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8] 예술관: 일벌레 예술가 '오귀스트 로댕'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09.27 17:08
  • 수정 2023.02.0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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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뎅초상화  scansione da cartolina
오귀스트 로댕 초상화. ⓒscansione da cartolina

나는 조각을 숲에서 나무들을 바라보며 배웠다.
들판에서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배웠다.
작업실에서 모델들의 몸을 연구하며 배웠다.

… 미술학교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배웠다.

- 오귀스트 로댕

 

travailler, Toujours travailler(일하시오. 계속해서 일하시오).”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일하라’였다. 명사형으로는 ‘작업’이란 뜻이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대작들, 독특한 명작들, 그리고 명성과 영향은 그가 남다른 영감을 발휘한 ‘예술의 대가’임을 증명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제2의 창조자’, ‘조각의 천재’, ‘근대조각의 아버지’, ‘문화권력’ 등의 수식어도 얼마든지 붙일 만하다. 그런데도 그에게 좀 더 인간적으로 근접하여, 가장 걸맞은 수사를 고르자면 ‘일벌레’라는 말이 가장 적당하겠다.

그에게서 대단한 조언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예술적 영감을 어떻게 얻는가를 묻는 젊은 예술학도들에게 로댕이 하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영감이라고? 그런 것은 없네. 오직 작업하고 또 작업하는 것. 예술가의 자격은 오직 인내와 의지를 갖추고 주의 깊게 보고 성실하게 작업하는 것뿐이네.”

‘뜨라바지(travailler=작업)’를 입에 달고 사는 로댕에게서 가장 먼저 감명을 받은 이는 젊은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 25세에 결혼하여 딸이 태어나자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릴케는 ‘로댕 전기’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청탁을 받아들여 파리로 건너왔다. 1902년 <로댕론>을 쓰기 위해 60대 노 작가의 곁에서 1년을 머문 릴케는 자신의 시 쓰기 또한 구름 위를 떠도는 몽환적 상상이 아니라 펜을 들고 손을 움직여 쓰고 다듬기를 거듭하는 ‘작업’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창작과 노동 사이의 경계라는 관념을 벗어난 것이다.    

로뎅. ⓒ게티이미지뱅크<br>
로뎅. ⓒ게티이미지뱅크

미술학교 입학이 거부되다

놀라운 재능의 조각가 로댕이 자기 일에 대해 ‘예술행위’ 아닌 ‘작업’이란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그의 청년기 경험의 결과일 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예술, 특히 조각예술에 뜻을 두고 기초실력을 닦은 뒤에 자신만만하게 상급 예술학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낙방을 거듭했다. 그래서 ‘예술학도’가 되지 못하고 공예사업가의 ‘직공’으로 밥벌이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조각은 ‘창작수업’으로서가 아니라 ‘돈벌이 아르바이트’로 시작되었다. 직공으로서 하는 조각은 창작이 아닌 생산이고, 회사는 마땅히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의 삶을 짧게 살펴보자. 그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예술을 가르치는 ‘쁘띠 에꼴’에 입학한 것은 14세 때였다.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했는데 그림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상상력보다는 관찰력과 사실적 표현력이 뛰어났던 것 같다.

나폴레옹 3세가 왕정을 다시 시작한 시기였고 예술은 호사스러움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로 흐르는 추세였다.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사실 묘사의 성격을 띤 로댕의 스타일은 당시 예술대학(école) 입시 감독관들의 기호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예술지망생들이 주로 응시하는 에꼴 데 보자르와 그랜드 에꼴에서 모두 떨어졌다. 두어 개의 작품을 더 만들어 다시 응시했어도 역시 거부당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예술가의 길이었기에, 문턱부터 좌절된 로댕으로서는 이제 그 스스로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다행히도 손재주를 가진 청년에게는 꽤 많은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BC 3세기부터, 그러니까 2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파리시는 마침 이 시기에 현대도시화를 위한 도시재개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골목길로 형성된 오래된 도심을 헐어내고 지금과 같은 방사형 현대도시의 틀을 만든 일은 나폴레옹 3세의 ‘황제적 권한’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 바람에 수십만의 시민들이 철거민이 되어 파리 외곽으로 밀려나는 강제력의 사용도 불가피했으니까.

