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6] 인물관: 알프레드 노벨...인류의 미래에 투자한 ‘차가운 휴머니스트’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09.13 13:38
  • 수정 2022.09.2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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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2월10일 알프레드 노벨의 다섯 번째 기일에 첫 노벨상 시상식
20세기 최강의 폭약 개발 “감히 전쟁 엄두 못 냈으면” 평화 꿈꿔
‘죽음의 상인’ 비아냥에 사후 전 재산 기부로 조용히 대꾸

알프레드 노벨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20세기 인류의 문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주요 코드중 하나는 노벨상이다. 지난 세기 역사와 과학기술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 대다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말 세계 최대의 갑부 중 한 사람인 알프레드 노벨은 죽음을 앞두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그는 한 해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준 사람들에게 상을 주도록 유언을 남겼다. 노벨상은 1901년부터 1, 2차의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물리,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등 다섯 부문에서 공적이 뚜렷한 사람들에게 시상되어 왔다. 1969년부터는 스웨덴중앙은행이 상금을 별도로 제공하는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노벨상은 자연히 매 시대 과학과 문학, 그리고 정치와 경제학의 주요 주제나 이슈를 반영하는, ‘시대정신’의 코드가 된 것이다.

노벨상 재원 9백만 달러… 지금 가치로 몇 십억 달러

노벨이 기부한 유산은 최소 9개 나라에 흩어져 있었다. 그의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는 공장은 20여 개국 93개에 달했다. 재산 및 경영을 관리하는 회사를 지역별로 만들어(세계 최초의 지주회사) 9개 나라에 소재했던 것이다. 그 9개 회사에 가지고 있는 지분을 합산하면, 개인재산은 3천3백만 크로나(스웨덴). 1900년 당시 가치로 약 900만 달러에 달했다. 정확한 환산은 어렵지만, 당시 1달러면 최고 브랜드의 가죽신발을 살 수 있었다. 구두 값을 기준으로 추산하자면, 2천년대 시세로는 최소 10억 달러에서 40~50억 달러가 될 수도 있는 거금이다. 상은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해마다 발생하는 이자만 가지고 운영된다. 1년 치 이자만 해도 당시 웁살라대학의 1년 예산과 맞먹고, 이 이자를 다섯 분야 수상자의 숫자대로 나눈 1인당 상금은 그 무렵 가장 후하다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각종 상금 10년 치를 합한 금액에 해당하였다.

진정한 노벨평화상. 2021년 평화상 수상자인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지난 6월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과 피해아동을 돕기 위해 자신의 메달을 옥션 경매에 내놓았다. 익명의 자산가에게 1억3백50만 달러(약 1천6백억원)에 낙찰됐다. 드미트리는 평화상 수상 후에도 러시아 당국에 의해 테러위협을 받고 있다. <br>
진정한 노벨평화상. 2021년 평화상 수상자인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지난 6월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과 피해아동을 돕기 위해 자신의 메달을 옥션 경매에 내놓았다. 익명의 자산가에게 1억3백50만 달러(약 1천6백억원)에 낙찰됐다. 드미트리는 평화상 수상 후에도 러시아 당국에 의해 테러위협을 받고 있다. 사진=스웨덴 노벨상위원회

노벨의 초상이 담긴 금메달과 함께 수여되는 상금은 당연하게도 세계의 과학자들과 문인들에게 두둑한 격려가 되었다. 이러한 유익의 보장은 인류가 꽤 부유해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인이 받는 상금만 가지고도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 자기 이름을 딴 장학재단이나 새로운 상이나 프로젝트의 기금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2021년 상금을 예로 들면, 분야별로 1천만 크로나(당시 환율로 13억원 정도)가 돌아갔다.

그 뿐 아니다. 그늘에 가려져 개인적으로 조용히 활동하던 연구자라도 노벨상을 받으면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당장 권위를 인정받게 되며, 그의 연구에 대한 사회적 기부도 이어진다. 원하는 대학이나 연구소에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 각종 강연이나 매스컴에 초대되거나 CF모델이 되어 막대한 부가수익도 따를 수 있다. 그보다는 사회적 존경과 함께 족보에 기록해도 될 만한 명예가 더 큰 유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사회적 ‘공인’이 되면서 스포트라이트에 따르는 부담도 생기겠지만, 그런 부담이 두려워서 노벨상을 거절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금이 많기로 유명한 스웨덴 정부는 노벨상 기금에 대해서도 초기에 세금을 부과했지만, 1946년 국회가 노벨상의 취지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특별법을 통과시켜 이후 일체의 세금 면제하고 있다. 이 조치는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어 대다수 국가에서(대한민국 포함) 노벨상 상금에 대한 세금은 부과하지 않고 있다. 스웨덴 정부가 노벨상을 위하여 특별법을 만든 건 처음 일이 아니다. 당시 인구 3백만 정도이던 스웨덴이 그만큼 노벨상을 국가적 행사로 감당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르웨이 국회가 선정하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언론자유를 위해 활동하는 필리핀(마리아 레싸)과 러시아(드미트리 무라토프)의 독립언론 기자들이 상을 받은 2021년 시상식 장면. 사진=스웨덴 노벨상위원회

