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3] 문명관: 세계일주②...목숨 바친 항해일지, 세계지도를 바꾸다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12.1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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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통해 힘 키운 유럽, 20세기 세계를 지배
해적왕 드레이크, ‘무적함대’ 무찌르고 대영제국 기반 닦아
마젤란-엘카노 함대 생존비율 한 자릿수. 생환율 점점 높아져
조슈아 슬로컴의 단독항해 20세기 요트항해에 새 표준 제시

오 캡틴, 나의 선장님, 우리의 험난한 여정은 끝났습니다. 배는 모든 역경을 헤쳐 나왔고 우리가 원하던 보상도 얻었습니다. 항구는 가까워져 오고 종소리가 들립니다. ... 파도를 가르던 견고한 용골과 헤질 대로 헤졌으나 꿋꿋이 견뎌낸 선체를 바라보면서...

- 월트 휘트먼의 추모시 ‘O Captain! my Captain!’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65년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괴한의 총에 맞아 쓰러졌을 때, 미국의 계관시인 월트 휘트먼의 추모시 ‘O Captain! my Captain!’은 대통령을 함선의 선장에 비유하고 있다.

서양의 문학과 회화에서는 바다, 그것도 장엄한 대양(大洋)과 관련된 장면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고대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로 시작해서 20세기까지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 ‘해저 2만리’ ‘모비딕’ ‘노인과 바다’등. 세계의 대중들에게 익숙한 ‘해양문학’ 범주의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20세기 지배력은 바다에서 나왔다

이것은 어떤 차이를 의미할까. 그만큼 일찍부터 바다와 친했다는 뜻이다.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하여, 5백년 이상을 유럽인들은 앞장서 바다와 싸우며 바다를 개척했다. 그리고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무역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그들은 그것으로 세계의 경제를 지배하고 나아가 군사적 정치적으로 20세기 세계를 지배할 토대를 삼았다. 20세기 세계를 주무른 힘은 바로 바다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20세기 후반 세계의 최강자가 된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는 항공모함 전력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다.

조선 태종 2년(1402년) 조선에서 만든 최초의 세계지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16세기 필사본(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동쪽 끝에 조선반도, 중심에 중국 전도가 그려져 있다. 아프리카 유럽 등 당시 중국을 통해 유입된 지리정보가 반영되어 있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인들에게는 태평양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이 바닷길로 세계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다. 물론 그 이전, 코페르니쿠스의 논문(1543년) 이전에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던, 많은 모험가가 ‘둥근 지구’를 증명하기 위하여 항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지구 표면의 1/3을 덮고 있는 태평양의 존재를 몰랐다. 동쪽으로 아시아, 서쪽으로 아메리카 대륙까지 항해했을 뿐이다. 콜럼버스는 15세기 후반에 아메리카 대륙을 네 차례나 왕래하면서도 그것이 동쪽 탐험가들이 발견해낸 아시아(인도) 대륙의 일부라고 생각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엉뚱하게도 ‘인디언’이란 명칭으로 불렀다.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에서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해 협곡(현 마젤란해협)을 개척하고 있는 마젤란. 마젤란은 이 협곡에서 귀중한 식량운반선을 잃어 식량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세기에 그려진 상상화, 작가미상=퍼블릭도메인

적지 않은 유럽인들이 이 신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한 뒤 스페인의 마젤란이 처음으로, 남아메리카 남단의 협곡을 지나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그것을 인도양의 일부로 생각하여 곧 아시아가 나올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 바다는 거의 무한대처럼 길었다. 3개월 20일이나 항해한 끝에 겨우 괌섬을 발견했고, 잠깐의 휴식 뒤에 다시 열흘 넘게 더 서진하여 겨우 필리핀해역에 도달했다. 마젤란은 세부섬에 대포를 쏘며 스페인 국왕의 깃발을 꽂고, 막탄섬 지역까지 마저 ‘점령’하려다 원주민 전사들의 저항에 피살되었다. 남은 선원들 몇 명이 구사일생으로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스페인에 귀환했다. 이것이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1519~1522)다.

