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작 성공수기] 굳세어라! 숙희야 feat. 열공...최우수상 이숙희

김남기 기자
  • 입력 2022.12.01 11:49
  • 수정 2022.12.0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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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경상남도에서 실시한 제2회 신중년 인생이모작 성공수기 공모전 수상작품을 연재한다. 연재될 수상작품들은 퇴직 후 삶 준비, 재취업 성공사례, 사회공헌활동, 재능나눔 경험 등을 공유하고, 신중년 세대의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엿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공모전 주제는 '은퇴 후에도 활기찬 나의 인생이야기'이다.

병원에서 근무중인 이숙희 간호사. 사진=이숙희 제공 

굳세어라! 숙희야 feat. 열공...최우수상 이숙희

안녕하세요. 저는 경남 창원시에 사는 1959년 8월 25일생 이숙희입니다.

2022년 말복 즈음하여 어느 날, 시내버스를 타고 시장가는 길에 우연히 '인생 이모작 공모전'을 발견하고는 제 이야기도 여기에 해당이 되려는지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용기 내 글을 적어봅니다.

저는 현재 창원시에서 거주하고 있으면서 거제시에 있는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일을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입니다.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로서 20년을 일한 이후 못다 했던 학업을 마친고 간호조무사로서 제 인생 이모작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제 인생 이모작은 환갑을 앞두고 시작되었습니다. 60세 이전의 제 인생은 여느 엄마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가정에 충실한 아내였으며, 아이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엄마였다면, 60세 이후의 제 인생은 그야말로 ‘이숙희’라는 이름으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근로자로 일하고 있는 이숙희 간호사. 사진=이숙희 제공 

60세 이전 나의 인생...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이자 일용직 근로자

저는 3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아파트 건설회사 공사장에서 설비 일을 도와주는 일용직 근로자였습니다. 흔히 ‘노가다’라고 불렀는데, 저 스스로 이 일에 대하여 너무 부끄러워하여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외에는 하물며 같은 아파트 주민에게도 제 직업을 직접적으로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는 저 스스로 자존감이 아주 낮았던 것 같습니다.

피치 못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졸업을 못 하고 어린 나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어릴 때도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하고 싶은 열망은 있었지만 어리고 능력이 없는 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멋지고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보니 시집온 가정도 또한 가난하고 부족했습니다. 남편만큼은 잘 만났다고 생각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매우 부족했습니다. 더더구나 제 나이 27세 때, 건강이 안 좋으신 홀시어머니(당시 57세)를 모셔야 했으며 아들딸까지 모두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다 보니 남편의 외벌이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사진=이숙희 제공 

돌이켜보면 그 당시 57세의 시어머니는 아주 젊은 나이였는데, 저희 시어머니는 타고난 체질이 너무 약해서 수시로 이유 없이 쓰러지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이나 가정살림도 잘하지 못하시는 분이어서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 저희 가족이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목욕시키고 병원 모셔가고 하는 것 모두 저의 몫이었습니다. 한 20년을 그렇게 같이 살고 계시다가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는 아예 거동을 못 하고 몸져누우셨는데, 저는 차마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제 몸이 힘들고 지쳐도 제 손으로 돌봐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공사장 현장 일을 하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수 시어머니를 목욕시켜드리고 대소변을 모두 받아내었습니다. 자궁 쪽에 무언가 안 좋으셨는지 썩는 듯 한 악취가 나더라도 오로지 우리 집에서 모셔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 다녀와서 제가 퇴근할 때까지, 그리고 방학 기간 동안 할머니의 대소변을 치워주고 밥상도 차려주면서 그렇게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악취가 나는 할머니 방을 아무 불평 없이 치워주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에는 그냥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니까요.

그런데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지요? 시어머님이 돌아가시니깐 어느 가족보다 제가 제일 아주 슬펐거든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는데 20년의 세월 동안 쌓인 정이 그렇게 대단한가 봅니다. 요즘도 종종 시어머님이 생각이 나고, 시어머님의 그때 그 나이를 제가 지나오다 보니 더더욱 시어머님이 안타깝고 불쌍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립기도 한 것을 보니 말입니다.

다시 제 나이 27세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맞벌이는 해야 하는데 어린 시절 배움은 짧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직업을 선택할 때, 제 나름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엄마’라는 사람은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되면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기준 말이지요. 일찍 퇴근할 수 있고 배움이 짧아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다 보니 공사장 일명 ‘노가다’ 일이었습니다.

