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 10] 미국관: 마크 트웨인...웃음과 풍자로 인간 탐욕을 꾸짖은 미국 지성
[20세기 스토리박물관 10] 미국관: 마크 트웨인...웃음과 풍자로 인간 탐욕을 꾸짖은 미국 지성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10.1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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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강 추억 토대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작품 남겨
유럽, 남태평양 등 많은 여행기록… 문명의 다양성을 소개
노예 해방·여성 인권에 관심…전쟁과 제국주의에 강한 경고도
72세의 마크 트웨인. 1907년 뉴욕. ⓒA.F. Bradley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미국의 마크 트웨인이 쓴 ‘톰 소여의 모험’을 어린 시절에 한 번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함께 20세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동화 중 하나였다. 아마도 지구상 거의 모든 문명국가에서 번역된 동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다. 문학계에서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소설로 보는 시각도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소설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이라는 책 하나에서 출발했다.” 그렇게 보면 어려서 한번쯤은 그 책을 읽었을 세계의 모든 작가들 또한 마크 트웨인에게 빚을 지고 있다. 

1876년 발행된 <톰소여의 모험> 초판. ⓒDeniv Dagun

버나드 쇼에 맞먹는 사회 비평가

마크 트웨인이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작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마크 트웨인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크 트웨인에 관한 정보의 절반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린 두어 편의 동화가 전부였다면 오늘날 그가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또 그 것으로 성공한 사람이 그 뒤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리도 없다. 마크 트웨인은 그 뒤에도 왕성하게 많은 글을 썼으며 미국 내 오피니언 리더들과 함께 사회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유럽은 물론 호주, 인도, 중동, 지중해와 아프리카를 포함한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여러 권의 여행기도 남겼다. 다만 우리에게 그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마크 트웨인의 생애를 극화한 영화 ‘마크 트웨인의 모험’(1944년 어빙 래퍼 감독, 워너브라더스) 포스터. 프레드릭 마치가 마크 트웨인을 연기했다.

동화작가 외에 그에게 걸맞은 첫 번째 명칭은 ‘사회비평가’ 또는 ‘문명비평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격변하던 19~20세기 전환기에 그는 가장 날카로운 ‘문명비평가’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유럽에서 근대인의(당시 현대인의) 위선과 오만을 날카롭게 비평하던 작가로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가 꼽힌다. 독설가로 유명한 버나드 쇼는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인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사회비판적인 글을 많이 쓰고 강연회도 다녔다. 마크 트웨인이 중년 이후에 쓴 글에도 독설이라 할 만한 풍자와 비판적 문구가 가득하다. 그 또한 미국 내에서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와 위선을 비평하는 몇 개의 지식인 그룹에 참여하였고, 비판적인 글을 쓰거나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마크 트웨인은 문학인보다 저널리스트며 사회비평가에 더 가까운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나다니엘 호손, 허먼 멜빌, 에밀리 디킨슨, 에드거 앨런 포, 워싱턴 어빙, 조금 윗세대로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 월트 휘트먼 등 쟁쟁한 문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문제에 대해 마크 트웨인만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언급으로 줄기차게 비판한 사람은 많지 않다.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써서 노예해방운동에 불을 지핀 스토우 부인을 한 수 위로 꼽을 수 있을까. 그런데 스토우 부인과 마크 트웨인은 하트포드의 한 동네에서 10년 넘게 ‘절친’으로 지낸 이웃 사이였다.

마크 트웨인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자.

15세의 마크 트웨인 1850. ⓒGH_Jones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즈로 

마크 트웨인의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 그는 1835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태어나 여섯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다. 4살이 되었을 때 미주리주 미시시피강변의 해니벌(Hannibal)이라는 소읍으로 이사하여 12살 때까지 살았다. 지금의 세인트루이스 북쪽으로 20km쯤 떨어진 인근 지역이다. 미주리주와 일리노이주의 경계를 이루는 미시시피강이 마을 옆을 흐른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나오는 강변 습지나 동굴 등의 배경이 바로 이곳으로, 그의 생가와 동굴 등은 지금도 문화유산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12세에 법원 서기였던 아버지가 친구의 빚보증으로 재산을 날린 뒤 쓰러져 사망했다. 가계를 돕기 위하여 큰형 오라이언은 세인트루이스에 인쇄공으로 취직하여 떠나갔고 새뮤얼도 학업을 중단한 채 집안일을 돕거나 인쇄공 일을 배웠다. 본래 학교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개구쟁이였으나, 책 읽기는 많이 좋아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공공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많이 읽었다.

