도’ 담배를 피웠을까?

하지만 담배 앞에서 빈부와 반상 남녀의 차별이 없던 태평성대는 길지 않았다. 조선의 담배가 유명해지면서 국가의 효자 수출 품목이 되었다. 중국에 사신이 갈 때면 꼭 조선의 담배와 담뱃대, 부싯돌이 필수 진상품이었다.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조선의 여자들을 다시 돌려받은 것도 담배의 힘이었고 몽골에서 소를 수입하면서 지불한 것도 담배였다. 담배가 돈이 되면서 힘든 건 백성들이었다.

천하에 대적할 짝이 없는 담배가
동방의 진안초와 삼등초라네
토질이 좋아 이익을 독점하니
민생은 갈수록 어렵네
거리와 시장에는 담배 장사가 넘쳐나고
뇌물을 맨 등짐이 끊이지 않네

- 이만영 남령가

진안초는 전라도 진안지역 담배고 삼등초는 평양 인근 삼등 지역 담배다. 담배 재배가 전국화되면서 원조인 동래 담배는 명성이 꺼지고, 이 두 지역의 담배가 최상품이 됐다. 특히 쿠바의 시가처럼 꿀과 술로 재어 놓은 삼등초 상품은 평양감사가 아니면 맛 볼 수 없었다. 서초라 불렸던 삼등초와 남초라 불렸던 진안초는 벼슬아치들의 훌륭한 뇌물이었다.

담배 계급과 예절 

기호품인 담배에 장유유서와 남녀유별의 유교식 도덕 개념이 들어간 것은 담배의 산업화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담배에도 계급이 생기고, 담뱃대에 금과 은을 두르며 사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담배의 규율은 더 엄격해져 갔다. 양반이 길을 지날 때 상놈이 길에서 담뱃대를 물고 있으면 즉결처분받았으며, 심지어 ‘담배 예절’은 남인과 노론, 시파와 벽파 간의 당파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조선시대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무덤 속 공자가 벌떡 일어나 격노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양반집 여인들은 비공개적이나마 담배를 피웠다.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시각장애인 점쟁이가 양반댁 부인의 점을 봐주러 갔다. 부인의 장죽에서 담배 불똥이 떨어져 치마에 옮겨붙는 순간 점쟁이는 “불이야” 소리쳤다. 결국 가짜 시각장애인이었음이 탄로 나 볼기 맞고 쫓겨났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곰방대와 장죽 

장죽을 피운다는 것은 신분이 높음을 나타낸다. 담뱃대가 길수록 담배 맛이 부드러워지지만 담배를 빨기는 힘들다. 담뱃대를 소리내어 빨면 천하다 여겼던 양반의 장죽은 점점 길고 화려해져 갔다. 반면 상놈들은 길이가 짧은 곰방대로 담배를 피웠다.

(곰방대(위)와 장죽(아래). 사진=제주박물관 제공)

할머니는 양반과 동격 

양반이 아니면서도 곰방대가 아닌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두 그룹의 여인이 있었다. 민속놀이 ‘놋다리밟기’는 처녀들이 달밤에 노는 놀이다. 이 위험한(?) 놀이에 동네 남정네들로부터 처녀들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할머니’들이다. 할머니 중에서도 친손주와 외손주를 다 본 할머니는 양반의 자제라도 회초리로 때릴 수 있었다. 그 할머니는 양반과 동격으로 사회에서 인정했기에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할머니’가 담배 피운다고 뭐라 하는 자 없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손주의 머리카락에 담배연기를 뿜어주며 머리가 빨리 영글라고 주문을 외워주었다. 한편의 민화 같은 기억이다. 민화 속에 자주 장죽을 뽑아 물고 있는 여인이 있다. 이 여인은 직업은 무언인가? 조선의 담배전문가 '이옥'은 '담배를 피우는데도 격과 멋이 있다'고 했다. 다섯 가지 멋이 있는데 그중에 '염격(艶格)'이 있다.

어리고 아리따운 미인이 님을 만나 애교를 떨다가 님의 입에서 반도 태우지 않은 은삼통 만화죽을 빼낸다. 재가 비단 치마에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이 뚝뚝 떨어져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앵도 같은 붉은 입술에 바삐 꽂아 물고는 웃으면서 빨아댄다. 이것이 염격(艶格)이다.

- 연경(烟經), 1810, 이 옥

( 양반 노부부가 맞담배 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제공)

기생은 양반과 동격

고울 염(艶)자는 잘 쓰지 않는 문자다. 예가 있다면 연애나 정사에 관한 소문을 염문(艶聞)이라고 한다. 이토록 곱게 담배의 멋을 즐기며 사내의 가슴에 염장(鹽藏)을 지르는 요염(妖艶)한 품격의 여인은 ‘기생’이다. 기생은 조선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녀들은 곰방대가 아니라 자신 보다도 키가 큰 장죽으로 담배를 피웠다. 신분이 높아서가 절대 아니다. 양반들이 자신과 어울리려면 자신들의 격에 맞춰놓는 게 편했을 뿐이다.

기생은 종합예술가였다. 가야금도 타고 춤도 추며 양반과 술 한 잔 비울 사이에 시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감성의 지식인이었다. 사서삼경을 막 떼고 기방에 들어가 함부로 문장을 주고받다간 기생들에게 큰코다쳤다. 황진이도 기생으로 이름 날리던 시절에 담배가 있었다면 그것을 소재로 한 멋진 시 한 편 썼으리라! 안타깝게도 1506년에 태어난 그녀가 살다 떠난 16세기는 유럽에서는 번창했지만, 조선으로는 아직 담배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신윤복, 건곤일회첩 일부. 사진=뉴시스 제공)

춘향이는 십대 흡연자 

그리 보면 춘향전은 17세기 이후의 작품이다. 판소리 군데군데 담배 피우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춘향이가 이도령과 첫날밤을 맞는 날에도 ‘담배’는 어김없이 등장 했다.

청동화로 백탄 불 이글이글 불붙는데 춘향 키는 작고 담뱃대는 길기로 두 무릎 끓어앉아 옥수로 덤뻑 잡고 빠끔빠끔 빠는 대로 입술 새로 파란 연기가 몽기몽기. 항라치마에 아드득 씻어 “도련님 잡수시오.” 도련님이 두 손으로 받더니라.

- 춘향전 고대본

오늘날 어른들이 담배 피우는 여자를 보고 ‘술집 여자’ 같다고 빈정거리는 건 이런 연유였을까? ‘담배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어디보다 심했던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주자학이 기울고 실학이 일어서며 서서히 줄어든다. 하지만 평민 처녀와 부인이 마음껏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시절은 결국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맞았다. 새로운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1805, 신윤복, 연당의 여인.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담배론2.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은 '옛날'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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