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3] 문명관: 세계일주①...'80일간의 세계일주' 현실이 되다
[20세기 스토리박물관13] 문명관: 세계일주①...'80일간의 세계일주' 현실이 되다
  • 정해용 기자
  • 승인 2022.11.25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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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뱃길, 19세기 철길로 전 세계 이어져
소설 속 ‘80일’ 20년 후 현실에서 ‘60일 일주’로 단축돼
20세기 항공 가세하며 ‘일반인 여행’ 대 유행
탐험, 정복, 교역, 정신적 공유... 목적도 방법도 다양해져
1872년 <80일간의 세계일주>로 여행소설의 붐을 일으킨 프랑스 작가 쥘 베른. 풍부한 과학지식과 상상력으로 <해저 2만리> <기구 여행> <땅속여행> <달나라 여행> <15소년 표류기> 등 ‘경이로운 세계’ 시리즈를 포함하여 과학소설과 모험소설을 남겼다

80일간의 세계일주
런던~수에즈 (철도+기선) 7일
수에즈~ 뭄바이 (기선) 13일
뭄바이~ 콜카타 (철도) 3일
콜카타~ 홍콩 (기선) 13일
홍콩~ 요코하마 (기선) 6일
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기선)22일
샌프란시스코~ 뉴욕 (철도) 7일
뉴욕~ 런던 (기선+철도) 9일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프랑스 작가 쥘 베른(Jules Gabriel Verne, 1828~1905)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런던에 사는 가상인물 필리어스 포그의 우발적인 결심으로 시작된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사교클럽(혁신클럽)에서 신문을 읽다가 ‘이런 일정이 정말 가능할까?’라는 대화 끝에 회원들과 내기를 걸고 그 즉시 여행을 출발한다는 설정이다.

과학기술과 상상소설, 서로 아이디어 주고받아

<80일간의 세계일주> 초판본의 표지

소설 속의 여행은 1872년 10월 2일 오후 8시 45분부터 12월 21일 같은 시각까지 돌아오는 일정으로 설정돼 있다. 주인공이 출발했다는 날짜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6일부터 파리의 ‘르 땅’(Le Temps=Time이라는 뜻) 신문에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하자, 독자들은 마치 주인공의 여정을 실제 사실처럼 느끼며 손에 땀을 쥐고 매일매일 신문을 기다렸다. 주인공이 런던 혁신클럽에 돌아와 승리를 거두는 마지막 장면은 소설 속 도착 날짜의 하루 뒤에(12월 23일 자) 게재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들에겐 그 느낌이 얼마나 생생했을까. 이 여행소설 하나가 그동안 혁명이니 전쟁이니 하는 정치적 구호에 지친 파리지엔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시민들은 거의 누구나 이 소설을 읽었으며, 식당이나 카페에 모이면 으레 미지의 세계를 여행 중인 필리어스 포그의 상황이나 그가 머문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늘 연재분에서는 어제의 위기상황을 과연 잘 극복했을까, 어떻게 돌파했을까를 상상하며 토론을 벌이거나 내기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인공이 출발하던 날 벌어진 은행강도사건, 주인공에게 혐의를 두고 신분을 감춘 채 뒤따르는 런던경시청의 형사, 좌충우돌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우직한 하인 파스파르투, 인도에서 서티(순장)의 풍습에 따라 죽은 남편과 함께 불태워질 뻔한 젊고 현숙한 여인 아우다…. 난데없이 닥치는 폭풍과 인디언의 습격 등 긴장 포인트는 매회 이어졌다. 사건의 배경이나 행간의 묘사로 소개되는 외국의 기이한 풍습과 문물 이야기는 아직 다른 대륙을 가본 적이 없는 독자들에게 요긴한 흥밋거리였다.

TV 라디오 드라마도 없던 시절이다(라디오 자체가 없었다). 일간 신문 연재소설의 위력은 그러니까 TV 일일 드라마 이상으로 대단했다.