말년에 <하퍼스 바자르>란 잡지에 청탁받고 기고한 ‘내 인생의 전환점’이란 글에서 마크 트웨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를 이렇게 회상한다.

마침 그해 여름, 마을에 홍역이 돌아 거의 매일 한 명씩은 아이들이 죽었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들은 전염되지 않도록 집에 갇혀있어야 했다.
난 갇혀 있었다. 내 영혼이 끔찍한 삭막함에 절어있었다. 매일 낮이고 밤이고 별안간 오한이 들며 뼈가지 시려와 몸이 덜덜 떨릴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 걸렸구나. 나도 이제 죽겠지.”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는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난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병에 걸려 삶을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빠져나와 이웃집으로 갔다. 친구가 병에 걸려 누워있는 집이었다. 기회를 틈타 친구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 친구 곁에 누웠다. 친구 엄마가 날 발견해 집으로 돌려보냈고 나는 다시 집에 갇혔다. 하지만 병은 이미 옮았다. 그건 어른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온 마을이 관심을 보이고 걱정하면서 매일 내 소식을 물었다. 다들 내가 죽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열나흘째 되던 날 상황은 사람들의 기대와 어긋나게 진행되어 모두를 실망시켰다. 이것이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왜냐하면, 내 상태가 나아지자 어머니는 날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인쇄소 수습공으로 보냈던 것이다.

친구에게 페인트칠을 대신하게 하는 톰소여.

이 대목은 뒤에 ‘톰 소여의 모험’에도 반영된다. 병에 걸렸다가 깨어나며 ‘내가 죽을까 봐 걱정했죠? 이모’하는 톰에게 폴리 아주머니는 ‘네가 살아날까 봐 걱정했다.’고 대꾸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난 인쇄공이 되었고, 결국 문필가의 길로 이끄는 연쇄의 고리들을 하나씩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목적지가 있기나 한 건지도 몰라 무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오와의 한 도시에 닿아 그곳에서 몇 달간 일했다.
당시 내 흥미를 끈 책들 가운데 아마존에 관한 책이 있었다. 파라(para)라는 곳에서 시작해 마법의 땅을 통과하여 강의 수원인 마데이라까지 올라가는 긴 여정이 맛깔나게 서술되어 있었다. 새와 꽃과 동물이 모두 신기하고 악어와 원숭이가 마치 동물원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사는 낭만의 땅… 나는 아마존강을 따라 상류로 가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랐다. 온 세상에 코카인을 공급하는 장사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신시내티를 경유해 오하이오와 미시시피로 내려갔다. 뉴올리언즈에서 파라로 가는 배를 탈 계획으로.
그런데 뉴올리언즈에서 알아봤더니 파라로 가는 배편은 없다고 했다. 그런 노선이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다고…

코네티컷주 하트포드의 마크트웨인하우스. 마크 트웨인 일가가 17년간 살던 집이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 Makemake, 2005

‘마크 트웨인’을 외치는 선원이 되다

미시시피강은 미 대륙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륙의 젖줄이다. 캐나다와 접경인 이타스카호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6,200km 넘게(서울~부산 거리의 약 15배) 흐른 뒤 남쪽 멕시코만으로 들어간다. 미네소타 아이오와, 미주리, 일리노이, 아칸소, 루이지애나 등 내륙 10여개의 주를 거친다. 대륙 복판을 흐르는 동안 미주리강, 일리노이강, 콜로라도강, 오하이오강, 테네시강, 아칸소강, 레드강 등의 내륙 하천이 모두 미시시피에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미시시피강 증기선. ⓒ게티이미지뱅크

철도가 없던 시절, 이 강은 멀리 멕시코만으로부터 승객과 화물을 내륙까지 실어 나르는 운하로서 원거리교통의 중심 수단이었다.