어쨌든 도시 개발에 따른 건설경기 덕분에 새로운 가구나 문틀이나 장식벽돌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도예품들과 정원 장식품 등등 상업적인 조형사업가들은 무척 분주했을 것이다. 똑같은 물건을 빠르게 찍어내는 자동화 기계 같은 것도 거의 없던 시절이다. 손이 빠르고 젊은 직원들은 계속 필요했다. 더구나 로댕처럼 재능과 기본기가 갖춰진 조수들이 있으면 귀족이나 부르주아인 신흥 부자들을 상대로 값비싼 고급 인테리어 장식을 주문받기에도 유리했다.

예술학교에서 예술학도의 길을 걷는 대신 건축 인테리어 회사에 고용되어, 다소 예술적 감각을 필요로 하긴 하지만 분명 ‘작품’ 아닌 ‘상품’을 만드는 직공으로서의 20여년. 그 시간이 다른 직업예술가들과는 달리 ‘일하고 또 일할 뿐’이라는 그만의 작업 철학과 습성을 길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생활비치고는 넉넉히 벌며 저축도 꽤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예술학교를 낙방한 경험은 그 예민한 17세의 청년에게 상처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 자신의 회고담이다.

“나는 내가 무언가 저급한 일을 하게 됐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85년, 로댕은 프랑스 칼레 시로부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끔찍한 백년 전쟁 동안 칼레의 저명한 시민이었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의 영웅적 행동을 기념하는 조각품 제작을 의뢰받았다. Burghers of Calais statue. ⓒ게티이미지뱅크

격동의 20대, 과감한 사랑, 과감한 창작

예술학도가 아닌 직업 장인으로서의 생활은 그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이름 있는 화가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감만 아니라면 굳이 열등감을 가질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인테리어 업계에서는 나름으로 인정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순탄할 듯 보였던 직공의 생활에도 고비가 왔다. 5년째 되던 해, 하나뿐인 누나가 갑자기 급성 복막염으로 죽고 만 것이다. 부모님이 예술학교 진학을 극구 반대했을 때 동생의 편을 들어 로댕이 반드시 예술적 재능을 꽃피워야 한다고 응원했던 누나였다. 그들은 서로를 지극히 아꼈다. 그랬는데, 로댕이 사랑하는 누나를 위하여 소개해준 남자가 별로 좋은 남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회 초년생이니 사람 보는 눈은 부족했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로댕은 남자 하나 잘못 소개하는 바람에 누나가 불행을 당했다는 생각에 자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악인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더 이상 태연한 척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가톨릭 수도원에 자원하여 들어갔다.

그러나 그를 지도하는 신부들 눈에 로댕은 아무리 보아도 수도자가 아니었다. 너무나 아까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재능을 따라 예술가가 되는 것이 그를 이 세상에 보낸 신의 뜻에도 부합할 것으로만 보였던 모양이다. 로댕이 주임신부 피에르 줄리앙 에이마르 신부(뒤에 가톨릭 성인이 된)를 위하여 흉상을 만든 뒤, 신부는 로댕을 불러 조용히 타일렀다. 신의 뜻에 순종하고, 동생이 예술가로 성공하기를 바랐던 누나의 유지에 보답하고, 또 위선으로 가득 찬 세속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기 위하여 그대는 조각을 계속하라고.
로댕은 설득을 받아들여 다시 직공 일로 돌아갔다. 일하는 한편으로는 이름난 동물조각가 앙투안 루이 바리의 수업에도 참여했다. 동물들의 정교한 운동근육을 관찰하고 만드는 경험이 그의 수련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로댕이 24세에 만나 평생을 함께한 연인 로즈 뵈레의 흉상 ‘미뇽’. ©musée Rodin<br>
로댕이 24세에 만나 평생을 함께한 연인 로즈 뵈레의 흉상 ‘미뇽’. ©musée Rodin

24세 되던 해에(1866년) 로댕은 사랑에 빠진다. 시골에서 올라와 재봉사로 일하던 스무 살의 로즈 뵈레라는 아가씨였다. 서로가 첫눈에 빠졌던지 그들은 곧 뜨겁게 불타올랐다. 수도원에서부터 불붙었던 예술에의 열정, 삶에 대한 도전 정신, 그리고 폭풍 같은 사랑, 이 감정들의 조화 속에 로댕은 담대한 용기를 얻었다. 직공으로 회사에서 일하는 외에 허름한 외양간 하나를 빌려 자기 개인 작업실로 개조하고 틈틈이 조각 작업을 이어 나갔다.

