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2] 기술관: 이제마의 사상의학
[20세기 스토리박물관12] 기술관: 이제마의 사상의학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11.09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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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체질 다르다...네 가지 유형’(四象) 특성 규명
병이 같아도 처방이 달라야 하는 ‘변통’의 기준 세워
새로 발명된 개념 “1백년 뒤에 세상이 알아줄 것”
동무 이제마 사상의학. 사진=퍼블릭도메인

性命非他 知行也… “앎과 함이 건강의 기본”

술과 성, 재물과 권력 네 가지는 예로부터 사도장(四堵墻)이라 하여 경계하였으니, 자칫하면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개인의 수명이 길거나 짧아지고 가족의 화와 복이 갈린다. 또한 천하가 순조롭거나 혼란스러워짐도 여기 달려있다.
(酒色財權 自古所戒 謂之四堵墻而比之牢獄. 非但一身壽夭 一家禍福之所繫也 天下治亂 亦在於此)

-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광제설’편

질병은 사회환경과 습관, 도덕에도 요인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동무 이제마는 조선 말기의 의학자다. 1900년 9월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은 수천 년 동양의학의 능력을 한 차원 끌어올린 의서로 꼽힌다. 광제설(廣濟說)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만일 천하의 주색재권이 방자히 흘러넘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은 저절로 요순시절처럼 될 것이다.
(若使一天下酒色財權 無乖戾之氣則 庶幾近於堯舜周召南世矣)

좋은 여자를 만나 존중한다면 성생활이 절도를 잃지 않을 것이며, 좋은 벗을 만나 아낀다면 술로 인해 흐트러짐이 없을 것이고, 현명한 사람을 숭상한다면 권력이 바르게 사용될 것이며, 어려운 사람을 지켜줄 줄 안다면 재화가 제대로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若敬淑女 色得中道 若愛良朋 酒得明德 若尙賢人 權得正術 若保窮民 貨得全功)

의학서에서 질병과 상처 치료에 국한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거지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적어도 동양의학(한의학) 전통에서는 전혀 생소한 일이 아니다. 동양의학에서는 질병을 증상뿐 아니라 원인까지 살피는 전인적 관점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얼굴에 종기 하나가 나타날 때 그것을 째고 소독하고 약을 바르는 것이 서양의학 치료의 원리라면, 그것이 오장육부의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있어 생긴 것인가 근인(根因=원인의 뿌리)부터 찾아 증상과 원인을 함께 치료하는 것이 한의학의 원리다. ‘병의 뿌리’ 찾기는 체내의 오장육부에 그치지 않고 그가 사는 생활환경 교우 처신 등에까지 이른다.

동의수세보원.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동양의학의 경전으로 불리는 <황제내경>의 주인공 황제(黃帝)는 이렇게 말한다.

의원이 진찰할 때는 환자가 먹는 음식과 기거하는 곳, 그리고 삶이 최근에 어떻게 변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런 것은 정기를 손상해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신분이 높던 사람이 갑자기 세력을 빼앗기면 외부의 나쁜 기운이 침입하지 않더라도 정신이 내부에서부터 손상되어 반드시 병이 나며, 처음에 부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가난해지면 역시 외부의 요인이 없을지라도 피부가 거칠어지고 근육이 뻣뻣해지고 다리가 연약해져 경련을 일으킨다. 어설픈 의사가 발병의 원인도 밝혀내지 못하고 함부로 침을 놓으면 환자는 몸이 야위어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될 것이다.”

- 소문편  ‘소오과론’

질병의 원인에는 물리적 요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에서 오는 ‘심리적 요인’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색(色)을 함부로 쓰거나 술을 지나치게 마셔서 건강을 해치는 경우, 사람들은 흔히 색정과 음주 자체가 몸에 물리적 손상을 주었다는 측면만 생각한다. 그러나 색정에 빠졌을 때 오는 정신적 방탕과 불안감, 술독에 빠진 사람들에게 흔한 좌절감과 도피심리 같은 정신적 요인들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 황제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사회의 기강과 개인의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은 환자의 건강을 보살피는 의원들에게 당연한 책무다. 바로 여기에서 ‘작은 의사는 질병을 고치지만 큰 의사는 사람을 고치고, 더 큰 의사는 사회를 바로잡는다(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는 동양의학의 기본사상이 나온 것이다.

황제내경. 사진=학민사 제공

이제마에게서도 이런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병이 마음에 화를 내는 데서 시작된다. … 매사에 융통성 있게 대응하고 마음에 지나친 걱정과 분을 내지 않는다면 오래 못 살 리가 없다. 화와 복은 자신에게 달려 있고, 장수하거나 요절하는 것도 자기 노력에 달리지 않았음이 없다.