저의 의지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 배움이 짧은 상황 탓에 선택된 직업이라서 그런지, 사회적인 인식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 직업이 자랑스럽기보다는 참 아주 부끄러웠습니다. 제 딸은 저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라고 말했지만, 저 스스로 제 직업이 싫어서 아이들에게는 학교에서든 친구에게든 그 누구에게도 절대 엄마의 직업을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고 부탁했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누군가가 저에게 이전의 제 직업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보면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사진=이숙희 제공 

죽어도 대학을 꼭 가고 싶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상담사가 되고 싶다.

공사장 일을 하면서도 저에게는 항상 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저로서는 배움에 대한 갈증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공사장 일로 힘들고 지쳐서 돌아와서 다섯 식구들 저녁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그 시간 틈틈이 심지어 화장실에서조차도 매일 매일 책 한 장씩은 읽어보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 신문이든 잡지이든 만화책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 어떠한 책이든 매일 무조건 한 줄이라도, 한 장이라도 읽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제 딸에게 그런 말 한 적도 있습니다. 너희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나도 똑같이 그 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입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책이며, 교과서며, 소설책이며, 전공 서적이며, 가리지 않고 모두 읽어보았거든요.

그런데도 제 마음속에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원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도 언젠가는 남들이 다 가는 대학이라는 곳을 꼭 가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어도 대학이라는 곳을 가보고 죽고 싶다는 그런 꿈 말입니다. 이곳저곳 공사장을 옮겨 다니면서도 마음속으로 그 꿈을 항상 간직하고 다짐했습니다. 사실 제가 꾼 최고의 꿈은 따로 있었습니다. 죽어도 대학을 꼭 가고 싶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고 더 큰 꿈은 바로 몸과 마음이 어려운 이웃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상담사가 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웃, 혹은 저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저의 최종 꿈이었습니다.

저의 직업에 대해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배움이 짧은 저에게 그 일이라도 할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설비 쪽 일은 용접을 비롯한 웬만한 전문가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느 직업보다 수당도 높았기 때문에 아들딸 교육도 잘하고 시어머님도 잘 모실 수 있었습니다.

 

일거리가 없어 찾아 온 기회 ‘공부’

제 인생 이모작은 50대 후반에 아주 작게 시작되었습니다.

공사장 현장 일을 다니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망은 항상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50대 후반 무렵에는 낮에는 현장 일을 하고 저녁에는 왕초보 영어학원도 다녔습니다. ABCD도 모르고 간판에 적힌 영어를 읽을 줄 모르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adidas, nike, cafe 등등. 간판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이 참 창피했습니다. 사실 현장 일을 마치고 저녁에 공부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긴 했습니다. 공사 현장은 더울 때는 숨이 막히도록 너무 덥고 땀이 범벅이 되어 지칠 대로 지치게 만들고, 추울 때는 찬바람에 손발이 너무 얼고 온몸이 얼어서 지치게 만들기 때문에 워낙 체력이 약한 저로서는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이 매우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알아가는 재미는 또 다른 행복감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영어를 배우는 와중에 딸의 도움으로 검정고시도 준비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제대로 졸업을 못 했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과정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검정고시는 기출문제 중심으로 독학으로 합격했고요, 중학교 검정고시는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독학하여 통과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제가 다니던 설비회사에서 일거리가 없다고 저에게 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일용직 노동자이다 보니 쉽게 말해서 잘린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몇 달 쉬다가 회사에서 일거리가 생겼다고 연락이 오면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볼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딸이 제안을 해왔습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요. 이제는 아들딸들이 각자 결혼하여 제 인생을 잘살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한 푼 더 벌려고 애쓰지 말고 못다 한 공부를 집중해서 한번 해보자고요.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요.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돈을 못 벌게 되면 경제적으로 타격이 심할 텐데 어찌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이 일만 해온 저에게 잠깐 2~3주 쉬고 있는 그 당시의 상황도 사실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딱히 집에서 할 일도 없는 것 같고 무기력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이 더 아픈 것 같기도 했고요. 실제로 갑자기 일을 쉬면서 몸이 좀 많이 아팠습니다. 고질적으로 무릎관절이 붓고 아픈 것은 당연하였고 몸살이 심해지면서 오한도 오고 관절 마디마디 안 아픈 곳이 없었으니까요. 회사에 안 가는 저의 인생은 상상이 잘 안 갔습니다.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은 제 건강상태가 공사현장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일을 찾아다니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습니다. 저 또한 제 인생을 다시 한번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정말 큰 용기를 내어서 제 직업을 한번 바꾸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학습지로 영어공부중. 사진=이숙희 제공

남편, 나의 수학 가정교사가 되다.

