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以目視目] 선량하게 산다는 건 손해나는 일일까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11.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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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학교에서 배우는 윤리·도덕과 실제 사회에서 통하는 윤리·도덕이 때때로 따로 논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정직 양보 희생 겸손 같은 미덕은 역대의 성인들이 가르친 바요, 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강조하는 윤리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따라서 과연 얼마나 잘 살 수 있는가, 그에 비해 파렴치하게 사는 사람에겐 어떤 대가가 따르는가. 현실에선 상당히 회의적일 때가 많다.

동양 최초의 역사서라는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의리를 따라 죽은 백이 숙제와 당대의 마적 괴수 도척(盜跖)의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통탄한다.

사람에게 닥치는 화와 복이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고 그것이 하늘의 이치(天道)라고들 말하는데, 과연 이것을 천도라 하는 것은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
(儻所謂天道 是邪非邪;당 소위 천도 시야비야)

서양 역사에서 고대에 가장 지혜로운 제왕으로 꼽히는 솔로몬의 책에서도 그와 같은 한탄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니,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겠다.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면서 그 악한 사람들을 칭송하더라.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그 죽은 사람들이 평소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여전히 살아 있다니.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 악한 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나이에 죽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는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지 않는가.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약성서> 전도서 8장 9~14절

권선징악 즉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것을 벌한다’는 말은 과연 하늘의 이치인가, 인간의 착각일 뿐인가. 인류 천년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도, 세상 이치에 통달했다는 지혜의 왕도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통탄이다.

이것이 사마천이나 솔로몬의 시대에만 국한된 말일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자기 욕망과 탐욕만을 충족하기 위해서 윤리·도덕을 다 물리치고 제멋대로 살아라’고 한다면 과연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안녕이 성취될 수 있을까,

옛날에 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거기서 오랜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의로운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묵자를 염려하여 말했다.

요즘 세상에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자네 혼자서 의를 행하느라 괴로움을 무릅쓰고 있네그려. 인제 그만두고 자네 자기 삶이나 챙기는 게 어떻겠나.

그러자 묵자가 말했다.

지금 여기 열 명의 식솔을 거느린 사람이 있다고 치세. 한 사람이 농사를 지어 아홉명을 부양해야 하는데, 아무도 같이 일할 사람이 없다면 그 혼자라도 더욱 농사일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천하에 의를 행하는 사람이 없다면 자네는 내게 더욱 힘써 의를 행하라고 권해야 하거늘, 어찌 그만두어라! 하는 것인가.

<묵자> 貴義편

장자는 말한다.

세상의 칭찬에 들뜨지 않고, 세상이 헐뜯는다고 주저앉지도 않는다.
 (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거세이예지이불가권 거세이비지이불가저)

<장자> 소요유(逍遙遊) 편

일이 잘 풀린다 싶으면 시기하거나 얻어먹으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일이 잘 안된다 싶으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새삼스럽게 요즘 세상이 악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예나 이제나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심이 변하는 추세로 보면, 사람들이 ‘인간다움’에 대한 각성은 점점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문명의 시대로 오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움을 열망하고, 그것이 빚어내는 평화로움과 풍요의 결과를 신뢰한다.

옛날 공자나 묵자처럼, 인간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버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도리를 다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인간사회는 더욱더 평화롭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내 안의 깨달음’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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