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 11] 과학관: 지그문트 프로이트...과학의 언어로 ‘정신’을 규명한 정신분석학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10.20 11:04
  • 수정 2022.10.2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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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몸 행동의 인과관계 규명하는 새로운 ‘과학’ 창시
꿈, 트라우마, 에고와 이드, 리비도, 우상 등 다양한 주제 탐구
사회학 심리학 의학 문학 인류학 종교학 등에 세기적 이정표
50년 뒤 주목받은 자끄 라깡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주장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퍼블릭도메인

“문명의 발전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아인슈타인과 교감

20세기 최대의 석학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1차 대전이 끝난 후 다시 증대하는 전쟁의 위험을 감지하면서 당대의 덕망 있는 지식인들과 함께 전쟁을 막기 위한 방도를 다각적으로 모색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욕구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증오와 더불어 상대를 전멸시키려는 욕구입니다. 파멸에의 충동은 보통 때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가 특별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얼굴을 내밉니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에 얽힌 복잡한 사연들 밑바닥에 숨어있는 문제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를 인간의 본능에 정통한 전문가의 손을 빌어 풀어내야만 한다고 봅니다.

질문의 요약: 인간의 마음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증오와 파괴라는 마음의 병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아ㅏ.. 앞부분에서 아인슈타인 얼굴도 같이(작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br>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퍼블릭도메인

1932년 7월에 그는 이 편지를 ‘인간의 본능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보냈다. 그 전문가는 바로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오스트리아) 박사였다.

‘인간의 본능을 제어하여 전쟁을 멈추게 하는 방법’. 프로이트에게는 그런 아이디어가 있었을까. 두 달 후에 완성된 그의 답장 요지를 살펴보자.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본능적으로 증오에 이끌려 상대를 멸절시키려는 욕구가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정신분석학자들은 그와 같은 본능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에 대해 최근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중략)
문화가 발전하면 육체적 행동 수준에서도 변화가 촉진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화를 일으킨 것은 궁극적으로 마음과 몸 전체의 변화인 것입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문화가 가져온 현저한 현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성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힘은 본능을 제어합니다. 둘째는 공격본능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화의 발전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마음 본연의 모습, 이것만큼 전쟁과 대립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변화된 (지성적) 인간들은 전쟁에 분노를 느끼고 전쟁을 참기 어렵게 됩니다. 적어도 평화주의자라면 ‘전쟁에 대한 거절반응’이 몸과 마음 깊은 곳에서 용솟음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평화주의자가 될 때까지,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문화의 발전이 낳은 마음 본연의 모습과 미래 전쟁이 가져올 터무니없는 참화에의 불안. 이 두 가지가 가까운 장래에 전쟁을 없애는 방향으로 인간을 움직이게 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 문화의 발전을 촉진하면, 전쟁의 종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들의 편지 내용, 특히 프로이트가 작성한 장문의 답신(에세이 논문)은 그해 9월에 공표되었고, 이후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프로이트 저서 가운데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1938년 10월 독일 나치 정부의 군대가 체코 주데텐란트에 무혈입성하는 것을 강제 동원된 주민들이 비탄 속에 맞이하고 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프로이트 연구의 상당부분은 거짓된 권위와 이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집단 광기'를 해석하는 데 할애되었다.<br>
1938년 10월 독일 나치 정부의 군대가 체코 주데텐란트에 무혈입성하는 것을 강제 동원된 주민들이 비탄 속에 맞이하고 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프로이트 연구의 상당부분은 거짓된 권위와 이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집단 광기'를 해석하는 데 할애되었다. ⓒBundesarchiv, Bild 183-H13160 / CC-BY-SA 3.0

1930년대는 독일에서 히틀러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2차 대전을 일으킨, 숨막히는 긴장의 시간이었다. 히틀러는 나치즘의 깃발을 흔들어 독일인들을 ‘단순한 열정’ 아래 끌어 모으고, 집단의 광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전쟁의 폭탄을 유럽 대륙 한복판에 떨어뜨렸다. 파시즘이 맹아를 드러내던 30년대 초기부터 세계의 지성인들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광기’, 증오와 더불어 상대를 멸절시키려는 본능적 욕구를 어떻게 바로잡거나 억제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흔적을 이 편지는 보여주고 있다.