제 인생 이모작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때부터입니다. 반강제적으로 퇴직한 이후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면서 고졸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중학교 과정까지는 어찌어찌하여 독학으로 겨우 통과했지만, 고졸 시험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딸의 도움으로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영어는 나름대로 꾸준하게 해 온 덕분에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만했고, 사회 과학 역사는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가 났습니다. 배우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학만큼은 기초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험준비를 한다는 것이 참 힘이 들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제 남편은 저의 수학 담당 선생님이 되어주었습니다. 남편은 한국폴리텍대학(구, 창원기능대학)을 졸업하고 전기기사 2급 자격증이 있을 만큼 수학을 참 잘하는 사람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기본적인 방정식은 거뜬하게 해내는 사람이거든요. 저녁 식사 후에는 매일매일 남편과 저 둘이서 자정까지 밥상을 펼쳐놓고 수학 공부를 했습니다.

결국 시험에서 수학점수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남편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시험에 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무렵에 저는 제 남편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여태까지 몇십 년을 같이 살아도 제 학력이 모자란다고 무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존중하고 신뢰해주면서 집안 살림을 온전히 저에게 맡겨준 남편이었거든요. 게다가 남편은 온종일 현장 일에 피곤했을 법도 한데 남편 나름대로 열심히 수학을 가르쳐주려고 애쓰기도 했으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남편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의 도움으로 58세 때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드디어 저는 이력서에 ‘고졸’이라고 당당하게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2년제이든 4년제이든 대학교에 가고 싶어도 고졸이 안 되면 지원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조건이 된 것입니다. 정말 그 당시에는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의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꾸준하게 학교만 잘 다니면 얻어지는 고졸이라는 학력이 저에게는 너무나도 높은 벽처럼 느껴졌었거든요. 저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기도 하고 스스로 해냈다는 뿌듯함도 있고 어떻게 표현하지 못할 그런 감동이 있었습니다.

학사모를 쓰고 졸업사진. 사진=이숙희 제공

59세에 꿈 그리던 대학에 가다.

59세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대학교에 지원했습니다. 수능을 볼 정도의 실력은 안 되었기 때문에 2년제 만학도들이 가는 주말반 대학교에 지원하여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경북 경산에 있는 영남 외국어 대학교였는데 그중에서 보육복지상담과로 입학했습니다. 그 과는 보육교사 2급과 사회복지사 2급을 취득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원하던 상담사의 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지원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해보는 것은 이 대학교 2년 동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숙희’라고 출석 체크를 하면서 나의 담당 교수님도 생기고 나의 학우들도 생기면서 MT도 가보는 그런 학교생활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공사장에서 일만 해오던 저로서는 일반 고등학교를 마치고 들어온 학우들에 비해 스스로 자신감이 떨어지고 자격지심이 생기고 좀 그런 감정이 들었긴 했습니다.

대학 동기 중에서 제가 세 번째로 나이가 많았는데 나머지 젊은 학우들 틈에서 저 나름대로 잘 어울려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원래 제 성향이 밝고 긍정적인 편이라 아래위 학우들과 원만하게 지내면서 너무너무 즐겁게 지냈습니다. 지금도 교수님과 학우들과 종종 연락하면서 지내는데 기분이 참 묘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에게도 학교 친구가 생기고, 존경하는 교수님도 생겼으니 말입니다.

졸업 후 간호사를 꿈꾸다.

2학년 졸업반 때에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간호학원에도 등록했습니다. 맨 처음 간호학원에 등록하려고 원장 선생님과 면담하는데 저를 받아주기가 곤란하다고 했었습니다. 간호학원은 국비 지원을 받아서 실제로 취직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 위주로 교육하는 곳인데 저는 나이가 많아서 취업시켜줄 자신이 없기 때문에 받아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두 군데 간호학원에서는 거절당하였고, 마지막으로 연락해본 곳에서는 제 딸이 운영하는 한의원에 취업한다는 조건으로 등록을 받아주었습니다.

