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7] 과학관: 뢴트겐의 X-레이 2편...미지의 빛, 인간을 투시하다
[20세기 스토리박물관7] 과학관: 뢴트겐의 X-레이 2편...미지의 빛, 인간을 투시하다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09.21 10: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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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선이 공개된 이후 상당기간 인체 뿐 아니라 다양한 동물과 사물에 대한 엑스선 촬영이 붐을 이루었다. 1896년 촬영된 물고기. 사진=메트로폴리탄미술관)

미지의 빛 'X'를 보다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95년 11월 8일 금요일. 음극선관을 통하여 전자와 빛의 작용을 연구하고 있던 뢴트겐은 완벽하게 마분지로 둘러싼 음극선관으로부터 알 수 없는 빛이 나와서 어둠 속의 감광지에 형광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했다. 종이를 뚫고 나오는 빛.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백금시안화바륨을 바른 감광지에 분명히 반응을 일으키는 광선. 뢴트겐은 이를 무심히 넘기지 않고 실험과 관찰을 거듭하였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우선은 X라고 이름을 붙여두자.’ 수학에서 미지의 수에 대하여 임시로 붙이는 명칭이 X다. 위대한 X-선(광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뢴트겐기념관에 재현된 연구실 모습. 사진=뢴트겐기념관)

뢴트겐은 아무에게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7주 동안이나 실험실에 틀어박혀 X-선의 성질을 연구하며 확인하였다. 과학적 정의는 ‘언제 누가 시도하더라도, 같은 조건에서 같은 방법이라면 항시 똑같은 결과가 나올 때’ 내려질 수 있다. 수십 번을 같은 방법으로 시도하고 조건을 바꾸어 시도한 실험 결과에 대하여 충분히 과학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뢴트겐은 드디어 부인 베르타를 자신의 실험실로 초청하였다.

12월 22일. 그동안 사람이 달라진 듯 말없이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남편을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엇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실험을 위해 외부의 빛을 차단하느라 창문까지 틀어막고 몰두했으니 옆에서 보는 사람은 크게 걱정이 되었을 법도 하다. 그녀는 사람들이 ‘뢴트겐이 머리가 돈 것이 아닌가?’ 걱정할 지경이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내가 이번에 발견한 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오. 그래서 어찌 되었건 이른 시일 내에 철저하게 결과를 정리해서 학회에 보고하려는 참이오.”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뭔가 심령술 같은 현상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군요.” “하긴 나도 이 선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착각이 아닌가 했어요. 그러나 어찌 되었건 어두운 방에서 검정 덮개를 씌운 방전관에서 무언가 나와 빛으로 작용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니 정체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때 뢴트겐이 역사상 처음으로 인체를 촬영한(정확하게는 막 실험실로 내려온 베르타 부인의 손을 올려놓고 찍은) X-선 사진이 인화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타는 깜짝 놀랐다. “뼈 같은 것이 보이는 이 유령 같은 사진은 무엇인가요.” “바로 이것이 내가 X-선이라 가칭한 광선이 앞으로 가질 실용성이에요. 그 광선의 본질을 규명하려고 여태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요.”

(뢴트겐이 실험실에서 직접 찍은 아내 안나 베르타의 손 사진. 엑스선 실험 중 찍은 최초의 인체사진(1895년 12월 22일)이며, 열흘 뒤(1월1일) 출판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협회 연보와 함께 공개되었다. 사진=뢴트겐박물관)

12월 28일. 뢴트겐은 마침내 정리가 끝난 논문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하여(제1보)’ 원고를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협회 회장에게 보냈다. 마침 연말이어서 인쇄소에 대기 중이던 1986년 신년 연보가 그의 논문을 추가하여 제작되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물적 증거인 손바닥 사진이 있었다.

연보는 1월 1일 발행되었다. 뢴트겐은 자신의 논문만 따로 인쇄된 별쇄본에 몇 장의 X-선 사진을(손바닥 외에도 여러 가지 주변의 사물들을 시험적으로 촬영한) 첨부하여, 새로운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그러했듯, 학계의 중요한 과학자들에게 신년 인사장과 함께 우송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가 부인에게 말했다. “정녕 큰일이 벌어질 거요.”