꿈의 해석책 초판의 표지 (1900년)

세기의 변화를 불러온 '관점의 혁명'

1900년 세상에는 전혀 새로운 과학의 등장을 알리는 책 하나가 등장했다. 제목은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

제목부터가 도저히 학문적 권위를 지녔을 것 같지 않은 이 책은 20세기 인문학과 철학, 사회학과 정신과학의 틀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거대한 학문적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그 저자가 바로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다.

그로부터 100년의 시간이 지나서 얘기지만, 프로이트를 빼놓고는 20세기를 얘기할 수가 없으며, 프로이트가 아니었다면 20세기의 정신세계는 이전 세기와 크게 달라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흔히 ‘현대의 포문을 연 3대 천재’라는 수식어로 소개된다.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의 물꼬를 튼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독일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1844~ 1900)가 나머지 두 사람이다. 여기에 칼 마르크스를 네 번째 인물로 더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윈과 니체가 자연과학과 철학사상에 있어 수천 년간 굳건했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면, 프로이트는 그동안 인간의 몸과 정신 사이에 상호불가침적으로 굳게 드리워 있던 이분법의 장벽을 허물었다.

사실 그들의 이론이 전혀 생소하거나 사상 최초의 생각을 담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많은 학자들이 절대적인 것, 정통적인 과학계의 관점에 종종 도전했고, 곧 물러서거나 흔적만 남긴 채 스스로 논의를 중단하곤 했다. 예를 들어 ‘지구가 둥글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어쩌면 처형될 수도 있는 종교재판을 받고 겨우 관용을 빌어 평생 가택연금을 당했던 것처럼, 기성권위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 사람은 기존 학계와 대중들로부터 비난과 따돌림 심지어 물리적 탄압까지도 당할 위험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혁신이란 뛰어난 천재성도 중요하지만, 자기 스승들과 선조들이 물려준 방법의 권위를 깨뜨리고 고향을 떠날 수 있는 용기, 새로운 것의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만한 뚝심과 지혜로움, 고독해질 각오와 인내심, 도를 넘는 비난과 압력들 앞에서도 버텨낼 수 있는 의지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과연 <꿈의 해석>이 발행되었을 때에도 사회나 학계의 반응은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일어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꿈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거나 신의 계시나 영혼의 체험 같이 신령한 현상일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꿈의 내용을 해석하는 일(해몽)은 무당이나 심령가, 마법사, 성직자 같이 과학과는 거리가 먼 특수한 직업의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이트라는 정신과 의사가 꿈이 생기는 원리를 과학의 언어로 설명하면서 꿈의 내용도 과학적 인과관계를 푸는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과학자의 ‘월권’으로 보였고,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과학에 대한 모독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실제 일어나는 반응들이 그러했다.

처음 학회에 참석하여 이 내용을 발표했을 때 학자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인간의 성스러움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한 일부 학자들은 감정적인 언사로 인신공격을 보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는 정신신경증에 대하여 함께 연구했던 동료학자들조차도 프로이트를 감히 두둔하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공격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887년 정신신경증 치료에 사용된 최면술 공개시연 치료 장면(Andre Brouillet 그림). 프로이트도 의학박사 취득 후 빠리로 건너가 장 마르탱 사르코 교수의 최면치료 강의에 참석했다. 이후 독자적으로 최면암시요법을 자주 사용했지만, 1년 후에는 굳이 최면을 사용하지 않고도 기억 되살리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유연상 (대화)기법’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꿈’이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정신세계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적 욕구의 실체를 규명하려 하였다.
무의식, 자아와 초자아, 에로스(生)를 향한 열망과 타나토스(死)에 대한 저항, 리비도와 억압, 왜곡과 전이 등의 방어기제 등의 개념들을 동원하여, 꿈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꿈의 분석을 통하여 꿈이 대리 표현한 내면의 실제 문제를 파악하여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이자 동기였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의식은 세 개의 얼굴(층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으로 욕망을 가진 원초적 자아(원초아=이드)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현실에서 이 욕망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본능적 욕망은 대개 억제되어 있다. 그 억제를 행사하는 자아는 일반적으로 ‘나’(I=에고)라고 말하는 자기 자신이다. 그 위에 어떤 도덕적 당위나 신념 따위로 내가 의무감을 가지고 복종하려는 대상인 초자아(super-ego)가 있다.
보통 현실에서는 이 셋 사이의 타협과 절충에 의하여 에고가 사회적 자아로 행동하지만, 여러가지 사회적 개인적 규율이나 제약 때문에 평소 드러내지 못하고 내면에 잠복된 원초적 자아의 욕망, 그리고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도록 요구하는 초자아의 명령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불쑥 강화되어 표면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것은 세 얼굴들의 안정적인 타협상태가 균형을 잃는 경우와 관계가 있다.