시상식은 지난 1백여 년에 걸쳐 하나의 전통을 구축했다. 노벨의 기일인 12월10일마다 그의 모국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리고 상을 수여하는 사람은 스웨덴 국왕이다. 스톡홀름 필하모니가 모차르트나 멘델스존 곡을 연주한다. 시상식장과 연회장은 노벨이 만년에 살았던 이탈리아 화훼도시 산레모에서 기증해온 꽃들로 장식된다. 수상 순서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인데, 평화상만큼은 이웃 나라인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여된다. 노벨이 상의 취지와 함께 수상기관을 유언으로 못박아두었는데, 물리학상과 화학상 그리고 경제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가, 생리학과 의학상은 왕립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가, 문학상은 스웨덴 학술원이, 그리고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의 5인 위원회가 맡는다. 수상자 선정도 해당 기관들이 맡으며, 발표 전까지 심사위원들은 심의내용을 철저한 비밀에 붙인다. 누가 추천을 받았고 누가 유력한지를 개인적으로 귀띔이라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분야의 ‘유력자’로 보아도 될 정도로 비밀은 철저하다.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인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 1927년 솔베이회의에서 양자이론을 두고 격하게 부딪쳤다. 원로인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의 주요이론인 ‘불확정성의 원리’를 공박하며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말하자 젊은 보어는 “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마세요.”라고 맞받아쳤다. 사진은 1925년 동료학자들의 모임에서 촬영된 것이다.

‘노벨’ 5개 국어 능숙했던 전천후 영재 소년

어떤 사람을 말할 때 그에게 붙일 수 있는 대표적 수식어는 대개 한두 가지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어떤 말로 수식해야 좋을지 망설여지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대개 도드라진 특징이 거의 없거나, 너무 많은 특징이 한꺼번에 떠오르거나 둘 중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노벨은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너무 많아서 단순하게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타입에 해당한다. 일단 가장 널리 알려진 대로 발명가라 해두자. 그러나 연구만 알고 사회적 감각은 무딘 전형적 발명가를 떠올린다면 전혀 그와 동떨어진 캐릭터가 되고 만다. 기술용어에는 빠삭하면서 흔한 시 한 구절 아는 게 없는 전형적 ‘이과생’도 그와는 거리가 멀다. 노벨 자신의 자평에 적당한 표현이 있다. “과학 분야에서 산업 분야로 인생 주제를 바꾸는데 성공한 최초의 사람” 과학자로서도 경영자로서도 성공했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가 과학자로서 만든 다이너마이트는, 1876년 가장 강력하고도 안전한 폭발물이란 지위를 확보한 이래 금세기까지 150여 년이나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어 왔다. 광산에서, 도로를 놓거나 터널을 뚫어 철도를 놓는 공사장에서,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지를 만들고 도시의 기반을 닦는 토목공사장에서, 오래된 건물이나 구조물을 제거하는 파쇄공사에서 그의 다이너마이트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수단이다. 189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355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다.

동시에 사업가로서도 성공적이었다. 사업이 성공단계에 올랐을 때,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도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드는 사기꾼이나 브로커들이 많았다. 그는 이에 능숙하게 대처하여 크게 실패 보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과하게 욕심을 부려 일을 망치지도 않았다. 원망을 듣지 않을 만큼 양보하고 과하지 않을 만큼 취했다. 결과적으로 당대 최고의 부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을 보면, 그는 유능한 발명가이자 과학자인 동시에 사업과 경영자로서도 충분히 성공한 사람이었다.

다이나마이트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이 든 노벨의 가죽가방 (박물관)
다이나마이트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이 든 노벨의 가죽가방. 사진=노벨 박물관

그에 관한 평전들을 보면, 노벨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듯한 태도를 지녔다. 인간관계도 그러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매달리는 일도 없이, 냉정한 신사로서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렇게 스마트하고 돈까지 많았음에도 평생 결혼하지도 않았으면서 스캔들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따라서 조심성이 많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상적으로도 진취적이며 자기의식이 확고한 편이었다.