대학생활의 마지막 일 년 동안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공부했습니다. 주중에는 간호학원에 다니고, 주말에는 대학교에 다니는 생활이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기는 했습니다만 저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나의 꿈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희망 말이지요.

이숙희 간호사가 취득한 자격증. 사진=이숙희 제공

61세 되던 해에 저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보육교사 2급, 사회복지사 2급, 간호조무사 자격증, 요양보호자 자격증 등 모두 취득했습니다. 제 사진이 붙어있는 국가 자격증 말이지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더욱이 간호조무사 자격증 합격 발표하던 날 학원 원장님께서 직접 저에게 전화하시면서 학원 설립한 이래 60대를 합격시켜보기는 처음이고 열심히 공부해주어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원장 선생님께 오히려 저를 학원에 등록시켜주고 공부할 기회를 주어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했습니다.

이제는 취업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가 남았습니다. 보육교사 2급 자격증을 따는 과정에서 어린이집에서 실습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예쁜 할머니라고 잘 따라주었고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께서도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꼭 여기로 취업하라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저 또한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너무 사랑스럽고 보람도 있었지만, 퇴행성 무릎 관절염과 허리 통증으로 인하여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이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었습니다.

사회복지사 2급으로 실제로 취업해보려고 하니 나이 제한도 있었고 더욱 큰 걸림돌은 전산 능력이었습니다. 컴퓨터가 능숙하지 못하고 나이가 많은 상태라서 사회복지사로서 취직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병원에서 근무중인 이숙희 간호사. 사진=이숙희 제공

인생 이모작 ‘이숙희 간호조무사’

간호조무사의 일은 저에게 매우 적합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창원에서 살고 있고 딸이 운영하는 한의원은 거제도에 있었지만, 때마침 그곳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기도 했고요, 아픈 사람들에게 저의 손길과 말 한마디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더욱 매력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61세 때부터 지금까지 주 3회 파트타임으로 딸이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 창원에서 거제도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제 또래의 친구들이 아파서 한의원에 오면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고,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오면 부추기기라도 해드리고 싶고, 한 번이라도 더 만져드리고 싶고, 말동무라도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더욱더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느 환자분이 아줌마 선생님 오늘 출근 안 하냐고 저를 찾았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얼마나 뿌듯하고 기쁜지 모릅니다. 심지어 제가 출근하는 날에 맞추어서 한의원에 오신다는 분도 계신다. 저의 도움의 손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저의 인생 이모작은 ‘이숙희 간호조무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진행 중입니다.

한의원이라는 공간에서 간호조무사로서 일하면서도 제가 원했던 상담사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공간에서 정식으로 하는 상담사 역할은 아니지만, 몸과 마음이 아픈 환자들에게 따듯한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이미 제 꿈을 다 이룬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원장님의 친정엄마가 아닌 한 명의 직원으로서 다른 선생님들과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이 일하면서 잘 어울려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젊은 선생님들이 제가 출근하는 날이 기다려진다고도 그렇게 말을 해준답니다.

인생 이모작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부족한 학력 때문에 저 스스로 위축되고 부끄러웠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사실 그렇게 창피할 것도 없었지만 그 부족함 덕분에 늦은 나이에도 힘을 내어 이루어내야 하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볼 수 있었습니다.

네.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제 인생의 전반전도 나름 성공했습니다. 공사장 일은 겨울에는 유난히 춥고 여름에는 숨 막히게 더웠지만, 그 일 덕분에 제 가정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착한 남편이 제 곁에 있고, 바르게 커 준 아이들이 각자 삶에 충실하면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한의학 박사까지 마치고 거제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딸과 현대중공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착실한 아들과, 착한 심성으로 올곧게 일하고 있는 세무사 사위와 야무지고 똑 부러지게 살림 잘하는 영어선생님 며느리까지... 제 인생 전반전도 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 후반전은 제가 그토록 원하던 대학 생활도 해보고, 보육교사 2급 자격증,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이라는 국가 자격증도 따보고, ‘이숙희 간호조무사’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제 인생 이모작도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한없이 부족한 아내를 항상 자랑스럽다고 말해주는 남편에게 고맙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들에게도 고맙고, 공부할 수 있게 지원군이 되어준 딸에게도 감사합니다.

제 나름대로 제 인생 이모작 성공~! 이숙희 파이팅~! 이렇게 외쳐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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