값비싼 직업 모델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반가이 맞아주는 연인이 있었다. 연인은 기꺼이 그를 위하여 모델이 되어주었다. 허름한 작업실 주변에는 또 얼마든지 격의 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이웃들이 있었고, 그 이웃들도 어렵지 않게 모델이 되어주었다. 여기서 젊은 로즈 뵈레를 모델로 한 ‘미뇽’, 이웃집 노인을 모델로 한 ‘코가 부러진 남자’ 등의 작품이 탄생했다.

로댕이 1864년 최초로 출품한 ‘코가 깨진 남자’ 청동상. (L'Homme au nez casse)
24세에 가난한 이웃 노인을 모델삼아 만든 작품으로 파리살롱전에 처음 출품하여 낙선했으나, 11년 후에는 대리석으로 다시 만들어 입상한다. © musée Rodin 

로댕은 그해에 파리 살롱 공모전에 ‘코가 부러진 남자’를 출품하였다. 당시 파리에서 살롱전은 파리 예술을 대표하는 공모전으로 우리로 치면 오랫동안 유일한 예술가 등용문이었던 ‘국전(國展)’에 비할 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파리의 예술계는 자신들만의 스타일에 갇혀 있었다. 살롱전은 로댕을 다시 외면했다.
8년 전 예술학교 실패의 기억이 잠시 스쳐 갔을 터이나, 로댕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것을 실패로 받아들이기보다 살롱전의 한계로 인식한 듯, 살롱이 외면한 작품으로 과감히 자신만의 개인전을 연 것이다.

“나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일할 수 있는 노동자다. 이 거친 손으로 직접 대리석도 다듬고, 석고 반죽도 한다.
나는 미장이로 일하던 시절의 습관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나는 르네상스의 예술가들과 유사하다. 그들은 모두 기술자였지, 으시대는 신사들이 아니었다.”

발자크 기념비는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를 기리기 위해 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조각품이다. 1898년. ⓒ게티이미지뱅크 

괴담을 극복하자 신세계가 열렸다

그에게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스튜디오를 빌려준 사람은 유력한 사업가이자 조각가인 카리에르 벨리즈(1824~1887)였다. 당시 파리에서 건축장식업자들이 호황을 맞고 있다고 하였는데, 예술 조각가인 카리에르는 이 방면에 뛰어들어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고 돈도 많이 번 대표적인 사업가였다. 그가 로댕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다.
로댕은 이후 카리에르 벨리즈를 도와 인테리어 일을 계속했다. 버는 돈으로 석고나 점토, 청동 같은 재료를 사고 작업실을 유지했다.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외양간 작업실로 돌아가 조각수련을 계속했다. 생업과 일의 성격이 비슷하긴 하지만, 엄연한 '주경야독'이다.

1870년 보불(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터졌다. 징집령이 내려져 로댕도 전선으로 나갔지만, 근시 때문에 곧 돌아왔다. 징집보다 큰 문제는 파리에선 큰 공사가 모두 중단되어 생업이 중단된다는 문제였다. 다행히 카리에르가 벨기에 증권거래소 신축건물의 일을 맡게 되어 로댕도 브뤼셀로 따라갔다. 카리에르가 알고 있는 솜씨 좋은 직공들을 다 불러들이자 작은 그룹이 형성됐다. 로댕은 이듬해 로즈 베레까지 브뤼셀에 불러들였다.
증권거래소 공사가 끝나고 카리에르가 파리로 돌아간 뒤에도 로댕은 작업 동료였던 반 라스보르크와 동업으로 그 일을 이어받아 다른 개인 건물들과 아카데미 건물 등의 장식일을 계속했다. 그 사이에 브뤼셀 살롱전에도 응모하여 ‘코가 부러진 남자’를 선보였고, 틈틈이 계속한 조각 작업의 결과물을 가지고 동료들과 함께 전시회도 했다.