강의 중간쯤 되는 세인트루이스와 핸니벌에서 어린 새뮤얼 클레멘스는 증기선을 보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키웠다. 마치 바깥 세계로 통하는 길이 철로 하나뿐인 산골마을 아이가 철로를 달려가는 기차 연기를 보며 바깥 세계를 상상하는 것과 똑같은 정경이었을 것이다. 새뮤얼과 친구들은 증기선의 선장들을 존경했고, 선원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마침내 증기선을 타고 바다로 통하는 길목까지 내려온 것은 22세가 되어서였다.

거기서 바닷배를 타고 아마존, 그러니까 남미로 갈 생각이었던 새뮤얼은 꿈이 좌절되고 여비도 다 떨어졌다.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친해졌던 ‘크로스먼 대령호’의 항해사에게 간청하여 조수 자리를 얻었다. 항해사 빅스비는 성질이 불같았다고 한다. 엄격하면서도 치밀해서 일을 할 때는 보통 닥달하는 게 아니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빅스비는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번 내 배를 탄 이상, 일을 다 배우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다.” 엄격한 박스비 덕분에 새뮤얼은 일을 빠르게 일을 배웠다.

이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그는 ‘강(江)을 배웠다’고 표현한다.
물은 계절 따라 시각에 따라 표정이 변하고 움직임이 달라진다. 오전에는 안전했던 곳이 오후에는 위험해지기도 하고, 겨울에는 얕았던 곳이 여름에는 깊어지기도 한다. 이때문에 배마다 수로 안내원을 따로 두고 수시로 강의 수심을 재게 하였는데, 배가 안전하게 지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자 깊이는 되어야 했다. 새뮤얼도 수로안내원부터 시작했다. ‘마크 2’를 의미하는 “마크 트웨인!”은 수로 안내원이 항해사에게 수심의 깊이를 보고하기 위해 외치는 구호 같은 것이었다(그의 필명 ‘마크 트웨인’을 여기서 가져왔다). 새뮤얼은 배를 통해서 하루도 똑같지 않은 강을 배우고, 하루도 똑같지 않은 승객들 즉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도 겪으며 배웠다.

일이 적성에도 잘 맞았던 모양이다. 2년 뒤에는 정식으로 증기선의 선장 면허도 따냈다. 운송량이 꾸준해서 수입도 안정되었으므로 그 사이에 동생 헨리도 데려와 배를 타게 했는데,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정박 중이던 배에서 증기 폭발사고와 함께 화재가 일어나 동생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증기선 일을 잘 수행했고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아마 오래도록 미시시피강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멕시코-미국 전쟁을 그린 석판화(1847년 작).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멕시코인들을 그리고 있다. 미 예일대 서아메리카 문화 컬렉션 퍼블릭 도메인

강을 떠나 서부로, 그가 겪은 남북전쟁과 ‘골드러시’

하지만 마크 트웨인의 회상처럼, 한 사람의 문필가를 만들기 위해 ‘상황’은 또 하나의 고리를 만들어 그를 다른 경로로 가게 만든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진 것이다. 강의 동쪽은 북부, 서쪽은 대체로 남부에 속했다. 증기선이 아무 일도 없는 듯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릴 상황이 아니었다. 항구는 폐쇄되고 선장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자칫하면 남부군에 징집될 수도 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요즘 개념으로 단순히 ‘병역기피’라 보기에는 좀 곤란한 점이 있다. 남부도 북부도 그에게는 똑같은 조국이었다. 남북전쟁의 본래 성격은 흑인노예 제도의 폐지문제와 관련이 있다. 마크 트웨인은 이때까지 노예문제에 대해 그리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굳이 묻는다면 명백하게 반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흑인도 백인과 똑같이 존엄성을 지닌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허클베리 핀’에서 도망쳐온 흑인 노예 짐의 탈출을 단지 인간적 정리에서 도와주는 허크의 모습이 바로 그 시기 마크 트웨인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치 않는 전쟁, 그것도 남부연맹에 속한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노예제도를 고수하려고 싸우는 남부군의 병사가 된다는 것은 끔찍한 상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향을 배반하고 북부군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고향으로 돌아온 새뮤얼은 마을 친구들과 함께 지역 민병대에 가담한다. 모두가 오랜만의 전쟁으로 들떠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차에 혼자서 뒤로 빠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미주리주’ 민병대도 일종의 남부군 계통이겠지만, 대원들 자체가 목적의식은 뚜렷하지 못했다. 그저 '지역방위'라는 막연한 목표만 알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남북군 사이 충돌이 일어나 이 민간 부대 ‘매리언유격대’도 전투에 개입되었다. 새뮤얼이 쏜 총에 적군(?) 하나가(심지어 남부군 병사였다고 한다) 쓰러졌다. 대원들이 환호하며 새뮤얼을 영웅으로 추켜세웠지만, 총에 맞은 적군이 ‘어머니, 아버지’를 외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새뮤얼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고,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종류의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사상’은 이때로부터(직접 사람을 죽여본 순간으로부터) 그의 내면에서 뚜렷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곧 총을 집어던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트포드 마크트웨인 하우스의 1층 거실. ⓒJack E. Boucher, 1995<br>
하트포드 마크트웨인 하우스의 1층 거실. ⓒJack E. Boucher, 1995

