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니어] 광고 회사 AE 출신, '남해중'의 인생 이모작...정치는 ‘선한 영향력’이다
[스마트시니어] 광고 회사 AE 출신, '남해중'의 인생 이모작...정치는 ‘선한 영향력’이다
  • 고석배 기자
  • 승인 2022.10.14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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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계단을 오르며 목숨의 밧줄을 생각하다

한 젊은이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칼을 가지고 배를 탔다. 강 한복판에서 실수로 쥐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놀란 이 사람은 얼른 주머니칼을 꺼내서 칼을 빠뜨린 부분의 배 밑바닥에 표시해 놓았다. 배가 언덕에 닿자 배 밑바닥에 표시해 놓은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칼을 찾았으나 칼은 없었다.

- 각주구검(刻舟求劍)

(촬영=고석배 기자)

삶의 계단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인생은 계단을 오르는 일이다. 높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중간에 평평한 공간을 만난다. 어떤 이는 잠시 쉬어가고, 어떤 이는 힘이 넘쳐 계속 오른다. 인생의 계단 어디쯤 청년과 노년을 나누는 기준점이 있을까? 청년과 노년을 나누는 신체적 나이는 모두 다르다. 정신적 나이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아니 애초부터 청년과 노년을 나누는 계단은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생각보다 올라야 할 계단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현실이다. 언제부턴가 생애 설계를 이야기한다. 그동안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뼈 빠지게 달려왔으니 인생 이모작은 좀 여유 있는 직업을 권한다. 보수보다는 사회공헌과 봉사에 중심 두라 말한다. 과연 사회공헌을 위한 직업이란 무엇일까? 찾기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평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광고회사 AE 출신 남해중씨는 인생 이모작으로 평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선택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직종 중의 하나다. ‘정치인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혼자 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정치인이지요. 생활 하나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겠어요. 단지 그것에 대해 '즉자적'이냐 '대자적'이냐 태도가 서로 다를 뿐입니다. 저는 인생 이모작을 대자적으로 선택했을 뿐입니다.

- 남해중

(남해중 사무실에서. 촬영=고석배 기자)

선한 영향력

각주구검(刻舟求劍)한다는 말이 있다. 배에 표시하여 칼을 구한다는 것인데, 칼을 찾고자 한다면 칼이 빠진 물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 강물을 따라 지나가는 배에다가 표시해두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즉자적 삶을 비유하는 대표적 고사성어다. ‘즉자'란 사물이 직접 드러난 현상이나 실체를 가리킨다. 반면 대자는 그 실체를 객관화해 인식하는 행위다. 즉 나만 생각하는 것은 즉자적이고 주위를 생각하는 것은 대자적이다.

남해중씨가 대자적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영동고등학교 시절부터다. 그는 입시 공부보다 신문사 동아리 활동에 빠졌다.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언론자유에 대해 관심을 두기도 했다. 동아일보를 찾아가 동아투위 광고 탄압 사건 때 백지 광고를 직접 찾기도 했다. 비록 고교생이었지만 당시 군사정권의 총보다 펜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자의 꿈을 꾸었다.

무엇보다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기레기라는 단어가 사전에 올라가는 시절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기자는 민중의 목탁이고 정의의 사도였어요. 그래서 대학도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습니다.

- 남해중

(고교 신문반 시절 MBC 취재 후. 사진=남해중 제공)

통닭집 둘째 아들

한때 강남은 영동이라 불렸다. 당시 번화가였던 영등포의 동쪽이란 뜻이다. 번화가의 중심엔 전기구이 영양통닭이 유명했다. 남해중씨는 영양통닭집 둘째 아들이었다. 남 부러운 것 없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 후라이만 싸가도 부러움을 사던 시절 그는 치킨을 먹었다.

어머니의 영양통닭집이 번창하면서 공직에 있던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했다. 하는 사업마다 풀리지 않았다. 결국 가산을 정리하고 영등포를 떠나 동쪽으로 간 곳이 잠실이었다. 연탄을 때던 서민 아파트였다. 그가 입학한 영동고등학교는 강남 최초의 고등학교였다. 아직 8학군이라는 유명세가 붙기 전이었다.