영국 골더스그린 유대인묘원(납골묘원)에 있는 프로이트 가족의 납골당. 한 가운데 표지석 위에 프로이트의 납골함이 놓여있다.<br>cc-by-sa/2.0 ©andy dolman – geograph.org.uk<br>
영국 골더스그린 유대인묘원(납골묘원)에 있는 프로이트 가족의 납골당. 한 가운데 표지석 위에 프로이트의 납골함이 놓여있다.
©andy dolman – geograph.org.uk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사로서 본래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신경증의 치료를 연구하고 있었다. 환자들마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본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정신적 요인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환자의 잃어버린 기억, 잠재의식(무의식)에 천착하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 때까지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무의식적인 실수, 방심, 착오행위 같은 것들이 의학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의사는 없었다. 실수는 단지 정신을 차리지 않아서 생기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것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혹은 무엇에 홀려서 정신 나간 행동을 했다는 식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사람의 실수에는 아무리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일이더라도,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동기가 있음을 찾아내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약속을 잊어버려 나가지 못한다든지, 또는 본의와 다르게 늦게 나감으로써 상대를 실망시킨다든지 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어린이가 그 시간만 되면 배가 아파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특히 그날까지 했어야 할 과제를 마치지 못했거나 시험이 있는 날 아이는, 학교에 가지 못할 만큼 몸이 아프거나 불가피한 결석 사유가 발생하기도 한다. 분실, 망각 등은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본인의 의식과는 달리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다.
그와 반대로 어떤 일을 아주 잘 해내야 한다는 동기가 있을 때에 그것이 오히려 강박감으로 작용하여 실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너무 신경이 쓰인 나머지 차라리 이 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반대의식이 자신도 모르게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리거나 중요한 일정을 잊어버리게 한다. 그 일이 불가능한 상태를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식적 실수를 통한 도피이다.

이처럼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실제 내면에서는 지극히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하려고 했는데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할 수 없게 만들었다’와 같은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옛날 같으면 ‘그 사람 안에 그 사람 아닌 누군가’를 가정하여 천사가 있느니 악마가 있느니 하는 신비주의적(종교적) 규정으로 변명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많은 사례연구를 통하여 규명하고 분석함으로써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밝힐 수 있는 ‘과학적 연구’의 장을 마련하였다.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그것을 당연히 마주해야지 하는 당위적 판단과 별개로, 다른 방식의 해소법을 찾으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심리적 기제다. 문제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보상, 합리화, 투사, 동일시, 승화, 전이, 반동형성 등), 이익의 유무를 떠나 일단 문제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도피기제(고립, 퇴행, 억압, 억제, 백일몽, 고착, 거부 등), 적응하고자 하는 적응기제, 더러는(어차피 도피도 방어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역공을 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공격기제(비난, 폭언, 폭행, 파괴)도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의 연구를 통해 덧붙여지거나 다듬어지며 발전되었는데, 그 기본 개념과 틀의 대부분은 모두 프로이트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꿈의 분석>은 이러한 기제들이 마음 속에 어떻게 내재하여 어떤 신체나 정신작용으로 나타내는 지를, ‘꿈’이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는 방법(틀)을 최초로 제시한 연구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하여 과학적 분석의 틀을 최초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중요할 수밖에 없으며, 이후로도 이 방면으로는 그를 뛰어넘은 학자는 없었다. 좀 더 발전된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의 어깨를 딛고 올라선 것이며(칼 융까지도 포함하여), 설사 그를 비판하는 학자라 하더라도 그의 용어를 빌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그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할까.