유럽 과학계, 그리고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혀

1896년 새해를 유럽의 과학자들은 큰 흥분 속에 맞이했다. 그에게서 논문을 직접 받은 학자들마다 축전을 보내왔고, 마침 신년에 열린 베를린 물리학회의 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는 그가 보내온 사진을 전시했다는 소식도 돌아왔다. 학회 참가자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디 프레제’라는 빈의 지방신문이 1면 톱기사로 이를 가장 먼저 보도했다. 1월 5일이었다. 이 기사를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이 본국에 타전하여 이튿날 런던의 신문에도 실렸고, 곧 유럽 각지에서 보도된 것은 물론, 당시 막 보급된 전신기를 통해 미국, 캐나다, 남미, 싱가폴, 호주까지도 전파되었다. 제목은 ‘세상을 놀라게 한 대 발견’과 유사한 것들이었다. 독일 국내에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1월 7일, 베를린에서 1월 8일, 그리고 정작 뢴트겐이 사는 뷔르츠부르크에서는 1월 9일 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1896년 1월 30일 뷔르츠부르크 물리학회 공개시연에서 뢴트겐이 직접 찍은 동료교수 알베르트 쾰리커의 손 사진. 청중들의 환호하고 쾰리커 교수는 즉석에서 ‘뢴트겐선’이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사진=뢴트겐박물관)

처음에 의학과 교수들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사람의 몸속이 들여다보이다니. 너무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를 파악한 외과 주임교수는 긴급히 의사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의료 장비 회사에 요청하여 의료용 X-선 장비 1호기를 서둘러 완성케 하였다.

(엑스레이를 발생시키기 위한 1900년 무렵의 유리 진공관 라인업. 1908년 미국 뉴욕 Kny-Scheerer Company의 제품 부로시어에 실린 그림이다. 사진= Open Knowledge Commons and Harvard Medical School)
(소형화된 변압기를 탑재해 이동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엑스선 촬영기. 1912년 제임스 메디슨 마틴 제품이다. 이 무렵 X-레이는 일반 외과는 물론 안과,  치과 등에서 진단 뿐 아니라 방사선치료까지 의료계에서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진=Open Knowledge Commons and Harvard Medical School)

3월 3일 뷜츠부르크대학은 그에게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논문을 공개한 후 찬사뿐 아니라 걱정, 우려, 동시에 비난까지 받았다. 언론과 대중의 숱한 입방아에 시달려 뢴트겐은 심신이 지쳐있었지만, 이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적어도 같은 대학 동료들에게서 인정과 환대는 안도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 뢴트겐 가족이 식사하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밴드 소리가 들려왔다. 숙제하고 있던 양녀 베르테리가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가족들이 다가오는 밴드를 보기 위해 창가에 모였을 때 군중들의 모습은 분명해졌다. 색색의 모자와 리본, 소나무 횃불을 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점점 밝게 다가왔다. 뢴트겐 가족은 그들의 만세 함성과 손에 든 플래카드를 눈앞에서 보았다. 이것이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학생회가 기획한 축하 행진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마칭밴드를 앞세워 시내의 왕궁 광장을 돌고 곧장 뢴트겐의 자택이 함께 있는 물리학연구실로 행진해온 것이었다.

특허는 공개… 노벨상 최초로 호명된 이름

뢴트겐의 발견에서 출발한 X-선 촬영 기술은 오늘날 외과, 내과, 치과 등 의학, 수의학 분야의 진단과 치료에 널리 이용된다. 그뿐만 아니다. 고고학자들은 발견된 골동품을 일일이 해체하거나 손상하지 않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으며, 공학자들은 건물이나 선박, 항공기, 차량 등의 구조물이나 재료 내부를 X-선 비파괴검사법으로 들여다본다. 군사 우주 분야에서 활용되며, 공항과 항만에서는 화물이나 승객의 보안 검색에도 활용된다. 이제 X-선이 없는 문명 세계란 상상할 수도 없다. 생물학자들이 DNA 나선구조를 발견하는 데에도 X-선 기술이 함께 했다. 예술가들은 오래된 회화나 조형 작품들을 복원할 때 X-선을 이용한다. 나아가 X-선 투시 사진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활용하고 있다.

(공항 항만 등의 화물을 검색에는 X-레이가 사용된지는 아주 오래 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만일 뢴트겐이 이 촬영 기술이나 최소한 기기에 대해서 만이라도 특허권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생시에 이미 노벨이나 록펠러 못지않은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고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기술을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논문 발표 직후부터 받은 찬사나 시비부터가 버겁다고 느꼈던 것 같다. ‘세상을 놀라게 한 대 발견’ 보도가 나간 직후에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2세의 호출을 받고 장비를 들고 베를린까지 가서 어전 브리핑해야 했다.

학회에 새 논문을 발표한 회원의 의무로서 예정되어 있던 공개발표회는 그로부터 열흘 뒤에 열렸다. 회원들은 성원은 뜨거웠다. 특히 뢴트겐이 임시로 ‘X-선’이라 이름 붙인 새로운 광선에 대해 ‘뢴트겐선’으로 부르자는 동료 교수의 제안에 우레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그러나 뢴트겐 자신은 이 명칭을 과찬으로 여겨 사양하였으며, 그 자신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3월 3일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뢴트겐은 1주일 뒤 두 번째 논문인 ‘새로운 선에 관하여(2보)’를 학회에 제출하고 가족여행을 떠났다. 평생 라인강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꽤 길고 먼 일정인 한 달여의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지난 석 달 동안의 소란에서 벗어나 아무런 소문도 없이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차를 타기 위해 뮌헨에 도착했을 때는 신문기자와 대학 관계자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로마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탈리아 물리학자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고 한다.

