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식의 인생 바라보기㊴] 우리 덕구가 달라졌어요

윤창식 칼럼니스트
  • 입력 2022.12.12 11: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창식-수필가-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윤창식
-수필가
-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1-

한덕구는 70 평생 '옛이나 지금이나'의 섬마을 고금도를 떠난 적이 없었으나 칠순을 맞아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난생처음 홀로 '해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검붉은 우뭇가사리 채취로 잔뼈를 키워왔으나 세월의 골다공이 그이의 뼈마디에도 스며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런가. 짐을 싸는 덕구의 허리가 잠시 흔들린다.

노 젖는 뱃사공은 어디로 갔을까, 고금도 가교리에서 마량포구에 이르는 통통배도 보이지 않고, 회한에 젖은 덕구는 버스에 몸을 싣고 꿈길 같은 연육교 위를 달린다.

그이의 첫 기착지는 뉴욕이었다. 덕구가 웅크리듯 키오스크 앞에서 서성이자 교포로 보이는 앳된 여학생이 다가와 고향말을 쓰면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대신 주문해주는 것이었다. "쌩소마치 고마버유 학상!"

자꾸 덕구는 두리번거린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남쪽의 남쪽 몰디브로 갈까, 산타페로 갈까, 차라리 돌아서 우즈벡 타슈켄트로 갈까, 배는 고픈디 뭘 묵어야 하나? 앞이 캄캄했다. 에라 모르겄다! 아무것이나 걸려라. 덕구가 들어선 곳은 튀르키예식 케밥집이었다. 덕구는 기름이 덜 빠진 양고기보쌈을 생전 처음 맛본 탓인지 속이 니글거린다.

'그려도 물 바같으로 나왔승께 외제술이 낫겄제잉?'

덕구는 비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술집을 찾는다. 어느 틈엔가 눈앞에 에스빠냐의 그라나다 까페 간판이 보인다. 덕구는 제법 몸이 거들먹거린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라나다로 푹 들어섰다.(어째 가는 곳마다 종업원이 모두 한국사람일까?)

"여그 술 한 병에 월마다요?"

물컵에 따뤄마신 술이 겁나게 독했는지 밖을 나서는 덕구의 몸뗑이가 휘청거린다. 늦가을 해는 벌써 해설피 기울어 바닷물에 낙조가 어리기 시작한다.

다음은 지중해를 건너 카사블랑카의 붉은 간판이 그를 유혹한다. 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덕구가 목을 쭉빼서 안쪽을 들어다보자 무슨 한글 명찰을 단 젊은 놈이 뜨악한 얼굴로 덕구를 내쫓는 것이었다.

이제는 정말 워디로 가야 하나? 해는 떨어지고 기력도 딸리고 어디라도 앉아서 쉬고 싶었다. 덕구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자 별빛을 가리운 높은 숙소 건물들에는 휘황한 밤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한글로 된 모텔 이름들이 즐비하다. 에로스, 뉴캐슬, 아델리움, 에딘버러, 융프라우, 몽마르지, 세느강...

덕구는 더럭 겁이 났다.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선가 반가운 뱃고동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가 흘러나왔다.

-2-

한덕구가 70평생 처음으로 해외나들이를 다녀오더니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덕구가 해외여행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네 친구 추범식이 홍어 안주와 막걸리를 싸들고 한덕구를 찾아왔다.

"어이 덕구 친구, 해외 다녀온 이야그 쪼깐 해주소."

"아따 별천지가 따로 없드만. 내가 그동안 헛산 것 같어!"

"아니, 대체 뭐시 그러코롬 좋든가?"

"먼저 말이여, 뉴요꾸에 갔는디 별천지더만. 베스트 라빈스킨가 뭐 그런 곳에서 아이수크림을 파는디, 우리 어렸을 적 사묵던 아이스께끼와는 모냥부터 다르고잉, 사묵는 방법부터 달라부러~."

"아니, 돈만 있으먼 사묵을 수 있는 거 아녀?"

"자네 모르는 소리는 하덜덜 말어. 아이수크림 가게 막 들어갔더니 기어숙이라는 기계가 떡 버티고 있더만."

"기어숙? 기어숙이 뭐당가? 고개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거여?"

"아따 촌놈들하고는 말이 안 통해부러야. 기어수쿠라는 것이 있는디 손꾸락으로 톡톡 치기만하먼 아이스크림이 자동으로 나와분다니께. 으흐흐."