(어린시절, 남해중씨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사진=남해중 제공)

질풍노도의 첫사랑

강남의 집값이 들썩이면서 그는 또 한 번 이사해야 했다. 이번에는 김포공항 근처 변두리 동네였다.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스로 통학했다. 3이 되면서 학교에서는 학부모 진학상담을 했다. 말이 진학상담이지 그때 돈으로 10만 원 정도의 봉투를 준비해야 했다. 촌지도 부담되지만 집안이 기울면서 생계에 바쁜 부모님은 오실 수 없었다.

어느 날, 담임이 학부모 방문을 하지 않은 학생들의 명단을 칠판에 적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불렸다. 친구들 앞에서 부모님이 왜 너에게 그리 관심이 없냐?” 창피를 주었다. 자신에게 창피를 주는 것보다 부모님을 모욕하는 것에 견딜 수 없었다. 학교 교육에 회의가 들었다.

학교는 명예를 세운다고 서울대반 연고대반을 만들어 야간 학습을 시켰다. 학교에 실망하니 공부에 의욕이 없었다. 건성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봄날, 그는 버스 안에서 목련 같은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비 오는 날에도 비를 흠뻑 맞으며 그녀의 길목을 지켰다. 몇 개월을 속앓이하다 집 앞까지 찾아가 힘겹게 고백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학생이 아니었다. 강남 룸살롱에 다니던 연상의 여인이었다.

나비처럼 날아간 첫사랑의 시련은 초등 시절부터 줄곧 반장을 하며 상위권이었던 그의 성적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나마 멀리 빗나가지 않았던 것은 모태신앙 덕이었다. 가톨릭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밴 그의 품성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딜 수 있었다. 그나마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신방과 학생회장 시절 행사장에서. 사진=남해중 제공)

우연한 운명

1984년 영동고등학교는 80명이 넘는 학생을 서울대에 보냈다. 그보다 내신이 좋지 않은 동기들도 연고대에 입학했다. 상대적 박탈감에 그는 대학 시절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며 다시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여름방학에 그는 다니던 성당의 여름캠프를 참여한 뒤 해단식을 명동성당에서 가졌다.

19848월은 유난히 뜨거웠다. 마침 전두환의 매국 방일 반대 시위가 명동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쫓기던 시민들과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숨으면서 순식간에 명동성당이 폐쇄되었다. 그는 졸지에 농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시위에 한번도 참여한 적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농성장에서 한 사람이 나와 시를 낭송했다. 그는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깜짝 놀랐습니다. 시인의 육성으로 울리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찡하니 박혔습니다. 묵직한 무엇인가가 올라오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제 인생을 바꾼 시 한 편이었습니다.

그 시인은 군사독재와 맞서 70, 80년대 풍미하다 39세에 요절한 채광석 시인이었다. 그때 그시는 밧줄을 타며였다. 시 한 편의 감동으로 그는 대학입시 준비를 포기했다. 명문대에 재입학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뜻을 같이했던 대학 동창들과. 촬영=고석배 기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신문기자가 되려고 했던 이유가 선한 영향력을 위해서였다면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학생운동 역시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했다. 철학부터 다시 공부했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헤겔의 즉자대자를 깨달았다. 소극적 학생에서 적극적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졸업 후 그는 광고회사에 들어갔다. 신문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언론은 이미 언론고시가 되었고 춥고 배고픈 직업이 아니라 배부르고 따스한 직업이었다. 마침 선배의 권유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광고에 대한 호기심이 작동했다. 롯데그룹 계열 광고대행사인 대홍기획에 AE로 입사했다.

(리치엔터테인먼트는 남해중의 첫사업이었다. 사진=남해중 제공)

광고쟁이가 되다

AE‘Account Executive’의 약자로 광고대행사와 광고주 사이의 연락 및 기획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이다. 막상 입사하니 생각보다 달랐다. 광고주들이 중국집 배달부 부르듯 했다. AE의 역할이 영업과 기획이라면 영업만 부각되는 풍토였다. 남해중씨는 기획으로 승부했다.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몇 날 밤을 새우며 새로운 기획을 찾아 제안했다.

광고회사는 생명이 짧았다. 40대 초까지 능력을 인정 받은 뒤 회사를 찾아 독립했다. 첫 사업 아이템은 엔터테인먼트였다. 업계에서 떠오르는 다크호스로 주목받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정치 광고를 맡게 됐다.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15대 총선에서 한국 정치 역사상 최초로 TV광고를 방영했다. 그가 기획한 탄핵광고는 유권자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미디어 바람을 일으켰다.