마침 새로운 일이 생겼다. 인쇄공으로 시작해 지역 신문까지 발행했던 형 오라이언이 새로 생긴 네바다 주로 떠나게 되었다. 모험심이 왕성하고 영리한 데다 마침 선장 일도 잃게 된 새뮤얼에게, 오라이언은 같이 가기를 청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 미국의 시대배경을 대략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 대륙의 영국 식민지 13개주는 1776년 영국을 향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이를 불허하는 영국 군대와 맞서 8년간의 전쟁을 치른다. 이 와중에 미국의 독립선언에 영향을 받아 시민혁명을 성공시킨 프랑스의 새 정부가 미국 신정부에 빚을 갚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마침 프랑스는 영국의 침략까지 받게 되고 보니 신대륙에서 영국군과 싸우는 미국을 도와줄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결국 프랑스의 중재로 영국과 미국의 대표들이 파리에서 조약을 맺고(파리조약, 1783년)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는다.

1820년 신대륙 동부 13개주에 한정돼 있던 미국은 프랑스가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신대륙 한복판 루이지애나 식민지 전체를 1천500만 달러를 주고 사들인다. 이 땅은 13개주 전체를 합한 면적만큼이나 넓었다.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이 고갈되고 있었다. 땅을 넓히려는 신생 미국과 식민지 '급매'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려는 나폴레옹 프랑스의 필요성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신대륙에는 또 다른 지배국 스페인의 지분이 아직 대륙의 1/3만큼 남아있었다. 바로 멕시코 식민지다. 미국은 서부 태평양으로 통하는 이 지역을 마저 흡수하기 위하여 멕시코를 상대로 몇 차례나 협상을 시도했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멕시코와의 전쟁을 거쳐(1846~1848년) 아래로는 텍사스공화국을 인수하고 위로는 캘리포니아 일대를 헐값에 매입하여 오늘과 같은 본토를 확보한다. 1848년 미국이 캘리포니아 인수의 대가로 멕시코에 지불한 대가는 1천500만 달러였다. 그리 멀리도 아니다. 이 때 새뮤얼 클레멘스는 인쇄소 견습공으로 일하던 13세 소년이었다.  

마크 트웨인이 태어나던 1835년 미 대륙 서부의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 대부분 지역은 아직 스페인령 멕시코에 속해 있었다. 1846년부터 2년에 걸친 멕시코-미국 전쟁을 거쳐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공화국이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뒤 미합중국에 편입되었다. 퍼블릭도메인

다시 20년 뒤 미국은 역시 크림전쟁에서 패배하여 궁핍해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땅을 캘리포니아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720만 달러에 사들인다. 이후에 텍사스로부터는 세계 3대 유전(油田)으로 불리는 텍사스 유전이, 캘리포니아에서는 유전과 함께 금광이, 알래스카로부터는 막대한 유전과 석탄, 철 등 엄청난 가치의 지하자원이 개발되었다. 미국은 부동산 투자로 엄청난 이득을 얻은 나라가 되었다.
게다가 태평양부터 대서양까지 한 덩어리가 된 영토는 외국이 대양을 건너오지 않고는 결코 침략할 수 없는 천혜의 국방환경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이후 미국이 세계 최강의 부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1860년대 미국 최초의 횡단철도 공사. 이 철도는 1869년 5월10일 개통되었다. 퍼블릭도메인