공사를 마친 1875년, 로댕은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언젠가 한 번은 직접 가서 봐야만 할 것 같은, 16세기 르네상스 예술의 본고장을 돌아보기에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저축으로 경비도 마련했고, 다시 파리에 돌아가 정착하기 전에 개인적 전환점을 만들 필요도 있었다.

1876년 그는 이탈리아의 로마 나폴리 플로렌스를 돌아보고 볼로냐를 거쳐 베네치아까지 샅샅이 돌아보며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의 유작들에 심취했다. 그 감동을 그대로 안고 돌아와 작업한 대표적 작품이 ‘청동시대’와 ‘세례요한’ 상이었다.

‘청동시대’와 ‘세례요한’.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한 청년모델의 입상을 기본으로 구성된 ‘청동시대는 처음 공개되자 뜻밖의 반응을 불러왔다. 너무나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 같은 모습에 파리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기존 작가들에 부추긴 듯한 괴담이 세간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생생히 잘 만든 게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서 본을 떠서 만들었을 것이다. 예술이 아닌 사기일 뿐이다.’ 그것도 파리 화단의 기득 세력들까지 공격에 가담했을 때, 그 위력은 상당했다. 생사람 잡는다는 말이 이런 데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한순간 매장당할 수도 있는 위기를 잘 받아쳐야만 했다.

그는 실제 모델이었던 청년을 기자들에게 공개하고, 작업과정의 사진을 공개하고, 작업하느라 만들었던 점토상과 형틀까지 실물로 공개하면서 공격에 맞섰다. 이와 함께 새로 작업 중이던 ‘세례자 요한’ 조각상을 키 2미터의 ‘비현실적 크기’로 만들었다. 실제 인체로 본을 뜨지 않고도 생생한 인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재차 증명한 것이다. 

물적 증거를 동반한 직접 해명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자 큰 반전의 결과가 돌아왔다. 그의 조각 과정이 파리와 세계 예술계에 화제가 되면서, 결과적으로 그저 유망할 뿐이던 한 청년 조각가의 이름이 세계 예술계에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1880년 로댕의 두 작품 ‘청동시대’와 ‘세례자 요한’은 파리 살롱전에서 큰 인기를 모으며 입상했다. 당당히 파리의 예술가로 공인된 것이다.

프랑스 문학계의 거장 빅토르 위고가 사망하자 정부는 판테옹(위대한 사람들을 위한 무덤)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울 계획을 세웠으며, 그들은 로댕에게 이 작품을 제작하도록 의뢰했다. 로댕은 위고의 삶을 돌아보며 위고가 망명지인 건지의 암벽 꼭대기에 앉아 있는 신격화된 조각상으로 표현했고, 뒤에서 두 영혼이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옥의 문’과 20년, 명작의 산실

이후 그에게, 많은 작품 의뢰가 밀려들어 왔다. 유명인, 돈이 많은 부호들, 귀족과 왕족들, 귀부인들이 그의 고객이 되어 흉상이나 동상을 의뢰했다. 크고 작은 건축장식들도 맡겨왔고, 조수와 직공들까지 고용해야 했다.

프랑스 문인협회가 의뢰한 발자크 동상이라든지 아직 살아있는 빅토르 위고의 동상, 그리고 1885년 칼레시로부터 의뢰받은 ‘칼레의 시민들’ 등의 작품들은 의뢰인들이 퇴짜를 놓으면서 다시 화제가 되긴 했지만, 왕왕 있을 법한 논란들이다. 이 작품들은 하는 수 없이 로댕의 작업장이나 집 마당에 방치되었지만, 후에 오히려 그의 대표작 목록에 올라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그는 61세였다. 박람회장에 마련된 프랑스예술관에 당연히 초대받았지만, 로댕은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참가를 사양하고 대신 에펠탑 근처 알마광장에서 자신만의 전시관을 따로 열었다. 독립된 파빌리온에 첫 회고전 형식으로 150점이나 되는 작품이 전시됐다. 높이 6미터가 넘는 ‘지옥의 문’ 초기본 석고상도 공개되었다. 이제 그의 이름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로댕을 대표하고 세기적 명작으로 오르내리는 ‘지옥의 문’에 대해서만은 조금 상술할 필요가 있다.