"와따! 고런 신기맹기한 기계가 있당가잉. 그라고 또 워디 가봤능가?"

"걸어 댕기다봉께 배가 고파서 개밥집에 들어갔잖여."

"개밥집에? 아니, 외국에도 보신탕 사묵을 데가 있다고? 거짓말 말소."

"이런 모질이 같은 놈! 보신탕이 아니고 양괘기 보쌈집이랑께!"

"그런디 뭣땜시 개밥집이라 한당가?"

"그런 것까지는 나도 잘 몰러." (덕구는 터키식 케밥KEBAB을 개밥이라고 말한 것이렸다)

범식이는 마시던 막걸리 잔을 내려놓고 덕구 쪽으로 다가앉으며 묻는다.

"서양 아가씨들은 키가 겁나 크고 이삐다면서?"

"왐마, 늙으막에 뭔 그런 숭악한 소리여? 내가 말이여, 개밥집에서 나와 속이 쪼깐 니길거리길래 몽마르지 언덕 술집에서 삐루를 한 잔 해부렀지롱."

"몽마르지라고? 혹 몽마르뜨 아니여? 그러고 자네 불어도 모름시로 어뜩케 술을 시켰능가?"

"허허 이 싸람, 날 뭘로 보고. 이래부러 저래부러 몇번만 말해불먼 종업원이 군말없이 거시기해 줘부러. 으하하하하."

"와따 우리나라 말이 그렇게 좋아부러잉."(크으억~) 그라고 또 워디로 갔능가?"

"꽁짜로는 안 되겄는디? 하하. 어이 친구! 홍어 한 점 믹에줌시로 이야기해 주라고 해야징."

"자자, 홍어 코뗑이가 젤로 맛난 곳인께 자네 주뎅이 얼른 나한테 내밀어봐~."

"홍어 냄새가 코를 팍 찌릉마. 홍어는 바로 이 맛이여 (쩝쩝~). 비싼 차비 들여서 해외까지 나왔는디 그냥 돌아가먼 서운하잖여. 해는 뉘였거리고 저녁불이 하나둘씩 켜지더니 붉은 카시미론 이불맹키로 매끄럽게 글씨가 써진 곳이 내 눈에 들어오등만."

"카시미론? 그 이불 없어진 지가 언젠디. 자네가 헛것을 봤는갑네."

"아녀, 용필이 성님 동생인가봐, 명찰에 조옹필이라고 써붙이고 캬바레 입구에 서있길래 반가와서 싸인이라도 받을라고 말을 붙였더니 눈을 부라리며 대뜸 반말로 날 내쫓아 불더라고. 그 새끼 되게 싸가지없대."

"해외 나가서 젊은 놈한데 봉변을 당해부렀구먼. 안되았네."

"자네 시방 추운 데 앙거서 불판 꺽정하는 거여? 진짜는 다음 코스랑께. 하하."

"감질나게 맹글지 말고 크라이막스 얼릉 풀어놓소."

"그래도 막상 물 밖으로 나왔으니 몽마르지를 넘어 쎄느강에서 폼이라도 한 번 잡어볼라고 두리번거리는디 마침 쎄느강 불빛이 나를 쎄게 유혹하더구먼."

"그래서 프랑스 여배우랑 로망스 영화라도 찍고 왔능가?" 범식은 숨을 몰아쉬며 덕구 쪽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자네 인증샷이라고 들어는 봤는가?"

"쩌번에 수협 공판장에서 무슨 공증을 받어오라고 하데만은?"

"아따 깝깝해 죽겄네. 자네랑은 대화가 잘 안 되구먼."

"공증이나 인증이나 한끗 차인디 별나게도 까탈스럽네잉. 예전엔 안 그러더니?"

"진정하소 미안하네. 우리가 70년 불알친군디 누구를 디스하고 자시고 하겄는가."

"디스? 자네가 좋아하던 그 담배? 자네 담배 끊은 지 석삼년 되면서 또 피는가?"

"워메 미쳐불겄네. 디스... 아니 뭐시냐 그러니께 요세 아그들이 잘 쓰는 디스라는 말이 있다니께."

"그래잉. 디스든 예스든 쎄느강 이야그 마저 해주소."

그러자 덕구는 2G폰 폴더를 호기스럽게 열고는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사진 속에는 웬 늙은이가 '세느강모텔' 입구에 서서 저 멀리 고향바다가 그리운 듯 쓸쓸히 웃고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