이 소설이 성공을 거두자 그동안 쥘 베른이 썼던 많은 과학상상소설(SF) 작품들이 줄줄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땅속 여행’ ‘지구에서 달까지’ ‘해저 2만리’ ‘기구를 타고 5주간’ 등 ‘경이로운 세계’라는 테마로 연속 발표했던 기존의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이후에 쓴 작품들도 쓰는 족족 화제를 모았다. ‘신비의 섬’과 ‘챈슬러호’ ‘황제의 밀사’ ‘녹색광선’ ‘15소년 표류기’ ‘서기 2889년’ 등이다.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가 이동한 경로 지도

하늘, 바다, 땅속, 해저, 우주, 무인도… 쥘 베른이 그린 다양한 모험여행의 세계는 그로부터 1백년이 안 되어 그 절반 이상을 현실에서 볼 수 있었다. 과학자도 아닌 작가로서 어떻게 미래를 잘 예측했을까 놀라울 정도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이후 많은 과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정작 쥘 베른 자신은 그때까지 나온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정보와 예측들을 꼼꼼히 수집하고 활용하여 쓴 것이었다. 과학은 작가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작가는 과학에 영감을 준다. 사실 많은 과학자는 어린 시절에 읽은 신화나 노래, 과학상상소설들을 통하여 먼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기 시작한다. 

어쨌든 쥘 베른은 문학적 성공으로 작품 속의 필리어스 포그처럼 비용 걱정 없이 마음껏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자가용 요트를 세 번이나 바꿀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행과 독서를 통하여 얻은 정보와 지식을 토대로 또 다른 상상소설을 썼다. 그가 1863년에 썼다는 ‘20세기 파리’는 1백년 뒤 문명세계의 이면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출판되지 못하고 분실되었다가 1백년도 더 지나서야 증손자에게 발견되어 빛을 보았다. 처음 원고를 본 편집자는 그것이 '너무 비현실적인 예측'이라며 20년 뒤에나 검토해보자고 했다는데, 150년 뒤인 지금 시점에서 보면 너무나 놀라운 예측이다. 예를 들면 ‘고전문학을 전공한 청년이 기계문명이 압도하는 미래사회에서 취업조차 못 하고 방황하다가 빈곤 가운데 죽어간다는’ 등의 예언들.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의 문명비판 소설들조차 그로부터 70년이나 뒤에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쥘 베른의 통찰력은 매우 놀랍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초판의 삽화들. Edvard Forsström 작. 퍼블릭 도메인

 

“쥘 베른의 80일 기록을 깨라” 두 여기자의 도전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세계인을 설레게 한 지 17년이 지난 1889년. 미국의 한 야심만만한 20대 여성이 소설 속 여행일정을 따라 현실검증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뉴욕월드’라는 신문사의 기자였던 넬리 블라이는 당시 25세. 여행 도중 파리에 들러 <80일간의 세계일주> 저자 쥘 베른을 인터뷰하는 일정까지 포함하여 필리어스 포그의 성과보다 사흘 짧은 76일 이내에 돌아오겠다는 단독 취재여행 목표를 세웠다.

쥘 베른의 소설 속 이동코스를 따라 1889년 겨울 세계일주 단독여행에 도전했던 미국의 두 여기자. 왼쪽은 <뉴욕월드>의 필리어스 포그(25세), 오른쪽은 <코스모폴리탄>의 앨리자베드 비슬랜드(29세). 두 사람은 뒤에 모두 작가로 성공했다.

이 신문사의 사주는 후일 ‘퓰리처상’의 설립자인 조셉 퓰리처였다. 그도 꽤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이 계획서를 선뜻 승낙하지는 못했다. 비용은 둘째 치고 아직 19세기. 이 세계는 아직 여성에게 안전하지도 관대하지도 못한 시절이었다. 유럽에서도 아직 여성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대학 입학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최초 사례는 1893년 뉴질랜드다. 후일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프랑스의 과학자 마리 퀴리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수 임용이 안 돼 교수 남편의 조수 자격으로 겨우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던가. ‘넬리 블라이’라는 이름만 해도 그랬다. 당시 신문에서는 여기자들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대신 필명을 만들어 쓰게 했다. ‘넬리 블라이’는 여기자 엘리자베스 코크란이 당시 스티븐 포스터의 히트곡 제목에서 따온 필명이었다.