1909년 매사츄세츠 클락크대학교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함께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프로이트(53세, 앞줄 왼쪽)와 칼 융(34세, 앞줄 오른쪽). 앞줄 가운데는 미국의 초대 심리학회장이자 클라크대 총장 스탠리 홀. 퍼블릭도메인

금기, ‘불편한 진실’에 대한 시대의 방어

초기 저서 <꿈의 해석>에서 그가 연구한 200여편의 꿈 사례가 등장한다. 프로이트는 사례마다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려고 했다. 한 마디로 풍부한 사례의 증명으로 ‘탄탄한 논증’을 갖추었던 것이다. 논증이 탄탄한 이론은 그것이 틀렸음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수많은 반박시도나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1백년 넘게 인간 심리분석의 바이블처럼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해 대중들과 대중을 대변하는 학자들이 신랄하게 공격을 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프로이트의 저서 자체가 갖는 문제도 있다. 가장 첨예하게 공격을 당한 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 에너지를 ‘성적(性的) 에너지’와 동일시한 대목일 것이다. 성에 대한 언급은 연구실 밖에 나왔을 때 가장 일반적으로(감각적으로) 대중의 호기심과 이목을 끄는 요인인 동시에 가장 쉽게 반감을 얻을 수도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꿈'을 매개로 한 프로이트의 발화는 일종의 '불편한 진실'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엄마들이 자신의 어린 아이들로부터 ‘엄마는 나를 어디로 어떻게 낳았어?’라는 질문을 받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엄마들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제 4~6세 정도의 아이를 앉혀놓고 장차 아이를 과학자나 의사로 기를 생각으로 임신과 출산의 원리를 인체도표와 함께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할까(요즘은 이런 부모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지금은 몰라도 돼’라며 즉각적인 대답을 기피해야 할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든지 ‘배꼽으로 낳았다’와 같이 상징적이거나 다소 기만적인 대답을 들려줘야 할까? 이것은 ‘불편한 진실’에 속하는 주제다. 언젠가는 아이도 그 답을 알게 되고 필연코 '제대로' 알아야 할 문제지만, 그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알게 하느냐에 따라, 그 대답은 좋은 대답이 될 수도 있고 좋지 않는 대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프로이트는 단지 학자적 기본에 충실할 뿐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성(sex)의 언어로 인간의 본능적 욕망(리비도)을 설명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적당한 포장을 요구하는 동료학자들의 요구에도 좀체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로이트가 인간의 본능적 욕망을 ‘성적 에너지’(리비도)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1900년은 인류 정신문명의 나이가 어디쯤에 해당하고 있었을까. 청소년기와 청년기 사이를 지나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한 편에서는 ‘음란하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한 편에서는 적절하고 용기있는 과학적 개념이란 환대를 받았다. 격렬한 반대와 열정적인 호응이 교차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정신분석학이 (당대에 사장되지 않고) 20세기에 가장 뜨거운 연구 테마로 확산 발전된 점을 보면, 인류에게 ‘불편한 진실’을 가르치기엔 가장 ‘시의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연구결과를 대중에게 알려 업적을 인정받아야 하는 학자들의 대다수는 대중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에 더 신경이 쓰였을 수도 있다.

Carl Gustav Jung 칼 구스타프 융(30대 무렵).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계승자로 유력시되었으나 몇 가지 쟁점에서 차이를 좁히지 못해 학회를 탈퇴하고 ‘분석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학통을 세웠다. 퍼블릭도메인

프로이트가 가장 아낀 제자는 칼 융(1875~1925, 스위스)이었다. 1906년 서신교환을 시작으로 학문적 동반자가 되었고, 1909년에는 미국 클라크대학으로부터 함께 초청을 받아 명예박사학위까지 함께 받기도 했다. 융은 프로이트를 열렬히 존경하고 따랐으나, 함께 한지 6년 만에 그의 곁을 떠난다. 칼 융이 프로이트를 견디지 못한 이유는 좀 복합적이지만, 프로이트가 리비도의 개념을 좀 '젊잖게 들릴만한' 다른 개념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융의 시도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도 주 이유 중 하나였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신앙에 독실했던 융은 1911년 국제정신분석협회가 발족했을 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정신분석 학계를 떠나 ‘분석심리학’이라는(유사하지만 다른) 학문을 창시하고 자신만의 이론들(내향성과 외향성 구분, 집단 무의식, 원형이론-Archetype의 제안 등)을 세워 또 한 사람의 거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프로이트에게서 자라난 ‘정신분석’의 대가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1912년 융이 뮌헨에서 프로이트를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프로이트는 대화 중 기절해 쓰러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크 마리 에밀 라캉(1901-1981). 퍼블릭도메인

자끄 라캉 "젖 못뗀 어른이 너무 많아" - 프로이트 회복을 주장

20세기 후반 인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 중 한 사람이던 프랑스 정신분석가 자끄 라캉(1901~1981)의 프로이트 해석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라캉은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정신과 전문의로 당시 파리의 아방가르드와 초현실주의에 깊이 공감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의 선두주자인 파블로 피카소와도 주치의를 맡을 만큼 가까이 지냈다. 정신분석가로서 초현실주의의 여러 특징들을 살피기도 했다. 프로이트와 직접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1932년 빈의 프로이트에게 자기 논문의 사본을 보낼 정도로 존경심을 가지고 프로이트 이론을 계승하였다.