그동안 정치에서 홍보란 이미지광고밖에 없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정책광고는 소홀히 하더라고요. 정치에서 정책 홍보만 제대로 해도 국민들이 희망을 품고 사는데 정책은 없고 공방만 있는 거죠.

(리치엔터테인먼트는 정치광고에 참여해 유권자의 표심을 잡았다. 사진=남해중 제공)

정치인정치 모리배

그는 이종걸 의원의 총선 때 온라인 홍보를 전문가 입장에서 도와주다 선거 후 이종걸 의원의 제안으로 뜻하지 않게 국회의원 비서관이 됐다. 당시 이종걸 의원은 원내대표였다. 그는 원내대표 비서관이라는 제법 끗발 있는 위치에 오르면서 정치라는 별세계를 맛보았다.

안에서 들여다보니 사람들은 정치행정을 혼돈합니다. 정치도 광고와 지향하는 점이 다르지 않더라고요. 정치도 사업입니다. 클라이언트가 광고주에서 국민으로 바뀌었을 뿐. 단지 정치는 사업에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사업에 명분이 없다면 그건 정치인이 아니고 정치 모리배입니다.

-남해중

(성경 낭독, 남해중씨는 가톨릭 모태신앙인이다. 촬영=고석배 기자)

정치에 신비감을 벗기다

그는 원내대표 비서관을 그만두면서 광고 사업에 복귀하지 않고 정치 사업에 뛰어들었다. 청년시절 스스로 약속했던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대자적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2014년 서울시의회에 출마했지만, 당내 예비선거에서 공천받지 못했다. 정치에서도 텃새가 존재해 정치신인이 그 담벼락을 넘기엔 너무 높고 견고했다.

흔히 정치는 마약과 같다고 하잖아요. 이익 때문에 끊지 못하는 겁니다. 알고보니 꿀단지인 거죠. 그 꿀단지를 외부인이 알면 나눠야 할 파이가 줄어듭니다. 신인이 접근을 못 하게 담을 높게 쌓고 비밀도 많아 정치에 대해 신비감만 주는 거죠. 그 신비감을 깨야 정치가 바로 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야 합니다.”

그는 정치의 겉모습보다 속내를 알 필요가 있다며 그것을 알리기 위해 유튜브 남해중TV’를 개설했다. 또 최근에는 맛칼럼리스트 황교익과 생활과 정치를 더 평평하게 대중에 전할 수 있는 유튜브도 준비하고 있다. 황교익은 대학 신방과 선배로서 잼과 함께하는 중앙인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잼을 위한 중앙인 모임. 촬영=고석배 기자)

공부하는 정치인

정치에서 그가 특히 관심 기울이는 분야는 교육과 복지다.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이사회의 병폐는 반복된다는 소신이다. 그는 정치를 하면서 토인비의 "역사적 성공의 반은 죽을지도 모를 위기에서 비롯됐고 역사적 실패의 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됐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가슴에 새겼다. 손바닥으로 역사를 가리려는 국정교과서 추진에 그가 거리에 나와 반대한 이유기도 하다. 그는 복지도 성장이라고 주장한다. 몇 해 전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틈틈이 공부하며 취득했다.

정치인들이 말로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저는 정작 그들부터 공부 좀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공무원들과 보좌관들에게 휘둘리게 되어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기에 영입되어 당선되면 뭐 하나요? 준비 없이 오른 그런 정치인들이 유혹에도 약합니다. 정치야말로 정말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직업입니다. 대형참사가 나죠!

- 남해중

(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반대하며. 사진=남해중 제공)

386 퇴진론

최근 ‘386 퇴진론이 심심찮게 이슈화되고 있다. 그 역시 386세대인 남해중씨의 생각이 궁금했다.

각론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총론에는 반대입니다. 일단 지금 거론 되는 386 정치인은 386의 대표라고 할 수 없습니다. 80년대를 이끈 100만 학도의 극히 일부죠. 그들이 사회 경험이 일천한 상태에서 영입케이스로 정치를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공부하고 역할을 했다면 34선을 하면서 지금쯤 차세대 지도자로 물망에 올랐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죠.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386세대가 담대하게 인생 이모작으로의 정치 참여를 권한다.

386세대는 그동안 사회 각 분야에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흔히 산업화와 민주화 세대라고 하지만 세계 1위 인터넷 강국을 이끈 정보화 1세대 대리, 과장이었고 K-한류 기획안을 결재한 부장 세대였습니다. 그들의 훌륭한 경험을 퇴직과 함께 묻을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국정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386세대 퇴진론이라는 말 자체가 세대 차별적 용어입니다.