강을 떠나 서부로, 서부를 넘어 세계로

새뮤얼이 오라이언과 함께 진출한 네바다는 캘리포니아와 함께 미국에 인수된 신생 주였다. 동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나 있는 대신 새로 개발되는 금광사업이 활발했다. 새로 건설된 대륙 횡단열차가 광대한 평원을 가로질러 서부를 향했다. 당시 오라이언은 네바다에 새로 들어선 주 정부 서기관으로 발탁되어 간 것이었는데,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새뮤얼은 금광사업에 뛰어들었다. 투자한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이 돈 버는 사업에는 적성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새뮤얼은 고향에서 신문사 일을 하던 경험을 살려 지역의 신문사에 취직했고, 다시 재기발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65년에 신문에 연재한 ‘뜀뛰는 개구리’라는 만필식 산문이 주목받으면서 그는 편집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새뮤얼은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이 하도 거칠어 지면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문사로 쳐들어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심지어 권총을 빼들고 뛰어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짜 이름을 감추고 필명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이 과장된 너스레 같긴 하지만, 필명을 사용하는 게 여러 면에서 이롭긴 했을 것 같다. 우선 작가 이름으로서도 평범한 이름보다는 뭔가 있어보이는 이름이 이로울 게 분명하니까. 
이듬해 ‘세크라멘토 유니언’이라는 잡지사가 하와이에서 일어난 사탕수수밭 사건의 취재를 맡기면서 마크 트웨인의 세계여행은 시작된다. 67년에는 역시 출판사의 비용부담으로 유럽 여행에 나서 여섯 달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왔고, 이를 토대로 ‘철부지의 해외여행기’라는 단행본도 출간하여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마크 트웨인과 결혼하기 전인 1869년 24살의 올리비아 랭던. 퍼블릭도메인 

이후 여행은 마크 트웨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35세가 되던 1870년대 이후 여행에는 아내 올리비아가 대부분 동행하였다. 결혼은 처음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에서 찰스 랭던이라는 청년을 만난 데서 시작된다. 장기간의 항해를 같이하면서 마크 트웨인의 순수성과 기발한 재능을 알아본 랭던은 마크 트웨인에게 여동생 올리비아의 사진을 보여준다.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에 처음부터 반해버린 마크 트웨인은 그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랭던의 초대를 받자 벅찬 가슴을 안고 달려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잘 보이기는 어려웠다. 교양있는 부잣집 고명딸로 곱게 자란 올리비아에게 거친 언행이 몸에 밴 마크 트웨인은 아무래도 낯설었을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장시간 공을 들인 끝에 먼저 그 부모의 마음을 움직여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마크 트웨인은 장난기 많은 언행에 비해 중심이 진지한 사람이었다. 이후 올리비아를 극진히 위하고 또 그녀의 충고에 잘 따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교양인이자 지식인으로 변모해 간다. 결혼 이전과 결혼 이후의 마크 트웨인은 여러면에서 달라진 듯하다. 여러 차례의 해외 취재에도 되도록 아내와 딸들과 동행했으며, 올리비아가 맘에 들어 하지 않으면 몇 번이라도 글을 고쳐 쓸 정도로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아내를 위하다가 뜻하지 않게 발명품도 개발했는데, 당시 뒤로 묶게 되어 있는 헝겁브래지어를 사용하느라 아내가 외출 때마다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궁리를 거듭한 끝에 브래지어 끝을 뒤에서 결착하는 후크를 고안해낸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이 발명 특허를 계기로 발명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패착이었다. 엉뚱하게도 사업(자동식자 기계 발명사업)을 벌이다 그동안 번 돈을 몽땅 날리고 만다. 

1908년 영국잡지 <베니티 페어> 5월13일자에 ‘오늘의 인물’로 선정되어 실린 마크 트웨인 커리커쳐. 작가 레슬리 와드

하트포드의 지성인 그룹, 미국의 정신을 일깨운다

마크 트웨인은 결혼 후 잠시 오대호 주변인 버팔로에 살다가 4년 뒤에 대서양 해안의 하트포드로 이사한다. 이곳은 마크 트웨인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사가 있는 곳으로,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과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도시 보스턴 사이에 위치해 있다. 출판사는 물론 저명한 학자, 작가, 지식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였다. 마크 트웨인 부부는 이곳에 새집을 짓고 1874년부터 1891년까지 17년 동안 살았으며, 일찍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스토우 부인이 바로 이웃에 살았다. 스토우 부인은 스무살 이상 많은 대선배였지만, 서로 사상이 통해서였던지 마크 트웨인의 붙임성이 좋아서였던지 아주 격의 없이 지냈다. 아무 옷이나 입은 채로 찾아가는 것을 민망히 여긴 올리비에가 ‘최소한 넥타이는 매고 방문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런 격식차림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을 것 같기도 하다.