물론 자끄 라캉의 철학 세계는 거대하기 때문에 다 아울러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정신분석학의 범주에 관련된, 즉 프로이트와 연관된 한 부분만 살펴보자.
라캉은 ‘자신의 시간에 살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명제로 시작하여 인간이 완벽하고 온전하고 전능한 것에 대한 강박감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인간이 초자아적인 요구들에 의해 억압된 욕망을 언급한 것에 대한 응답이다.

사람은 대개 어려서부터 최초의 양육자로부터 ‘너는 잘할 수 있어’ ‘너는 잘 될 거야’ ‘무엇이든 바라는 것을 해봐’와 같이 격려를 받으며 자라난다. ‘전능성’에 대한 환상이 주입되는 것이다. 부모는 내가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라는 환상도 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그 믿음은 깨어진다. 어머니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깨닫고, 아버지가 가장 힘센 사람이 아니라는 진실도 깨닫게 된다.
‘불편한 진실’을 깨달을 때마다 어린아이는 정신적으로 성숙되며 그 결핍을 스스로 보완할 방법을 찾고 스스로 능력을 기르는 것이 정상적인 성장의 과정이다. 이 과정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전능성’의 환상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왜곡된 거짓 신념으로 호도될 때, 자아는 빗나간 성장을 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원리를 라깡은 제대로 살을 입혀 나갔다.

정상적인 자아로 성장하여 독립성을 갖추는 과정을 라깡은 ‘젖떼기(離乳)’에 비유했다.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어느 날 젖을 그만 먹어야 할 때가 될 때, 이것은 양육자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젖떼기는 그리 힘든 과정이 아니다. 이유식으로 시작하여 어른들의 음식을 자연스럽게 먹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의 젖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안아주고 업어주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걷기 시작함면서 정신적인 독립성도 길러진다.
그런데 때때로, 마치 대여섯 살이 되어서도 젖을 포기하지 않거나 어른들의 등에 업혀 다니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다. 같은 원리로 종교에 대한 태도나 정치권력을 대하는 태도, 어떤 이념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다 같이 미성숙한 태도가 문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라깡은 현대에도 ‘젖을 떼지 못한 어른들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유럽을 광란의 전쟁으로 몰아넣은 히틀러가 1935년 뉘른베르크 랠이에서 제복을 입은 청년단(히틀러유겐트)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폴란드 국립디지털 아카이브)<br>
유럽을 광란의 전쟁으로 몰아넣은 히틀러가 1935년 뉘른베르크 랠이에서 제복을 입은 청년단(히틀러유겐트)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폴란드 국립디지털 아카이브

성장을 거부하는 현대인, 미숙함에 안주하려는 종교, 그러한 미숙함을 이용하는 정치, 이것은 필요할 때마다 군중 속에 거짓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손쉽게 ‘단순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조합이 된다. 미숙한 종교나 정치는 이용하고 미숙한 대중은 이용당한다. 그 전형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프로이트 당대에 벌어진 나치즘의 광기였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침공해 들어왔을 때, 프로이트는 나치 돌격대와 나치 정부의 공식 비공식 공격과 폭력, 협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78년 동안 살았던 고향 빈을 등지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인들이 그를 열렬히 응원했고, 영국은 그에게 명예로운 학자의 예우를 다하면서 만년의 평온을 지켜주려고 애썼다. 나치에게 시달리고 신체는 십수 년의 암 투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의 정신과 눈빛만은 형형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집필을 계속했다. 
이듬해 9월23일 런던은 독일군의 공습에 대비하느라 부산했다. 그 어수선함 속에 런던 도심의 메어스필드가든 자택에서 기운이 다한 프로이트는 딸과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모르핀 주사에 의존하여 영면에 들었다. 

프로이트가 안장된 영국 골더스그린 납골묘원. 건물 내에 프로이트 가족의 납골묘역이 포함되어 있다.
©Marathon–geograph.org.uk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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