그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까지 하였으나, 아버지 임마누엘이 사업을 위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족을 데려가는 바람에 학교를 일찍 중단해야 했다. 아버지는 1830년대 수에즈운하 건설공사에 폭발물을 납품하여 상당한 돈을 벌었으나 폭약 제조 공장 화재로 재산을 거의 날리고 러시아로 건너갔었다. 다행히 러시아에서는 폭약과 탄피, 수레바퀴 등 여러 가지 군수물자들을 생산하여 군 당국에 납품하게 되어 꽤 돈을 벌고 있었다. 그는 아들 4형제를 위해 유능한 가정교사들을 고용하고, 자식들이 집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자연히 ‘맞춤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알프레드의 형제들은 장차 가업을 이을 과학기술자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빠르게 배울 수가 있었다. 물론 언어와 인문교육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영리했던 알프레드는 책을 좋아했고, 언어 재능이 뛰어났다. 청소년기에 이미 모국어인 스웨덴어 외에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까지 어려움 없이 읽고 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알프레드가 이때부터 ‘국제인’으로서의 소양이 길러진 것이라고들 한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P.B.셸리와 바이런들의 시를 특히 좋아했고, 한참 뒤의 얘기지만, 나중에는 그 스스로 시와 수필, 희곡 같은 문학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치명적 위험’에 도전 ‘다이너마이트’ 발명

다시 청년기로 돌아가면, 알프레드는 1851년(18세)에 스웨덴 기술자 에릭슨을 따라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다. 그가 귀국하던 해 크림전쟁이 벌어져 러시아가 오스만제국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패배하고 만다. 그 여파로 러시아 정부가 노벨가와 맺은 사업계약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아버지는 거의 빈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흑해연안에서 유전개발에 손을 대 진척을 보이자, 아들 형제들은 러시아에 남아 사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젊은 시절의 알프레드 노벨.
젊은 시절의 알프레드 노벨.

셋째 아들 알프레드는 형들과 일을 분담하여 토목과 폭파사업을 이어가기로 하고 러시아를 떠나 스웨덴과 파리로 건너간다. 파리에서는 이탈리아인 화학자 펠루즈 교수의 조수로 근무한다. 일종의 유학인 셈이다.

특히 펠루즈 교수와 일하는 동안 그는 니트로글리세린(NTG)에 대해 알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하는 주요한 동기가 됐다. 수년 전 니트로글리세린을 합성했던 펠르주 교수의 다른 제자 아스카니오 소브레스는 이것이 너무나 폭발성이 커서 다루기가 불가능하다며 연구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난 노벨은 그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위험할 정도로 강력한 폭발물이야말로 바로 그가 찾던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화약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할 만큼 강력했다. 단지 그것을 안전하게 다룰 방법을 찾아내는 게 과제였다. 1863년 고향으로 돌아온 알프레드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정적인 규조토와 혼합하여 위험을 줄이는 방도를 연구하는 한편 폭약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것을 폭파시키기 위한 점화장치도 개발했다. 폭약과 점화장치를 함께 특허를 얻고 ‘노벨의 안전 파우더’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했다.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크뤼멜 등에 회사와 공장을 짓고 특허권 방어를 위해 미국에도 건너갔다. 그러던 중 스톡홀름의 공장에서 큰 폭발사고가 일어났다(1866년). 남동생 에밀을 포함하여 4명의 조수가 10여명의 직공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스톡홀름 당국이 시 경계 안에서의 폭약실험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리자 노벨은 말라렌의 호숫가에 공장을 새로 짓고 물 위에 띄운 바지선 위에서 실험을 계속했다.

어쨌든 연구와 판매사업은 계속되었고, 1876년에는 젤라틴과 같은 물질을 이용해 지금과 같이 작은 막대모양의 폭발물, 다이너마이트를 완성하게 되었다. 강력하면서도 기존의 어떤 폭발물보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폭약이었다.

20세기 무렵은 유럽 어디서나, 그리고 신대륙 어디에서나 대형 개발 사업들이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프랑스 정부와의 갈등으로 파리를 떠나게 되는데.