마젤란이 세계일주에 사용했던 빅토리아호의 모형. 칠레 푼타아레나 Museo nao victoria 소장 ⓒJuanmatassi, 2011

출발할 때 5척의 배에 265명의 선원이 있었으나, 돌아온 사람은 곧 침몰당할 것 같은 배 한 척에 타고 온 18명(생환률 6.7%) 뿐이었다.

최초 일주의 생존자들 중 한 명인 엘카노가 국왕 카를로스의 훈장을 받고 다시 두 번째 일주(1526~1536)에 나섰다. 이번에는 4척에 450명, 인원을 2백명 가까이 늘린 데다 처음 경험을 되살려 훨씬 치밀하게 준비하였지만, 바닷길은 여전히 거칠었다. 모두 39명이 겨우 살아 돌아왔다(생환율 13%). 그중에서도 10년만에 돌아온 마지막 귀환자 네 사람은 필리핀에서 포르투갈인들의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 다니다가 겨우 귀환한 것이었다.

마젤란원정대의 세계최초 일주항해 경로(1519~1522). 남미 대륙을 크게 돌아 태평양으로 나간 뒤 필리핀에 머물렀다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5척의 배와 265명의 인원으로 출발했던 마젤란 함대는 항해 중 질병과 기아, 선상반란, 파선, 전투 등으로 대부분 죽거나 실종되고 단 한 척의 배에 18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도표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목숨과 바꾼 항해기록...인류의 눈을 띄워주다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그들의 생환 덕분에 유럽은 태평양을 알게 되었다. 태평양의 표면적은 지구상의 전 대륙, 모든 육지를 합해놓은 것보다 더 넓다.

마젤란 원정대의 세계일주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등 유럽의 모험가들이 무수히 세계일주 항해에 도전했다. 위험성이 큰 대신 가지고 온 향신료나 황금을 팔면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익의 대부분은 이들을 위해 투자하는 국왕이나 귀족들의 몫이었다.

항로에 대한 정보교환과 함께 수개월씩 땅을 딛지 못하는 동안 생기는 질병과 영양 위생문제, 외국 선박끼리 충돌을 막기 위한 협정 등을 보완해 가는 사이에 무사히 생존해 돌아오는 비율은 점점 높아졌다. 여기에는 생존자들의 경험담이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항해하는 동안 배 안에서 작성된 공식기록, 즉 꼼꼼한 ‘항해일지’가 무엇보다 정확하고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프랑스 상선을 공격하고 있는 바바리안 해적들(Aert Anthoniszoon 유화, 1615년). 16~18세기 지중해와 인도양을 주름잡은 오스만 계열이 바바리안 해적들 때문에 유럽의 상선들은 인도양으로 나가기 위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야 했다. 퍼블릭도메인

마젤란과 엘카노를 포함하여 모든 장거리 항해자들은 출발 때부터 꽤 많은 종이를 배에 실었다. 몇 년간 쓰고 남을 정도로 준비했다. 배에는 으레 일지를 기록할 서기나 학자들이 적어도 몇 사람은 타고 있었다.

그들은 풍랑이나 교전상황, 또는 난파되어 생사가 위태로운 경우에도 항해일지를 가장 먼저 챙겼다. 그 기록은 국가의 재산이 되고 항로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상업적 목적으로는 그들이 어느 항로를 거쳐 어느 곳에 다녀왔는지를 입증할 증거로서도 중요했다.

항로정보와 별자리 관측기록, 기상과 지리 정보들은 새로운 지형이나 사물을 스케치한 그림들과 함께 그때까지 매우 불완전한 세계지도를 수정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해로도에는 각 해역에서 주의해야 할 해적들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었다.