로댕의 지옥의 문. 지금까지 만들어진 청동조형물 7개의 진품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된 조형물이다.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홈피)
로댕의 지옥의 문. 지금까지 만들어진 청동조형물 7개의 진품 가운데 최초의 것은 미국 필라델피아의 로댕미술관을 위해 제작되었다.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본래 이 문(the Gate)은 파리시가 계획한 프랑스장식미술관의 신축을 앞두고 거기에 걸맞을 기념비적인 문을 만들기 위하여 시가 의뢰한 것이었다. 파리에서는 계속된 혁명과 전쟁의 와중에서 감사원이 불타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 폐허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논의가 계속되던 끝에 1880년 시 의회는 예술의 수도 파리에 어울리는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해 살롱전의 수상자이며 적어도 지난 수년 사이 가장 뛰어난 작가로 여겨지는 로댕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문 제작을 위해 계획된 8천 프랑의 예산 가운데 5천 프랑의 선금까지 지급받고 로댕은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13세기 이탈리아 작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편’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의 컨셉을 ‘지옥의 문’으로 정하고 작품을 구상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이 문은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될 수가 없었다. 6년이 지났을 때 파리시는 1900년 만국박람회 유치를 결정하면서 박물관을 건축하기로 한 그 자리에 기차역을 짓기로 한 것이다. 파리 중심부로 바로 들어오는 기차역(오르셰역) 말이다. 당초 계획한 박물관은 루브르의 한쪽을 사용하기로 하였고, 그 바람에 로댕이 만들고 있는 문은 필요치도 않게 되었다. 박물관 공사가 지체되고 있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이제야말로 문 제작을 독촉할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계약을 중단시킨 것은 파리시니까, 아마도 계약금 정산 없이 작가가 알아서 파기해도 좋다는 결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댕은 이미 6년이나 공들인 문을 버리지 않고 여기에 20여년의 시간을 더 소비했다. 완성하지 않아도 되는 문 하나를 가지고 20년 이상을 주무르다니. 하지만 버릴 수도 없이 그의 작품 주제들은 또렷이 이 컨셉에 맞춰져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의 작품활동에 있어서, ‘지옥의 문’은 작품세계의 밑바닥을 이루는 하나의 중심적 메타포였을 수도 있다.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의 형상. 예를 들면 금지된 욕망에 매달리는 불륜 남녀라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에 심장이 타들어 가는 남자라거나, 한때는 미인이었으나 지금은 피골이 상접한 노파라거나, 욕망을 따라 살다 이제는 버린 받은 여인이라거나, 굶주림에 지쳐 자식을 잡아먹는 우골리토 백작이라거나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랑의 도피자, 욕하는 자, 버림받은 자, 버리는 자 등을 로댕은 이 문을 위하여 구상하고 제작했다가 떼어내거나 혹은 변형시켜 다시 만들기도 하면서 200여개나 되는 인물상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그가 평생에 겪은 인간군상의 모습들과도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해도, 평생에 지옥에 던져져 마땅한 일을 한두 번이라도 저지르지 않고 사는 인간은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 모두가, 지옥에 보내기에는 미안한 정도의 선량함과 성실함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러니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어쩌면 종종 그리 느꼈던 건 아닐까. 

지옥의 문에서 탄생하였으나 로댕에 의해(?) 구제되어 별개의 주제로 독립된 작품들이 무수했다. 파리 로댕박물관 입구의 좌우에 떨어져 서 있는 ‘아담’과 ‘이브’도 이 문을 위하여 시작되었던 작품이다. 문의 상단에 서 있는 세 남자(세 혼령), 또 ‘생각하는 사람’ ‘돌아온 남자’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무릎 꿇은 탕녀’ ‘한때는 미인이었던 투구제작자의 아내’ ‘절망’ ‘키스’ 등등. ‘지옥의 문’은 가히 로댕의 명작이 태어나는 출산 베드와도 같았다.