1908년 뤼미에르 형제의 칼라사진 기술로 촬영된 마크트웨인의 칼라사진.
ⓒA. L. Coburn.

보스턴이 가까웠던 만큼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조직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마크 트웨인은 그들의 초대를 받아 새러데이 모닝클럽, 먼데이 이브닝클럽 등 여러 모임에 참석하면서 글을 발표하고 강연초대에도 응했다. 자연히 보스턴과 뉴욕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많은 취재여행과 최고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마크 트웨인은 시야가 더욱 넓어진다.
그 정점은 1898년 그가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미국의 제국주의화를 반대하는 연맹(Anti-Imperialist League of NY)의 설립에 참여한 일이다.

스페인계 멕시코로부터 땅을 획득했던 미국은 끝내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 영토의 지배권을 두고 스페인과 직접 전쟁을 벌여(1898년) 승리를 거두게 된다. 전선은 중미지역 외에 스페인 식민지인 아시아의 괌과 필리핀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미국은 내친김에 괌 섬을 수중에 넣고 필리핀까지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태평양에서의 세력화는 당시 아시아를 통째 지배하려고 시도하던 일본제국과의 갈등 소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1905년 미국의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을 보내 일본과 비밀 협상을 맺게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서로 양해하여 묵인하기로 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고발하는 한국인들의 호소가 당시 서구열강 중심의 국제사회에서 전혀 먹혀들지 않은 배경에는 이 같은 강대국끼리의 밀약이 있었다.

미군은 필리핀에서 스페인을 격파한 후에 본국으로 돌아왔어야 한다.
‘인류를 위한 전쟁’을 빙자하여 결국 석탄항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변질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마크 트웨인은 논설을 통해 테오도어 루스벨트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공화당을 탈퇴했다. ‘노예해방을 주도한 공화당에 찬성해 가입했지만, 이제 제국주의 흉내를 내서 침략전쟁을 벌이는 공화당은 자기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크 트웨인과 함께 안티 임페리얼리스트 리그의 부회장단에 참가한 16명의 인사 중에는 교육사상가 존 듀이, 정치사회학자 펠릭스 아들러, 정치인 칼 슐츠, 전직 대통령 그로버 클리브랜드, 철강재벌 앤드류 카네기를 비롯하여 몇 명의 주지사, 상원의원 정치인들과 스탠포드대 총장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07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마크 트웨인. 퍼블릭도메인

미시시피의 개구쟁이에서 인쇄소 수습공으로, 증기선의 선장으로, 남북전쟁의 유격대원으로, 골드러시의 물결 속에 황금 좇는 탐험가로, 신문기자로, 세계 여행가이자 여행작가, 유머작가, 소설가, 저널리스트를 거쳐 사회비평과 문명비평가로, 그 다이내믹한 마크 트웨인의 생애는 1910년 코네티컷주 레딩에서 막을 내렸다. 그는 1907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 이전에도 이미 예일대에서 명예 문학박사(1901년), 미주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1902년)을 받은 바 있다.

그해 4월에 핼리혜성이 지구에 근접했다. 마크 트웨인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떠날 것을 직감했다. 76년을 주기로 지구에 근접하는 핼리혜성은 새뮤얼 클레멘스가 태어나기 직전에도 지구에 나타났었다. 그 때문에 핼리혜성이 다시 돌아올 때 자신은 떠날 것이라고 예고했었다.

그는 4월을 앞두고 죽을 준비를 마쳤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4월 21일, 많은 벗의 애도 속에 핼리혜성과 함께 지구를 떠났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기자

뉴욕 엘마이라에 있는 마크 트웨인 부부의 무덤 ⓒKenneth C. Zirke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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