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7] 과학관: 뢴트겐의 X-레이 1편...장인(匠人)의 후예 물리학자되다
[20세기 스토리박물관7] 과학관: 뢴트겐의 X-레이 1편...장인(匠人)의 후예 물리학자되다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9.20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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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 줄기에서 태어난 왕실가구 장인(匠人)의 후손
억울한 누명 쓰고 유트레히트공예학교서 퇴학
졸업장 없이 받아준 취리히공업대학, 후일 노벨상 30개 명문으로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br>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 사진=뢴트겐박물관)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그의 조상은 대대로 고급가구를 만든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이었고, 외가 쪽은 상업에 능한 사업가들이었다. 프로이센(독일)과 네덜란드가 맞닿은 라인강 하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라인강(Rhine)의 큰 줄기는 스위스 남동부의 알프스의 산 호수에서 시작돼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를 지나고, 독일 서부를 북쪽으로 내달린 뒤 네덜란드 영토를 거쳐 북해로 흘러든다. 하구 건너편에 멀리 브리튼 섬(영국)이 있다. 강의 길이는 한반도 삼천리보다 긴 1,320km. 여기에 각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지류. 모젤강. 넥카강. 뮤제강. 마인강. 다뉴브강 등의 물줄기가 합류하여 명실공히 ‘유럽의 젖줄’을 이룬다. 

뢴트겐의 고향인 독일 Remscheid시에 세워진 뢴트겐 박물관. 생가가 있는 렌네프 마을로부터 <br>
 (뢴트겐의 고향 렌네프가 있는 독일 헤센주의 주도 Remscheid시에 있는 뢴트겐박물관. 사진=뢴트겐박물관)

라인강을 떠난 적 없는 장인(匠人)의 후예

1901년 노벨상 역사에 가장 먼저 수상자로 호명된 사람은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 지금도 인류문명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X-레이의 최초 개발자다.

그가 평생에 걸쳐 살았던 곳들은 우연히도 모두 라인강과 가까웠다. 1845년 독일 헤센주 렌네프(Lennep)마을에서 태어나고 국경 넘어 덴마크의 아펠도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상들은 왕실에 가구를 납품할 정도로 솜씨 좋고 성실한 장인들이었다. 17세에 유트레히트시의 공예학교에 들어갔다가 스위스 취리히로 유학하여 20대를 보냈다. 취리히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스승인 아우구스트 쿤트 교수를 따라 뷔르츠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대학에서 근무했다. 모두 라인강 줄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뷔르츠부르크
(뢴트겐이 절정기에 살았던 뷔르츠부르크 도시 전경. 도심을 지나는 마인강은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라인강으로 합류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알프스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깊고 넓다. 자연환경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깊고 거대하게 흐르는 라인강 주변에서 수많은 과학자가 등장했다. 만약 노벨상의 물리화학상 수상자들의 고향이나 활동무대를 지도에 표시한다면 라인강 줄기를 따라 가장 많은 표시가 남겨질 것이다. 뢴트겐은 그 가운데 선두 주자다.

뢴트겐이 정식으로 대학생이 된 것은 186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였다. 예전에 그는 덴마크 아펠도른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부모를 떠나 공업도시 유트레히트에서 공예학교에 공예학교를 다녔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중등 과정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졸업장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 과정은 겨우 청강생 자격으로 다녀야 했다. 이런 불운이 오히려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을 찾아 취리히까지 가게 되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중고등과정에 해당하는 유트레히트공예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의 경위를 잠시 살펴보자.

졸업을 몇 달 앞둔 2학년 후반기 겨울이었다. 어느 날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이 난롯가에 모여 있었는데, 난로의 검은 방열판 위에 그림 한 장을 걸어놓고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대다수 학생이 싫어하는 교사의 얼굴을 코가 과장된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학생들은 모두 통쾌하게 웃으며 조롱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로 그 교사가 시작종이 올리기도 전에 교실로 들어섰다. 학생들이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마침 복도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던 뢴트겐만은 아직 웃고 있는 모습을 교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 교사는 뢴트겐이 외지에서 온 학생이란 이유로(독일, 어쩌면 유대계일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차별하며 미워하던 사람이었다.

뢴트겐이 청소년기를 보냈던 유트레히트에 설치된 담벼락그림. (2005년, Jackie Sleper)
(뢴트겐이 청소년기를 보냈던 유트레히트에 설치된 담벼락그림. 2005년, ⓒJackie Sleper)

운명의 시험인 듯 꼬이고 꼬인 학창 시절

뢴트겐은 앞으로 불려 나가 추궁당했다.

“네 녀석이 그리지 않았다고? 그럼 누가 그린 것인가, 이름을 대개. 그러면 인정해주지.”