(뢴트겐이 1901년 받은 노벨물리학상 상장. 노벨상 역사에서 최초로 호명된 수상자다. 사진=뢴트겐박물관)<br>
(뢴트겐이 1901년 받은 노벨물리학상 상장. 노벨상 역사에서 최초로 호명된 수상자다. 사진=뢴트겐박물관)

이후 뢴트겐은 어려서 떠난 고향 렌네프시로부터 ‘명예시민’ 칭호를 받았고, 바이에른 영주가 내리는 보관장은 받았지만, 귀족의 칭호는 사양했다. 베를린과학아카데미, 뮌헨과학아카데미와 게팅겐과학협회, 프랑크푸르트물리학회와 푸르이부르크자연연구학회 등등 많은 학회 협회에서 회원, 명예 회원, 통신회원 등의 명예를 보내왔다. 영국 왕립협회에서 증정하는 람포드상, 빈 아카데미에서 부여하는 바움겔트나상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포상과 1901년 시작된 최초의 노벨상인 물리학상도 받았다.

뢴트겐이 11년간 재직하며 X-선을 발견했던 뷔르츠부르크대학교의 물리학 실험실은 32년 뒤 뢴트겐기념관으로 단장됐다(사진 下). 대학 교정에 세워진 X-레이 기념 조형물(사진 下).
(뢴트겐이 11년간 재직하며 X-선을 발견했던 뷔르츠부르크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X-레이 기념 조형물. 사진=뷔르츠부르크대학교)

영예는 영예, 현실은 현실

살아있을 때뿐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예는 이어지고 있다. 그와 인연이 있는 모든 도시 대학들마다 박물관 기념관이 세워지고 하다못해 하숙집터까지도 기념 명판이 붙거나 조형물이 세워졌다.

각국의 방사선 연구 과학자와 단체들은 ‘뢴트겐학회’라는 이름을 쓰고, 2012년부터는 그가 X-선을 발견했던 11월 8일을 ‘세계방사선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959년 영국남극지명위원회가 남극대륙 팔머군도 파스퇴르반도 인근에 ‘뢴트겐피크’를 명명하였다. 천문학자들은 새로 발견된 소행성에 ‘6401-뢴트겐’이란 이름을 부여하였다. 2004년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은 새로 발견된 111번째 원소에 뢴트게늄(Rg)이란 기호를 부여했다.

논문 발표 직후에는 뢴트겐의 발견이 처음이 아니라는 주장과 시비도 꽤 있었다. 사실 전자파나 음극선 자외선 진공관에서의 방전 효과와 새로운 전자파와 광선들에 대한 실험은 그 무렵 세계 물리학계의 뜨거운 관심사 중 하나였다. 기술적 과정이 몹시 어려운 발명의 문제도 아니었다.

(초기 X-레이 장비. 사진=뢴트겐박물관)

다양한 음극선 실험 도중 뢴트겐처럼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종이나 나무 같은 방해물을 투과하여 방사되는 고주파의 광선’을 우연히 목격한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이 기묘한 빛을 무심히 보아 넘겼거나 나중에 연구해볼 일로 미루어두었다. 뢴트겐처럼 관심을 집중하여 실험하고, 확인하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우연히 그 빛으로 찍힌 사진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의미부여를 못한 학자도 있었다.

그런데 본래 발견이나 발명이라는 게 대개 그렇지 않나. 잠깐이라도 생각해보았거나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집중하여 결실을 거둔 사람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신이나 전구, 엔진 등 발명 등록에 촌각을 다투며 경쟁한 사례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1차 대전 당시 독일군 야전병원 텐트에 설치된 이동식 엑스레이 촬영장비. 사진=뢴트겐박물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뢴트겐의 X-선 촬영장비는 피아 구분 없이 모든 부대의 야전병원에서 부상병 진료에 활발히 이용되었다. 역시 과학기술에는 국적이 없다. 그러나 1918년 독일의 패전으로 전쟁이 막을 내리고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밀어닥치자 뢴트겐의 사정도 궁핍해졌다. 이듬해 병약했던 베르타는 영양까지 부족해진 상태에서 80세의 나이로 먼저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뢴트겐의 부모가 묻혀있는 기센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뢴트겐은 스위스로 건너오라는 지인들의 청을 사양하고 뮌헨에 머물며 어려운 생활을 계속하다가 1923년 사망했다. 향년 78세. 평생 돈이나 권력을 탐내지 않고 실험연구와 교육에만 몰두했던 학자에게 어울릴만한 조용한 죽음이었다.

큐레이터 & 도슨트 = 정해용 기자

1편 기사보기  뢴트겐의 X-레이 ...장인(匠人)의 후예 물리학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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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훈 2022-09-26 02:05:04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