목숨과 바꾼 항해일지를 통해 유럽인들은 미지의 세계에 차츰 눈을 떴다. 또 귀국 후 산문 형식으로 출판한 여행기들은 인기리에 팔려나가 생환자들에게 적잖은 부수입을 안겨주기도 했다. 온 유럽이 새로이 밝혀지는 신대륙과 바다 이야기에 달아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를 안겨다 주는 동방의 향신료와 금은 같은 보석들, 새로운 문물을 가져오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점점 커졌다. 가는 곳마다 왕국의 깃발을 꽂아 해외 영토를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포와 소총을 들고 가서 원주민들을 왕국에 복속시키는 것은 물론, 누군가 먼저 도달한 곳에서는 자기들끼리 쟁탈전도 불사했다. 단순한 선원들뿐 아니라 전쟁만을 위한 무장군인들을 동반하기도 했다. 전투병력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은 첫 번째 영국 원정대를 이끈 프랜시스 드레이크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와 해적왕 드레이크 이야기를 담은 삽화. 스페인 국왕 펠리페1세로부터 항의 서한을 받고 고민하는 여왕에게 해적왕 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스페인 왕에게 답을 보내십시오. ‘당신의 수염이 너무 긴 것 같다’고 말입니다.”

해적왕 드레이크의 첫 번째 무사귀환

꽤 많은 선단이 세계일주 원정에 도전했지만, 끝까지 무사히 살아 돌아온 최초의 원정대장(선장)은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그는 1500년대에 유명한 영국 해적이었다.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바다 위에 법이 있었던가. 아직 국제법이 거의 없던 시대에 바다는 힘을 가진 자들의 영역이었다. 해적들이 판을 쳤다. 그리고 해적들 뒤에는 지상의 권력이 있었다. 중세의 바이킹에 이어 16세기 지중해는 오스만제국을 등에 업은 무슬림 해적들의 놀이터였다. 오스만의 보루 알렉산드리아(이스탄불)를 공략하여 그 기세를 꺾은 스페인함대는, 특히 1580년 포르투갈과 합병하여 이베리아 연합국이 된 이후 천하무적이 되었다. 그 유명한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해적왕 드레이크는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오스만 해적과 이베리아 해군이 휩쓰는 대서양을 영리하게 휘젓고 다니며 상선들에 큰 피해를 줬다. 스페인과 프랑스 등 주변국들의 항의가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드 1세에게 쇄도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여왕은 야심가였다. 아직 세력이 미미한 영국을 해양강국으로 키우고 싶은 야심 때문에 오히려 드레이크를 부추겼다. 국왕 인장이 찍힌 ‘약탈허가증’까지 발급해주고 그 대가로 약탈 수익의 일부(아마도 5대 5)를 상납 받아 국고도 채웠다.

참다못한 스페인이 선전포고해오자 여왕은 해적왕 드레이크를 영국해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맞섰다. 1588년 무적함대의 침공, 결과는 어땠을까.

1588년 8월 영국을 침공해온 스페인 무적함대와 이에 맞선 영국 해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테피스트리 그림. 영국 왕립그리니치박물관 소장. 퍼블릭도메인

일단 함대의 규모 면에서 영국군은 무적함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사령관이 된 드레이크는 머리와 기술로 싸우는 사람이었다. 바다를 새카맣게 뒤덮고 다가오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학익진을 모른 척 놓아두었다가 빠르고 작은 군선들을 이용해 뒤에서 기습하였다. 흐트러진 무적함대가 대륙 쪽 칼레 해안에 집결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화약을 실은 배 다섯 척이 함대 사이로 흐르듯 다가왔다. 사정없이 폭약이 터지는 가운데 스페인 함대가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때, 이번에는 도버해협의 거친 물살, 때마침 불어온 풍랑이 그들을 격파했다. 영국 해군의 손실은 폭약을 실은 다섯 척 외에 거의 미미했다. 역사가들은 기록했다. ‘신이 영국을 위하여 무적함대를 무찔러주었다’고.

이 단판 승부로 무적함대는 거의 궤멸하고 스페인의 ‘태양’은 영국에 넘어왔다. 그렇게 엘리자베드 1세와 해적왕 드레이크는 상식을 뛰어넘은 합작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기초를 닦았다.