왼쪽 '지옥의 문'이 작업중인 내내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재능있는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오른쪽 파리 로댕박물관의 까미유 끌로델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성숙의 시대’. 끌로델이 로댕을 잃은 심정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사냥꾼들의 화살이 닿을 수 없는 높이까지

로댕은 준비가 철저한 작가였다. ‘지옥의 문’을 구상할 때 처음 일 년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읽으며 많은 스케치를 그리는 데에만 몰두했다. 지옥편에 나오는 8개의 원은 마침 그가 피렌체에서 보았던 산 죠반니세례당의 문을 연상시켰다. 15세기에 유명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만들고 후일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 손색이 없다’고 찬탄했던, 일명 '천국의 문' 말이다. 그 문은 8분할의 천국 그림으로 장식되고 밝은 황금으로 도금까지 돼 있었다. 로댕은 실제로 그와 유사하게 구상한 8분할의 스케치도 남겼다. 

사람이 위대한 업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다. 다른 인간들로부터 저격당할 위험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냥 본능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맹목적인 사냥본능은 솟아오르는 것을 무엇이든 사냥하고 싶게 만든다. 반드시 라이벌만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친구, 이웃, 형제조차도 그 사냥꾼이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예술학교 입시에서 거절되었을 때나 첫 살롱전에서 거절되었을 때 이미 암시되었듯이, 그에게는 평생 사냥꾼들이 따라다녔다. 무책임한 매스컴이나 평론가들은 생명력 넘치는 그의 작품에 대하여 사기꾼이란 암시를 던지고, 파리의 판데온 앞에 ‘생각하는 사람’ 석고상을 세워두었을 때는 누군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으며, 제자나 팬을 가장해 그의 자택 정원까지 들어와 작품 조각들을 몰래 집어 가거나 그의 모조품을 만들어 명성을 어지럽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를 시기하는 작가들의 혹평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운명을 원망하며 저항도 해보았으나 한두 번에 그쳤을 뿐 더 이상 운명을 원망하거나 그에 굴복하거나 타협할 길을 찾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그가 솟아오를 때마다 화살을 겨누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를 돌파했다. 화살이 닿지 못할 만큼 더 높이 날아올랐으며, 화살을 겨냥하기 어렵게 더 빨리 날았다. 하찮은 날벌레나 참새들의 기법도 구사했는데, 아무리 사냥해도 다 몰살되지 않을 만큼 많은 작품을 창조하고 또 만들어 불멸의 작품세계를 구축함하고 이를 스스로 지켜냈다.

1887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과 함께 슈발리에 십자군 기사라는 명예 작위를 받았고, 프랑스 살롱전의 심사위원과 위원장을 지냈으며, 뒤에 세계조각가협회 회장도 지냈다. 1908년부터 릴케의 권유로 통째 구입한 호텔비롱(타운하우스)를 작업장으로 사용하다가 건강이 나빠진 이후인 1916년 자신의 모든 작품, 컬렉션들(6천여 점)과 함께 고스란히 국가에 기증했다. 1917년 그가 사망한 후 프랑스 정부는 그와 약속한 대로 넓은 정원이 딸린 이 건물을 로댕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후 그의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함께 조각을 공부하는 세계의 모든 조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17년 1월에 로댕은 그와 50년 넘게 반려해온 로즈 베뢰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로즈는 2주 후에 죽었으며, 10개월 뒤 로댕도 그 뒤를 따랐다. '지옥의 문'은 계속 석고상으로만 남아있다가 1923년 파리에서 로댕전시를 본 미국의 영화사업가 쥴스 마스트바움에 의해 처음으로 청동 캐스팅되었다. 그는 두 개의 문을 주문하여 하나는 자신이 필라델피아에 세우는 로댕미술관에, 다른 하나는 파리의 로댕박물관에 기증했다.   

평생 자신을 따라다닌 어떤 구설이나 트집, 모함으로도 추락시킬 수 없는 불멸의 거인이 되기까지 로댕이 고수한 방침은 이 한 가지였다.
“일하라 계속 일하라.”

큐레이터 & 도슨트 =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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