‘전쟁을 종식시킬 폭발물’을 꿈꾸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공장과 회사를 가지고 있던 알프레드 노벨은 비행기도 없던 그 시절에 각국의 회사와 공장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만은 유독 좋아했다. 시내 말라코프가에 정원과 실험실이 딸린 저택을 마련해두고 파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시(詩)를 좋아했던 노벨은 당대의 문호 빅토르 위고와도 절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연중 대부분의 기간을 ‘여행중’인 노벨을 두고, 위고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방랑자(richest vagabond)’라고 지칭했다. 실제로 그의 국적을 두고 호사가들은 자주 궁금증을 나타냈다.

알프레드 노벨이 사업에 성공한 후 1873년 파리에 구입해 살았던 말라코프가의 맨션(지금은 애비뉴 레이몬드 푸앵카레). 그는 프랑스어에 능숙하고 파리를 사랑했지만, ‘정치적 반역’ 등의 혐의를 받아 이탈리아로 떠나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이 집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95년 가을, 노벨은 이 집에 두 달 동안 머물며 ‘노벨상’의 기초가 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사진=노벨 박물관

태어난 곳은 스웨덴이지만 생애를 통틀어 머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공장과 회사는 20여 나라에 퍼져있었다. 파리에 집을 두고 가장 오래 머물긴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다른 나라에서,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다. 알프레드 노벨은 과연 스스로를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전쟁이 벌어지면 그의 폭약은 이쪽도 저쪽도 다 사용하고 있는데(이를테면 1870년 프랑스-프러시아전쟁에서 양측은 모두 노벨의 폭약을 사용했다), 과연 그는 누구의 편일까.

사실 노벨에게도 이 ‘전쟁’의 문제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각국에 퍼져있는 회사나 공장들에 대해 그는 대부분 소유권을 갖지 않고 지분만 갖는 형태였다. 게다가 어느 나라 군대든 자국 내 공장에서 폭약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공장이 전시 국가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청군과 백군 모두가 같은 폭약을 무기로 사용하더라도 노벨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인류의 유익을 위해 개발한 발명품이 사람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하는 살상무기로 사용되는 데 대하여 인간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1885년 뉴욕을 위한 암초폭파 기록사진. 당시 뉴욕의 이스트 강 구간은 ‘홍수바위(Flood rock)’ 또는 ‘지옥의 문’이라 불리는 거대한 암초 때문에 해마다 1천대 이상의 선박이 손상을 입거나 좌초 또는 침몰되었다. 연방 육군이 뉴욕시의 요청을 받고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5천 파운드와 기타 혼합폭발물 28만 파운드를 이용해 폭파하였다. 이 폭발은 60년 후 최초의 원자폭탄 폭발 때까지 지상최대 규모의 인공폭발이었다. 이 폭파 후 40년만에 뉴욕은 런던을 추월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사진=노벨 박물관

그는 전쟁의 문제에 관하여, 평생을 친구처럼 서신교환을 하며 지냈던 전 비서 바레타 폰 시트너(폰 주트너 백작부인)에게, 그리고 자신의 다른 몇 개의 메모에서, 일관된 희망을 피력한 바 있다.

“전쟁을 없앨 만큼 강력한 폭발물을 만들고 싶다. 한번 사용해본 뒤로는 감히 다시 사용할 용기를 낼 수 없을 정도의 폭발물을 만든다면, 그래서 이것을 각국이 보유하게 된다면, 누구도 감히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전쟁 억지력이 될 만큼 강한 폭탄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다이너마이트는 그 정도까지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뒤에 그가 의도한 바와 같이 ‘전쟁 억지력’이 될 만한 큰 위력의 폭탄이 실제로 등장하였으니 바로 핵폭탄이다. 역사상 딱 한 번 그것을 사용해본 인류는, 이후 많은 나라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다시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덕분에 20세기 후반부터는 국제적 전면전이 억제돼 왔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바로 노벨의 또 다른 발명품 ‘노벨상’에 의해 고무된 과학자들이었다. 간접적으로나마 뜻을 이룬 셈이 아닐까.

유럽연합(EU)이 전 유럽의 화합에 기여한 공으로 수상한 2012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축하공연을 진행하는 사라 제시카 파커. 사진=스웨덴 노벨상위원회

꽃의 휴양지 산레모에서 안식하다

1889년 그가 살고 있던 프랑스가 노벨의 새로운 상품(폭발물) 구매를 거절한 직후, 이웃 이탈리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노벨의 물건을 사들였다. 그의 기술적 업적을 시기하던 프랑스 기술자와 매스컴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노벨을 반역자로 몰아세웠다. 예나 이제나 조작된 여론과 선동은 생각보다 힘이 강한 법이다. 그는 마치 ‘간첩’이라도 되는 것처럼 압수수색과 투옥 위협 등 곤경을 당한 끝에 20년 동안 시민처럼 살았던 파리를 떠나야 했다.