이 해전이 있기 전에 드레이크는 여왕이 하사한 다섯 척의 배를 가지고 세계일주의 임무를 완수했다(1577~1580).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단들처럼 해외영토를 개척하도록 한 것이다. 드레이크의 선단은 164명, 기함 150톤 규모로 앞선 다른 나라 원정단들에 비해 작은 규모였지만, 짜임새 있게 준비를 갖췄다. 예상기간 2년 치 식량의 절반만 실었다. 해적 출신답게 중도에서 만나는 스페인 포르투갈 상선들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약탈해 충당했다. 배도 약탈하고 선원이나 수로안내원도 납치했다. 예정보다 1년이 더 걸렸으나, 그의 원정은 꽤 성공적이었다. 164명 중 59명이 귀환했다(생환율 36%). 약탈한 10톤 이상의 은괴와 45킬로그램의 금덩어리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무사히 일주를 마치고 살아 돌아온 최초의 선장이었다. 이를테면 마젤란 함대가 최초의 세계일주에 성공했더라도 마젤란 자신은 중도에서 전사했지만, 출발할 때 선장이었던 드레이크는 여전히 선장인 채로, 그것도 호사스러운 위엄을 잃지 않은 선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많은 노획물을 상납받은 여왕은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고 정식으로 영국 해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스페인-포트투갈 통합 군단(무적함대)을 물리치게 한 것이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최초의 단독일주 항해자 조슈아 슬로컴과 그의 항해기 출판물.

조슈아 슬로컴의 기념비적인 단독 일주

이제 20세기로 건너와 보자.

식민영토 개척, 무역항로 개척과 같은 ‘국가적 사업’으로 시작된 근세의 해외원정 항해는 세계질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한동안 지중해와 아덴만, 그리고 카리브해 뱃길에 득실거리던 해적들(해적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지만, 여기서 19세기 이전의 이야기에 더 머물 수 없으므로 생략한다)은 유럽과 미국 해군의 합동작전으로 거의 사라졌다(미국 해군은 대서양과 카리브해의 해적 소탕을 위해 창설되었다가 상비군이 되었다). 국경을 건널 때의 절차 같은 것도 크게 편리해졌다.

지도는 거의 실제와 가까이 보정되었고, 배들은 무선전신을 갖춰 자신의 상황을 가까운 항구에 알릴 수 있었다. 항해 중인 배들끼리 주파수를 맞춰 항로에 대한 정보도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보관식량의 개발, 비타민과 통조림 같은 것이 있어, 굳이 배 위에 신선한 식품을 위해 화분을 설치하거나 살아있는 동물을 싣지 않아도 되었다. 더 이상 세계 일주를 위하여 대규모 선단을 꾸며야 할 필요가 줄어든 것이다.

초기에는 해적에 대비한 무장이 필수였으나, 국제법 질서도 생겼다.

비교해보자면 ‘80일간의 세계일주’ 루트를 따라 72일 만에 일주를 마친 신문기자 넬리 블라이가 뉴욕을 떠날 때, 퓰리처 사장은 호신용 권총 사격법을 가르치려고 했었다. 그러나 넬리 블라이는 이를 거절했다. 정해진 교통수단으로 예정된 도시들을 거쳐 여행하는 경우 여자 혼자서도 충분히 안전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고, 실제로 그것을 입증했다.

하지만 바닷길도 그러할까. 이를 몸소 실험한 사람은 조슈아 슬로컴이었다.

1898년 세계일주 단신항해에 성공한 조슈아 슬로컴의 요트 스프레이호. 굴채취선을 개조한 범선으로 길이 11미터 배수량 13톤 이하의 작은 배였다. 슬로컴의 일주는 오늘날까지 요트 일주항해의 기준을 제시했다.