퓰리처 사장은 이 도전적이고 멋진 취재를, 아쉽지만 남자 기자에게 맡기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넬리 블라이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신은 경쟁사로 옮겨가서 그 남자를 꺾어 보일 것이라고 반발했다. 결국 넬리 블라이는 1889년 11월 14일 뉴욕항에서 기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단독으로 시간기록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이벤트는 경쟁이 있을 때 더 흥미로워지는 법이다. 뉴욕의 의욕적인 신생 매체 ‘코스모폴리탄’이 그 상대역을 자청했다. ‘뉴욕월드’와 똑같이 여기자 한 사람을 준비시켜 지구 한 바퀴를 돌게 했다. 코스는 비슷하지만 코스모폴리탄의 엘리자베드 비슬랜드는 넬리 블라이가 정한 방향과 반대인 서쪽 방향으로 출발하여 태평양부터 건넜다.
‘두 뉴요커의 세계일주 기록경쟁. 그것도 20대의 여기자들’ 흥미를 끌 만했다. 게다가 이야깃거리를 제대로 요리할 줄 아는 퓰리처 사장은 무료여행권 같은 상품을 내걸고 ‘넬리 블라이 귀환시간 맞추기’ 퀴즈와 같은 이벤트로 독자들의 흥미를 부채질했다. 두 매체는 이벤트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뉴욕사람들은 17년 전 파리 사람들이 쥘 베른의 소설을 읽으며 그랬던 것처럼, 모이기만 하면 이 경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고 내기를 걸었다. 이번에는 그 결과가 작가의 의지에 달린 소설이 아니라 누구도 감히 예단할 수 없는 실전이라는 게 가장 큰 차이였다. 외국의 주요 국제도시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두 뉴욕 매체들의 이벤트를 해외 화제 형식으로 사진과 함께 다루었다. 덕분에 블라이는 통과 중인 외국도시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쥘 베른이 <80일간의 세계일주>가 가능하다고 본 것은 그 무렵 유럽 지중해에서 인도양으로 곧바로 나갈 수 있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1869) 미 대륙에는 동서횡단 철도가 개통(1868)되었기 때문이다. 주요 국가들 사이에는 증기선 정기항로가 운항하고 있었다. 1866년 대서양을 가로질러 놓인 해저케이블은 세계 주요 도시간에 모르스 신호로(전보) 중요한 연락을 주고받을 수도 있게 했다. 

새로운 기술들이 하루가 멀다고 나타나던 시기다. 17년 뒤 넬리 블라이가 뉴욕에서 출발할 때는 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시험적인 전기자동차와 다임러 벤츠의 엔진자동차가 시판되어 육상 이동이 훨씬 간편해졌고, 기선이나 열차의 속도도 빨라졌다. 세균학의 급속한 발달로 질병의 위협은 크게 낮아졌으며, 에디슨의 백열전구는 80년대부터 대부분 도시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아직 아주 편리하지는 못하지만, 도시와 도시 사이에선 전화 연락도 가능했다. 벨의 전화기가 발명된 것이 1876년이다. 여행자들이 훨씬 간편함을 느낄 수 있는 청바지나 인조견 등으로, 더구나 미국의 신여성들은 더 이상 드레스에 갇혀 지내지 않았다. 두 기자가 중간중간 써서 보내는 취재보고서는 그때마다 지면에 소개되었다. 70년대에는 없던 파리의 에펠탑, 처음 등장한 '극장식당' 물랑루즈를 비롯하여 무언가 불안해 보이지만 활기차게 변모하고 있는 유럽 도시들의 풍경이 뉴욕에 전해졌다.