- 이제마, ‘東武遺藁’

또한 <동의수세보원> 성명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이 다른 것 아니다.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는 것이다.
성명이 다른 것 아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道德非他 知行也 性命非他 知行也)

여기서 ‘성명’이란 유교적 개념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결여됨 없이 온전한 그대로 생존하는 상태’, 즉 ‘건강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 역시 <황제내경> 거통론과 맞닿아 있다.

백가지 질병이 기의 작용에서 생긴다. 화를 내면 기가 상승하고 기뻐하면 편안해지며, 슬플 때는 기가 소실되고 두려울 때는 저하된다. 추우면 기가 수렴되고 더우면 흘러나간다. 놀라면 기가 흐트러지고, 일을 하면 기가 소모되며, 생각이 많으면 기가 뭉치게 된다.
(怒則氣上 喜則氣緩 悲則氣消 恐則氣下 寒則氣收 炅則氣泄 驚則氣亂 勞則氣耗 思則氣結)

옛날 맹자도 자신의 건강비법에 대해 밝힌 적이 있는데, 바로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하였다. 떳떳하고 활달하여 소탈한 태도. 정신적 당당함이 건강의 비법이었다.

윤리·도덕을 중시하는 동양의학의 관점은 기능주의적 치료에 국한하던 종래의 서양의학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는데, 지금 그 격차는 크게 좁혀졌다고 볼 수 있다. 1936년 헝가리 출신 의학자 한스 셀리에에 의해 ‘스트레스’의 의학적 의미가 증명된 이후 서양의학에서도 최소한 심리적 요인을 인정하거나 중시하는 방향으로 관점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근래 서구 의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과 몸’의 상관성에 기반을 둔 ‘심인치료’ 개념이라든가, ‘심신의학’과 같은 새로운 흐름이 커지는 추세다.

질병의 분류법에 체질의 분류법을 더하다

수천 년의 전통을 가진 동양의학은 훌륭한 고전적 의서들을 가지고 있다. <황제내경>, <상한론>, <금궤요략>, <신농본초경> 등 역대 중국 의서들과 조선조에 발행된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수백 권 이상의 연구서와 사례집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통 한의학의 정신에 충실한 이제마에게서는 어떤 새로움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이제마는 그 충실한 의학사상 위에 혁신적인 한 가지 ‘발명’을 더했다. 바로 사람의 체질을 분류하여 체질별 특성을 밝힌 ‘사상의학(四象醫學)’이다. 그동안 축적된 의서들에 통달했다면 같은 병에 같은 약을 더할 때 대개는 속 시원히 치료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대략의 효과를 넘지 못한다는 경우가 많음을 이제마는 궁금히 여겼다. 왜 같은 약이 어떤 사람에게는 효과가 빠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더디 나타나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악화가 되거나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는가.

유심히 살피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는 사람마다 체질 특성이 같지 않으며, 그 특성에 따라 각기 취약한 장기와 강한 장기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특성을 음양이론에 따라 4상(四象)으로 분류하고 살피면서, 이제마는 그의 독창적 이론인 ‘사상의학’의 체계를 세웠다.
이전까지 의서들이 음양의 구분을 질병과 약초에 대해서만 적용했다면, 이제 환자의 체질특성까지 구분함으로써 더 정교하고 정확한 치료와 처방이 가능해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동양사상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상호 교류하면서 그 사이에서 만물이 생겨났다고 하는 역학(易學=하늘과 땅 기운이 순환하는 이치를 밝히는 이론)의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기호로 나타낸 것이 음(-)과 양(+)의 개념이다. 두 기호를 한번 조합하여 태극(양극)이 형성되고, 거듭 조합하여 4상이 형성되며, 이를 다시 세분하여 8상(팔괘)과 64상(괘) 등으로 세분된다. 동양의 ‘성리학’은 그 같은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면서 갖가지 만물이 조성되고 생명들이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인간은 가장 진화된 생명체라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음과 양을 다시 둘로 나눈 태음-태양-소음-소양, ‘4상’에 각각의 의학적 특성과 의미를 부여한 학문이다. 현대에 와서 팔상이니 16상이니 하며 좀 더 세분된 체질론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정확성이나 타당성 여하를 떠나 이러한 아이디어는 모두 이제마의 사상체질론에서 착안하여 응용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태양인은 폐가 크고 간이 작다(肺大而肝小)
태음인은 간이 크고 폐가 작다(肝大而肺小)
소양인은 비장이 크고 신장이 작다(脾大而腎小)
소음인은 신장이 크고 비장이 작다(腎大而脾小)