하지만 뢴트겐은 ‘밀고자’가 되기를 거절했다. 교사는 그동안 아주 별렀다는 듯이 뢴트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징계위에 회부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불똥을 피하려고만 했으며, 그림을 그린 당사자는 자기 동료가 무고하게 당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학생은 당시 유트레히트시의 재정적 실력자인 은행장의 아들이었다.

그 교사의 영향력이 컸던 모양이다. 바로 다음 날 아침 임시 교무회의를 요구한 그는 뢴트겐의 퇴학을 강력히 요구하여 관철했다. 공식적인 조사나 최소한 당사자가 소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뢴트겐은 이 학교 교사인 구닝 선생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구닝 선생의 적극적인 구명 노력으로도 이 부당한 결정을 막지 못했다. 구닝 선생은 대신에 출석을 못하더라도 학교 규정상 졸업 구두시험을 통하여 대학 입학 자격을 얻는 방법이 있음을 알려주었고, 뢴트겐의 시험 준비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일은 반드시 꼬이기로 작정 되어 있는 듯했다. 시험 날 하필이면 교장이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고 문제의 교사가 대신 출제관이 되어 뢴트겐 앞에 나타났다. 작정하고 나온 시험관의 판정으로 뢴트겐은 졸업에 실패했다. 자칫하면 아펠도른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직물공장이나 물려받아야 할지 모르는 위기를 맞은 셈이다. 

학교의 통지를 받고 달려온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였지만, 그렇다고 아들이 취한 태도를 꾸짖기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밀고자가 되지 않겠다는’ 태도가 직접 원인이 되었으니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일종의 권력인 학교를 상대로 싸울 힘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버지는 다른 길을 모색해보자는 구닝 선생에게 아들을 맡겨두고 하릴없이 돌아갔다. 즉시 낙향을 모면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Roland zh
(뢴트겐이 졸업한 취리히연방공과대학. ⓒRoland zh)

스무 살 뢴트겐 새로운 목표를 세우다...공예가에서 물리학자로

불행한 사건이지만 실은 뢴트겐이 취리히공업대학에 가게 된 행운에 관한 이야기다.
졸업장을 따지 못한 뢴트겐은 우선 유트레히트대학의 자연과학부에 청강생 자격으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뢴트겐을 돌봐주던 구닝 선생이 암스테르담에 자리를 구해 떠나게 되었다. 의지할 데가 없게 된 뢴트겐의 고민을 학우인 칼 토르만이란 친구가 듣더니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서는 어렵겠지만, 스위스에는 졸업장과 상관없이 입학시험만 통과하면 정식 입학이 되는 대학들이 있다며 취리히에 가볼 것을 권한 것이다. 

뢴트겐은 어둠의 동굴 속에서 빛을 발견한 듯한 기쁨으로 그 즉시 취리히의 대학들을 조사해 취리히공업대학(폴리테크닉 전문학교)을 찾아냈다. 바로 응시원서를 보내고 시험을 준비하였으나 아직 불운은 끝나지 않은 것이었을까. 시험직전 급성결막염이 시작돼 취리히로 떠나지 못하였다. 뢴트겐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사정을 담은 편지를 의사의 진단소견서와 함께 취리히공대의 학장에게 보냈다. 취리히공대의 학사정책은 그 당시에도 이미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모양이다. 학장은 그가 진단서와 함께 보낸 편지를 믿어주고 그의 뛰어난 수학과 화학 성적 등을 인정하여 그를 시험 없이 정규 학생으로 받아주었다. 이 대학이 지금의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이다. 이 대학에서는 이후 아인슈타인, 파울리, 프리츠 하버, 폰 노이만과 같은 쟁쟁한 졸업생들이 나왔다. 노벨상 수상자만도 30명이나 배출되었다.

인생은 가끔 독하게 꼬이기도 하지만, 그걸 길게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만일 뢴트겐에게 유트레히트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길이 순탄하게 열렸다면 그저 솜씨 아까운 한 사람의 장인이나 안정된 지방 사무관 정도의 삶은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세기적 영예와 동시에 전 인류에게 편의를 끼치는 거대한 업적에 도전할 기회가 있었을까.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던 당시 뷔르츠부르크 대학 연구실 모습. (1896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던 당시 뷔르츠부르크 대학 연구실 모습. 1896년. 사진=뢴트겐박물관)

취리히공대에 재학하면서 뢴트겐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첫 번째가 뒤에 결혼하게 되는 ‘안나 베르타 루드비히’였고, 또 한 사람은 평생의 은사가 된 ‘아우구스트 쿤트’ 교수였다. 은사 이야기를 먼저 풀어보자.