그림 <뉴욕 월드> 기자 넬리 블라이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뉴욕에서 넬리 블라이를 맞는 환영객들과 ‘넬리 블라이 특별열차’를 따라 달리며 환영하는 인파의 모습. 당시 보도사진=미 국회 도서관 자료. public domain

단축되는 시간기록…세계가 한 마을

블라이가 일본 요코하마-도쿄를 거쳐 태평양을 건널 때는 이미 1890년 새해였다. 악천후로 인해 바다 위에서 예정보다 이틀이 더 소요됐지만 자유의 여신상을 돌아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기록단축에 여유가 있었다. 그뿐 아니다. 그녀를 위한 특별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블라이의 기록 단축을 돕고, 매체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퓰리처 사장이 또 하나의 이벤트로 준비한 특별 전세열차 ‘미스 넬리 블라이 스페셜열차’는 외부에 넬리 블라이를 응원하는 현수막까지 내걸었다. 세 구간으로 나누어진 횡단철도를 세 대의 열차를 바꿔 타며 달리는 동안 기관사들도 특별한 사명감을 느꼈던지 속력을 다했다. 순간 최대 시속 100km 정도의 신기록을 포함하여 전체 구간 평균시속은 60km 정도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4천km가 넘는 구간을 이틀 스물한시간(69시간) 만에 주파했다. 중간 환승역에 1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기도 했다.

17년 전 쥘 베른의 필리어스 포그의 계산으로는 7일이 걸리는 거리였고 철로 길이도 6천Km로 절반이나 더 길었다. 실제 스토리에서는 들소 떼가 느릿느릿 철로를 건너고 인디언의 습격을 받는 등으로 8.5일이나 걸렸던 구간이다. 

1890년 1월 21일. 넬리 블라이는 전체 4만 70km 여정을 끝내고 72일 6시간 7분 만에 뉴욕으로 돌아왔다(지구 둘레는 적도 표면을 기준으로 4만km다). 경쟁자인 엘리자베드 비슬랜드는 여행 내내 비슷한 정도의 속도를 유지했으나, 결정적으로 런던에서 대성양을 건널 때 돌아오는 배를 놓치는 바람에 도착이 많이 늦어졌다. 그래도 필리어스 포그의 기록보다는 단축된 76일하고도 절반이 걸렸다.

두 사람은 각각 여행기를 출판했고, 이때 얻은 지명도에 힘입어 순조롭게 작가로 변신했다. 이때 여행기에서 비슬랜드는 넬리 블라이의 경우와 달리 발행인의 갑작스런 명령으로 (사실은 자원하고 싶지 않은) 일주여행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

넬리 블라이의 일주기간 72일은 분명히 신기록이었지만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자들에 의해 곧 기간이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여행자들이 있었지만 가장 두드러진 도전자는 조지 프랜시스 트레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업가였다. 그는 1870년에 이미 세계를 일주한 적이 있는데, 당시 기록이 80일 정도였다. 그 때문에 쥘 베른의 소설이 바로 조지 트레인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레인은 남미 증기선 항로의 개설자이자 대륙철도의 동부 쪽을 건설한 유니온 퍼시픽철도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좀 괴짜에 속했던 그는 넬리 블라이가 여행을 마친 바로 그해에 다시 세계 일주에 나서 기록을 67일로 단축했고, 1892년 세번째 도전에서는 60일 만에 여행을 마쳤다.

마젤란원정대의 세계최초 대양 일주는 1519년부터 1522년까지 3년이 걸렸다. 270명의 선원이 5척의 배에 나눠 타고 출발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배 한 척에 18명만 살아 돌아왔다. 16세기 대양 항해는 생존귀환율이 한 자리 수에 그칠 정도로 극한적인 도전을 의미했다.