이제마가 설명한 네 가지 체질의 특성을 ‘사단론(四端論)’이라 한다. 맹자의 철학이론인 사단론과는 다르지만, 인체 오장(간심비폐신)의 부위별 속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역학 이론인 오행(목화토금수)의 프레임을 활용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다(‘오행 조견표’ 참조). 이제마의 사단론에서 장기가 크거나 작다(大小)는 표현은 강하거나 취약하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이러한 장부의 특성은 식성은 물론 성격 특성으로도 이어진다. 오행사상에서는 각 장기가 사람의 오욕칠정과도 일정한 규칙을 따라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태양인은 예의를 잊고 제멋대로 구는 경향이 있으며(비루함),
소음인은 올바름을 놓치고 안일을 도모하는 경향이 있고(나약함),
소양인은 지혜를 잊고 사사로이 변명을 꾸미는 편이며(경박함),
태음인은 인자함을 잊고 욕심을 끝까지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탐욕).

- <동의수세보원> 사단론

오행과 인체관련 조견표
오행과 인체관련 조견표

결론적으로 병자를 치료할 때 이러한 사상의 체질특성을 고려하여 병증을 진단하고 처방하면 치료의 효과가 훨씬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사상의학의 취지다. 또한 평소 섭생이나 식생활에서도 체질을 고려하는 것은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고기가 필요한 사람도 있고 별로 도움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식생활만 자기 체질에 맞도록 고쳐도 예방의학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혈압이 다소 높은 상태가 정상인 사람도 있고 낮은 상태가 정상인 사람도 있다. 몸이 비대한 편이 건강에 유리한 사람도 있고 마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한 사람도 있다. 이런 관점은 기계적인 평균치를 제시하고 누구든 그 평균치를 목표로 삼는 서양의학의 관점과 크게 다른 것이다. 

20세기 세상을 바꾼 의술의 혁명

20세기에 세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1900년 무렵 세계인구 추정치는 10억 정도였는데, 이때 사람들은 불과 1백년 후에 인구가 60억을 넘게 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20년이 더 지난 지금 세계 인구는 80억 직전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구상의 인구는 고대문명이 태동한 BC 3~4천 경 대략 1천5백만 정도(추정)에서 1억 명을 넘기까지 무려 3천년이 걸렸다. 기원 1세기 로마시대에 1억5천을 넘지 않던 인구는 다시 1천년이 지나 4억 명 정도가 되었으며, 다시 1천년 가까이 지나서야 10억 명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후 단 1백년 뒤에(1900년대) 인구가 무려 60억으로 늘었으니 그 증가세는 가히 폭발적이다. 현재 80억이란 인구는, 21세기 들어 그 숫자가 해마다 1억 정도씩 증가해왔다는 뜻이다.

기원전 1만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 세계 인구의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 서기 1천년대 후반까지 미미한 증가를 보이다가 1900년대 이후 가파른 상승을 보여주고 있다. 2022년 현재 인구는 80억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 급증에는 여러 가지 경제사회적 변화가 뒷받침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위생환경과 영양, 의약기술의 발달을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특히 1900년 전후 약 50여년의 기간에 주로 유럽에서 이루어진 의약관련 기술의 도약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20세기 초반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2천만에 달하는 부상 병사들은 뢴트겐의 X-레이와 함께 얼마 전 혈액형의 발견으로 안전해진 수혈기술의 도움을 받아 대부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병리학자 란트슈타이너가 사람의 혈액에 서로 다른 세 가지 유형(A-B-O)이 있음을 발견하고 논문으로 발표한 것은 1900년이었다. 2년 뒤 다른 학자들에 의해 AB형이 추가로 발표되었다.  

미생물 연구에 따른 병원균의 발견과 이를 토대로 한 백신의 등장(결핵, 페스트, 탄저균, 한센병, 폐렴, 페스트, 매독 등의 병원균에 대한 극복이 모두 1900년 전후에 이루어짐), 혈액 중 백혈구의 식균작용 발견(메치니코프), 식품발효균 발견(파스퇴르), 안전한 소독제와 항생제(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의 발견과 개발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새로운 기술과 발견, 발명들은 그대로 현대의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이처럼 혁명적인 의학발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동양은 잠만 자고 있었을까. 유일하게 1900년의 의학 혁신기술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동무 이제마의 사상의학이다. 그러나 정치사회적 혁신의 분위기 속에 과학기술이 크게 창성하던 유럽과는 사정이 달랐다.