(일본 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사진=남해중 제공)

정치는 훌륭한 인생 이모작

그는 정치야 말로 인생의 굴곡을 겪은 다양한 중장년들이 이모작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판검사들만의 인생 이모작이 아닙니다.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가들의 전 직장을 보면 법조계가 압도적입니다. 왜 꽃집사장님, 버스기사, 요양보호사 출신 국회의원은 없는가요? 정치에 환멸을 가지면 우리만 손해입니다. 환멸스러울수록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죠.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하지만, 애완견이 안방에 똥을 쌌으면 치워야지 피할 건가요? 정치야말로 사회 각층의 경륜과 지혜가 필요한 곳입니다.

남해중씨는 꼭 정치가 거창한 게 아니라며 풀뿌리민주주의의 근간인 구의원이나 시의원에 경륜 있고 기존 정치에 때 묻지 않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단지 성급히 출마부터 하지 말고 어떤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충분한 사전 준비 기간을 가질 것을 조언한다.

다 갈아 엎자고 하지만 막상 바꾸려면 쉽지 않습니다. 정치도 전문직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어떤 분야의 전문가였건 정치에 입문하면 수습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때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제게 시대적 소명이 있다면 참신하고 훌륭한 정치 후배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인생 이모작으로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죠. 그러기 위해서라도 제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2022년 마포에서 서울 시의원에 출마하며 어르신들께 몸을 낮춰 인사하는 남해중. 사진=남해중 제공)

계단을 오를수록 용기가 필요하다

남해중씨가 선한 영향력을 펼치겠다고 정치에 첫발을 내디딘 지도 어느덧 12년이 되었다. 홍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시작해 그동안 중앙당 부대변인도 역임했고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정책위부의장이다. 당을 떠나 민주평통 자문위원도 맡고 있고 UN 헤비타트 한국위원회 전문위원이기도 하다. 그동안 서울시 의원으로 두 번의 출마도 했다.

정치인에게 낙선은 가장 힘들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남해중 씨가 힘들때 마다 그의 곁에는 가족이 있었다. 그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남해중씨가 일생에 가장 소중한 선물로 생각하는 것은 크리스마스날 딸이 손수 뜨게질한 목도리다. 어린 줄만 알았던 딸이 아빠와 함께 촛불집회도 나가고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지난 6월 지방 선거엔 명함을 나눠주며 선거운동도 도와 주었다.

(크리스마스에 딸이 선물한 목도리. 사진=남해중 제공)

인생은 계단을 오르는 일이다. 높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중간에 평평한 공간을 만난다. 오르는 자에게는 쉬는 곳이지만 떨어지는 자에게는 낙상 방지를 위한 곳이다. 높은 계단을 오를수록 오르는 것보다 추락하는 것이 더 무섭다. 남해중씨는 두 번의 추락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낙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에겐 정치에 대한 뚜렷한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생계형으로 정치에 도전한다면 낙선 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해서도 안 되고요. 정치는 선출된 권력을 이용해 부의 재분배를 이루는 것이라는 게 제 소신입니다. 권력은 선한 영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미끄러진 계단을 다시 오르면 되지만 목숨을 걸고 밧줄을 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정치하는 동안은 스무 살 대학 시절 명동에서 들었던 밧줄을 타며라는 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남해중

(촬영=고석배 기자)

밧줄을 타며

밧줄을 탄다
히말라야 산맥 우리의 형제와 동료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도봉산 인수봉의 바위벽, 설악산 골짜기의 얼음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 (중략)

목숨을 탄다
민주 민족 민중의 산맥 우리의 선열과 형제들의
목숨을 머금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하여
공장 농촌의 얼음벽 학교의 바위벽
벽을 탄다 기어오른다
하나의 밧줄에 차례로 몸을 엮고 하나의 운명 되어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비지땀을 흘리며
식은땀을 훔치며 목숨을 걸고 한 발 두 발
아우성치는 압제의 손길 내리꽂히는 수탈의 손길을 뚫고
저 꿈에도 못 잊을 원한과 열망의 봉우리
꼭대기에 두 발을 딛고 새 하늘 새 땅을 보기 위하여
외치며 노래하며

민족의 아들딸
밧줄을 탄다 목숨을 탄다
민주주의여
통일이여
질기디질긴 목숨의 밧줄이여

- 채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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