16세기 마젤란의 세계일주 이후 바다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탐험가들과 신대륙을 찾아내려는 정복자들, 그리고 새로운 보물을 찾아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사업가들로 북적였다. 대다수 정복자는 자기 나라의 왕이나 부호들로부터 지원받아 새로운 영토에 왕조의 깃발을 꽂으려 했다. 한번 떠나면 몇 년이나 몇십년의 유랑을 해야 했고, 당연히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했다. 마젤란원정대의 세계최초 대양 일주는 1519년부터 1522년까지 3년이 걸렸는데, 270명의 선원이 5척의 배에 나눠 타고 출발했으나 만신창이가 된 배 한 척에 18명만 살아 돌아왔다. 16세기 대양 항해는 생존 귀환율이 한 자릿수에 그칠 정도로 극한적인 도전이었다. 좀 성공적인 경우에도 20%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무렵의 바다는 더 이상 ‘죽음의 여행길’이 아니었다. 적어도 정기선이 다니는 항로라면 중간중간 기착하여 물과 식량, 그리고 기선의 연료인 석탄을 새로 채울 수 있는 항구들을 일정 간격 이내에 만날 수 있었고, 경험 많은 선원들은 수십 일의 항해 동안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낼 방법도 알고 있었다. 
1912년 4월에 대서양 항로에 도전했던 (비록 실패했지만) 배수량 5만2천톤, 승객정원 3,327명의 초대형 크루즈선 ‘타이타닉(RMS Titanic)’호는 20세기 초반 바다여행이 얼마나 일반화되고 점차 고급스러운 일상이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6세기 마젤란이 세계일주에 사용했던 빅토리아호 복제모형. (칠레 푼타 아레나스, ⓒ빅토리아박물관)

탐험가 정복자 도전자 그리고 베가본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비록 19세기에 있었던 이야기지만, 그것은 그 이전의 세기보다 20세기 문명과 더 깊이 연결되는 스토리의 시작이다. 1969년의 달 착륙 우주선이 지난 세기보다는 21세기 이후와 더 깊이 연결되는 예고편이었듯이.

아직 세계 일주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더 남아있다.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여행과 관련한 흥미로운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스턴트 여행(stunt voyager)’이라는 단어다. 스턴트(stunt)는 본래 진로를 가로막는 방해물을 뜻한다. 생물의 발육이나 성장을 가로막는 행위도 스턴트라 한다. 거기서 이러한 방해물을 뛰어넘고 극복하는 행위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요즘은 주로 영화나 쇼에서 위험한 방해물을 동반한 묘기를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 세계일주가 비교적 손쉬운 일이 되면서, 좀 더 어려운 조건으로 여행을 완수하고자 하는 ‘스턴트 여행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보이저(voyager)는 본래 모험적인 바다 항해자를 뜻하는 단어지만, 우주항해를 위시하여 보다 폭넓은 항행, 나아가 여행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The New York Times Archives

옛날 항해자들은 항해기술은 물론 먹는 것 자는 것 심지어 해적이나 이방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까지 모두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인원의 ‘선단’과 무장이 필요했으나, 20세기 이후의 여행자들에게는 그러한 ‘필수 무장’의 목록이 점점 줄어들었다. 가족이나 동호인 단위의 소규모 인원으로 일주하거나 심지어 단독으로 요트를 몰고 대양을 건너는 것도 가능해졌다. 발달한 항구들과 하늘에 뜬 GPS, 정확해진 일기예보나 위성으로 중계되는 공중파 방송 같은 21세기의 공공재들도 여행의 짐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아직 미비하던 1900년 무렵에도 이미 단독으로 세계일주에 나서는 항해자, 자전거 라이더, 혹은 배낭 하나 달랑 맨 도보여행자들이 있었다. 진정한 스턴트 여행자들이다. 
하늘길이 열리고 고속철도나 고속도로가 발달 되어 이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면 하루 안에 지구상 어디든 갈 수 있을 만큼 수월한 조건이 제공되고 있지만, 스턴트 여행은 마치 스포츠처럼 오히려 동경심마저 불러일으킨다. 1950년대 이후에는 기네스북이 등장해 새로운 방법 새로운 여행의 신기록을 해마다 업데이트하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행자들은 개척자, 정복자, 선교사거나 세일즈맨, 혹은 단지 떠도는 게 좋아서 여행하는 방랑자(Vagabond) 등 다양한 목적과 형태를 띤다. 나라가 망해서 떠돌 수밖에 없는 불운한 유랑민들도 있다. 

다음 호에서 몇 명의 저명한 세계일주 기록자들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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