동양에서 유일하게 혁신을 선택한 일본제국은 '메이지유신' 1백년 만에 주변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후 주변 국가들을 하나하나 정복하면서 정치 문화 경제 과학기술 등 모든 시스템을 군국주의와 ‘서구화’에 맞춰나갔다. 의학에서도 기존의 한의학을 버리고 서양의학을 중심기술로 세웠다. 한반도와 중국의 오랜 전통의학들은 제도 밖의 일개 ‘민간의술’ 정도로 격하되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한의학이 다시 국가제도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60년대 중후반이다. 이런 사정은 ‘사상의학’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제마는 본래 자기 아호를 ‘동무’(東武)로 지을 만큼 본래 무인이며,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기울어가는 국운과 시대의 흐름을 몇몇 동지들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알고 오직 의학연구에 매진하여 죽기 직전 <동의수세보원>이란 역작 하나를 남긴 것이다. 동무는 또한 자신의 연구가 급히 결실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도 내다보았다. 다행히 이론의 근간은 세웠으나 충분한 변증의 사례를 완성할 틈은 없었다.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이제 가지만, 백년 후의 세상은 사상의학으로 귀일(歸一)할 것이다.”

그의 유언이 들어맞은 것일까. 1백년이 지난 2000년 무렵 이 땅에는 이른바 ‘체질요법’들이 유행처럼 확산하였다. 사상의학 원본 그대로는 아니고, 각 이론도 아직 미완성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인체의 치료에 개인 특성(체질과 기질)의 적용이 중요하다는 접근법의 부활은 충분히 큰 의미가 있다.

민족의 문화가 살아야 기술도 생장한다

인류 역사에는 신비로운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면 '동시성(同時性)' 같은 것 말이다. 만약 동서양의 역사를 비교 관점에서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서로 동떨어진 지구의 이쪽과 저쪽, 즉 서로 지구 반대편으로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 거의 유사한 시기에 유사한 사건이 같이 일어나곤 한다는 사실에 한 번쯤 흥미를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흔히 ‘동시성’ 혹은 ‘공시성(synchronicity, 共時性)’이라고 말하는 현상이다.

중국에서 동양철학의 대부분이 발아한 춘추전국시대의 연대(BC7세기~BC3세기)는 지중해에서 서양철학의 대부분이 발아한 그리스 폴리스시대와 겹친다. 그 4백여 년 사이에 중국에서는 관자, 노자, 공자, 맹자, 장자, 묵자 등 구류십가(九流十家)가, 그리스에서는 밀레토스학파의 탈레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프로타고라스로 시작하여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쟁쟁한 고대철학의 원조들이 활약했다.
백화제방의 시대를 지나 지중해와 유럽을 로마제국이 석권할 때, 중국에서는 한(漢)제국이 등장하여 거대한 왕조시대를 연다.

히포크라테스 동상
서양의학의 원조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공시성 현상은 의학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까지도 서양의학의 비조로 여겨지는 그리스 명의 히포크라테스(BC460-370)의 시기에 중국에는 편작이라는 명의가 있었다. 그리스-로마시대에는 갈레노스(AD129-219)라는 의사가 나타나 이후 베살리우스(벨기에, 근대 해부학의 시조)가 나타날 때까지 1300여 년간 중세의학의 표준이 되었는데, 이 시기에 한(漢)나라에 화타(華佗)와 장중경이 있었고 <황제내경>과 <상한론> 등 한의학의 기준이 되는 걸작들이 편찬되었다. 1500년대 베살리우스 시기에는 명나라 이시진(본초강목 저자)과 조선의 허준(동의보감 저자) 등이 그에 필적할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900년대 유럽과 미 대륙의 과학기술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을 때, 아시아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고독한 분투의 결실이다.

과학기술과 문명도 이를 포함하는 지역과 국가 환경이 뒷받침되어야만 제대로 성장하여 번성하고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음을 이 역사는 우리에게 생생히 가르쳐준다. 중국과 조선은 수천 년의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런 나라가 되지 못하였을까. 두 나라가 가장 미개한 주변국으로 취급하던 일본은 어떻게 해서 단시일에 가장 강력한 열강의 하나가 되었을까. 그 원인도 과정도 결과도 우리는 결코 모르고 있지 않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스스로 혁신하는 민족은 살고 이것을 거부하는 민족은 위축되며 소멸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모처럼 얻은 'K-문명의 개화기'라는 지금의 기회를 잘 살려 세계 으뜸의 문명을 꽃피울 수 있을까.

20세기 현대의학은 ‘스트레스’의 발견, 유전자와 호르몬, 뇌파의 발견, 기술적으로는 초음파와 전자파 응용기술 등을 더하였다. 한 세기 내내 의사들의 숙제였던 암의 대부분은 더 이상 ‘죽을병’이 아니다. 현대의학은 20세기 후반 ‘대체‧보완의학’의 과정을 거쳐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전자기술의 응용은 상식적인 얘기고, 물리학의 발전과 함께 ‘양자의학’이 태동하고 몸과 마음의 유기성을 전제로 하는 ‘심신의학’이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는 동양사상의 노하우가 비로소 빛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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