취리히공대에 갓 부임한 쿤트 교수는 이제 28세의 젊은 실험물리학자였다. 그의 강의는 참신하고, 과학을 대하는 태도는 엄격하였다. 뢴트겐도 그의 열정적인 강의에 끌려 교수의 연구실을 드나들게 되었는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개인적 진로상담을 받게 되었다. 뢴트겐이 만년에 회고한 장면이다.

“자넨 앞으로 무얼 할 생각인가. 어떤 계획이라도 있나?”하고 교수님이 물었을 때 나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재학 중에 물리학을 이수했는가?”하고 물으셨을 때는 “정말 부끄럽습니다만, 전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그런가?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늦진 않아. 열심히 한다면 따라갈 수 있을 테니 말이야.”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씀하셨습니다.

스무 살이면 거의 누구에게나 인생이 막연하게 느껴질 때다. 뢴트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때라는 말도 된다. 그런 기회 중 하나를 얼마나 분명하게 발견하고 얼마나 확실하게 붙잡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쿤트 교수는 평소 뢴트겐이 기계 조립과 이용을 능숙하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지, 그에게 실험실의 조교로 들어올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뢴트겐은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셈이다. 쿤트 교수의 물리학 실험실에서 그의 타고난 재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험실에 틀어박혀 실험에 몰두하면서 물리학에 재미를 붙였다. 이듬해 뢴트겐은 쿤트 교수의 권고에 따라 스스로 작성한 ‘기체에 관한 연구’ 논문을 이웃 대학인 취리히대학교에 학위 청구논문으로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는 물리학, 화학에 철학 학위가 수여됐다.

두 남자가 뢴트겐의 X선 장비로 자기 손을 살펴보고 있다. 서 있는 사람은 투과하는 빛을 보고 앉은 사람은 감광지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 중이다. X선 발견 초기에는 방사선의 인체 위해성을 알지 못해 이 같은 ‘방사선 체험’이 흔히 이루어졌다. <br>
(두 남자가 뢴트겐의 X선 장비로 자기 손을 살펴보고 있다. 서 있는 사람은 투과하는 빛을 보고 앉은 사람은 감광지를 이용해 사진을 찍는 중이다. X선 발견 초기에는 방사선의 인체 위해성을 알지 못해 이 같은 ‘방사선 체험’이 흔히 이루어졌다. 사진=뢴트겐박물관)

성실하고 엄격한 실험물리학자

그는 성실한 연구자로서 교수의 신뢰를 얻었다. 쿤트 교수가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대학교로 옮길 때 따라가게 되는데, 아직 조수 자격이었다. 쿤트 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에도, 뢴트겐은 교원 자격을 얻지 못했다. 독일대학의 엄격한 제도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지 못한 것이 결격사유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은 그도 즐거웠던 것 같다. 아직 취리히에 남아있던 안나 베르타와 결혼하여 정착하였고, 열정적으로 많은 논문을 썼다. 베르타는 뢴크겐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2년 뒤 쿤트 교수가 스트라스부르크대학으로 옮겨갈 때 뢴트겐도 동행하였다. 얼마 전까지도 프랑스 땅이었던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정식 교수가 될 수 있는 제도상의 차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교원 자격을 취득한 뢴트겐은 쿤트 교수로부터 독립하여 뷔르텔베르크의 작은 농과대학과 스트라스부르크 조교수를 거친 뒤 1876년 34세에 기센대학교 물리학교실 주임교수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독자적인 계획을 세워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워낙 충실하고 깐깐한 반복 실험과 논문으로 뢰트겐은 유럽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성실하고 엄격한 과학자로 소문이 났다. 학계의 인정을 받는 한편 안정적 지위도 얻었으므로 아직 아펠도른에 살고 있던 부모도 가까이 모셔서 왔다.

1888년. 기센대학교에 부임한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던 무렵, 그가 청강생으로 다녔던 유트레히트대학과 신혼생활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한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거의 동시에 초빙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유트레히트대학에 정중한 거절 편지를 쓰고 뷔르츠부르크대학에는 승낙의 답장을 보냈다. 뷔르츠부르크에서 뢴트겐은 베를린대학으로 영전하여 떠나는 쿤트 교수의 뒤를 이어 물리학연구실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있던 뢴트겐의 실험실은 뢴트겐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지금까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사진 ⓒ뢴트겐기념관, 2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있던 뢴트겐의 실험실은 뢴트겐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지금까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사진=뢴트겐박물관)

큐레이터 & 도슨트 = 정해용 기자

2편 보기 : 뢴트겐의 X-레이...미지의 빛, 인간을 투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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