1891년. 그는 압수되지 않은 장비들과 어머니의 초상화를 싸들고 지중해의 휴양도시 산레모로 내려갔다. 사철 꽃이 많이 피는 이탈리아의 휴양지다. 그의 나이도 이제 60대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몸과 정신은 지치고 병들어 있었다.

노벨은 가는 곳마다 비슷한 구조의 작업장을 마련하곤 했는데, 산레모에도 방 세 개가 길게 연결된 건물을 하나 지었다. 하나는 고압 전기가 들어오는 기계연구실, 하나는 화학실험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서재(도서실)다. 이번에는 폭발실험이나 기계실험보다도 고무를 활용하는 화학실험이 늘었다. 니트로셀룰로즈 등을 이용해 인공원사와 인조실크를 뽑아내고 인조가죽이나 인조섬유 소재들도 개발했다. 산레모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얼마나 더 신기한 물질과 (비폭력적) 제품들이 나왔을까. 하지만 그의 시간은 이미 지나쳐가고 있었다. 이 연구들 역시 그의 ‘노벨상 군단’을 통해 확장되어 왔다.

한편으로 중단했던 글쓰기를 계속했다. 여러 편의 문학적인 짧은 글을 영어로 쓰는가 하면, 그가 존경했던 셸리의 시극 ‘첸치’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분명한 문제적 희곡 <NEMESIS>를 완성했다. 이 희곡의 인쇄물은 그의 사후 가족들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고 단 3부만이 보존되었는데, 2005년이 되어서야 스웨덴의 한 극단에 의해 딱 한번 무대에 올려졌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증권거래소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노벨상박물관. 사진=노벨 박물관

이런 ‘전설’도 있다. 알프레드 노벨이 파리에 살고 있을 때 한번은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지중해변에서 휴양 중이던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었는데, 파리의 한 신문이 그를 알프레드 노벨로 오인하고 “죽음의 상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대서특필했다는 것이다. ‘죽음의 상인’이라는 칭호가 노벨에게 충격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인류와 인류평화를 위해 무언가 보상할 일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전 재산 기부를 통한 노벨상 제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전설적이며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나, 기사 사진이나 기록 같은 증거는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그가 ‘인류를 위해 가장 큰 공적을 남긴 사람들을 시상하도록’ 전 재산을 사회에 남겨준 것은 현실이다. 1895년 파리의 집으로 돌아가 유서를 작성하여 친구들에게 맡기고 나서 고향 스톡홀름에 갔다가 다시 산레모 휴양지로 돌아온 뒤 그는 숨을 거뒀다. 1896년 12월10일, 향년 64세였다.

이탈리아 산레모의 별장. 알프레드 노벨이 숨질 때까지 살았던 곳으로 곧 매각되었으나, 60년 전 시가 다시 구입하여 ‘빌라 노벨’로 명명하고 노벨 기념사업에 활용하고 있다. 사진=노벨 박물관 

그의 유언은 놀란 가족들과 시상식을 맡아주도록 유언된 스웨덴의 과학아카데미, 프랑스와 스웨덴, 그리고 그의 유산이 남아있는 여러 나라의 세무당국 등 많은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왈가왈부가 오가다가 스웨덴 국왕의 특명으로사태가 정리되기까지 4년이나 걸렸다. 1900년 노벨재단과 노벨상위원회가 탄생되고 시상식장(스톡홀름 콘서트홀)까지 신축하여 시상 준비를 마친 뒤, 1901년 12월10일 알프레드 노벨의 다섯 번째 기일에 첫 번째 노벨상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물리학상을 빌헬름 뢴트겐이, 화학상을 야코뷔스 호프가, 생리학‧의학상을 에밀 폰 베링이, 문학상을 쉴리 프루동이 받았다. 첫 번째 평화상은 적십자운동의 창설자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연맹 설립자인 프랑스 정치가 프레데릭 파시가 공동수상했다. 이후 1999년까지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687명이었다.

노벨이 1895년 11월에 작성한 유언장. 25일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직접 작성하고 이틀 뒤 자주 가던 스웨덴-노르웨이 클럽에서 공개 서명되었다. 원본이 이탈리아 산레모의 빌라노벨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노벨 박물관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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