조슈아 슬로컴(1844~1909?)은 본래 배를 타던 사람이었다. 16세부터 선원생활을 하며 남미대륙을 두 차례나 돌았고 아시아 항해 경험도 풍부했다. 18세에 이등항해사가 되었고, 이후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샌프란시스코 등을 항해했다. 27세 때 시드니에 기항했을 때, 천생연분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한 뒤 부부는 13년 정도를 함께 항해하며 지냈다. 그 사이에 일곱이나 되는 자녀를 바다 위, 혹은 배가 기항하는 외국도시에서 낳아 길렀다.

30세가 되던 1874년 일이다. 그가 화물선으로 필리핀에 기항했을 때, 미국의 본사가 부도나 배를 파는 바람에 그는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자 그는 수빅만에 머물며 자기 돈으로 배를 만들려 했다.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을 때 마침 새 주인을 찾는 적당한 선박을 알게 되었다. 90톤급 파투(pato)호. 자신이 건조하려고 계획했던 것보다 작은 배였지만, 그는 이 배를 구입하여 큰 비용을 절감했다. 마침내 그는 선주가 된 것이다. 20년 동안 모두 8척의 상선을 탔는데, 4척의 배는 선원으로, 4척의 배는 선장으로서였다. 함께 배를 타던 아내는 14년만에 선상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보스턴에 사는 누이들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잠시 뱃일하다가, 이번에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항해를 계획했다. 혼자서 바다를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1895년 4월,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그는 혼자 조정할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배로 항구를 출발했다. 길이 약 11미터 배수량 13톤 이하.

나는 세계 일주 항해를 결심했다. 1895년 4월 24일 아침 바람이 맑았다. 정오에 닻을 올리고 돛을 폈다. 나의 배 스프레이호는 겨우내 아늑하게 정박해 있던 보스턴항을 떠났다. 돛이 팽팽해지고 출발 준비를 마쳤을 때 12시를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막 승객을 태운 연락선 하나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스프레이호는 재빨리 선체를 기울여 그것을 피해 지나쳤다. 
맥박이 흥분되어 세게 고동쳤다. 나의 발은 상쾌한 공기 속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이젠 돌이킬 수 없음을 느꼈다. 내가 완전히 이해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 조슈아 슬로컴 항해기

눈 감고도 항로가 훤할 정도로 노련한 선장이었던 슬로컴은 항해 준비도 남달랐다. 선박은 중고 굴 채취선을 구입해 손질한 것이었고, 장비도 꼭 필요한 것만, 그것도 대개의 장비는 중고품을 수리한 것들이었다. 비용을 아끼느라 앞면 유리가 없는 고물 주석시계 하나를 사서(그것도 도중에 분침마저 떨어져 나갔다) 애지중지 손질하며 고급 장비만큼 유용하게 사용했다.

다행히도 출발 전에 한 잡지사와 원고 계약을 맺어 여행자금이 준비되었다. <센추리 매거진>이 이제까지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는 단독항해일주 여행기를 단독 전제하기로 한 것이다. 출판사는 슬로컴이 항구에 기착할 때마다 우편으로 보내는 원고를 싣거나 출판하고, 그때마다 원고료를 송금했다.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항해 중 위험은 상존했다. 처음에는 무역풍을 따라 항해하기 좋은 서쪽 방향 항해를 시도했으나,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 입구에 도달했을 때, 수에즈 운하가 여전히 해적들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동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남미로 내려가 혼 곶을 돈 뒤 태평양을 먼저 건너기로 한 것이다. 남미의 위험지역을 지날 때는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배들을 뿌리치기 위해 마르티니 소총으로 경고사격을 해야 했고, 밤에는 잠든 사이에 해적이 올라타는 것을 막기 위해 갑판 위에 압정을 뿌려두기도 했다. 허수아비를 준비하여 배 안에 몇 사람이 타고 있는 것처럼 쇼를 벌이기도 했다.

긴 해로에서 70일 넘게 땅을 밟아보지 못한 기간도 있었다. 이럴 때 요구되는 정신력, 강한 멘탈은 장기 항해자에게 필수적인 덕목이다. 오랜 선원생활에 지쳤던 그는 바다 위의 수도자처럼 그 고독을 즐겼다.

슬로컴은 첨단의 항해 장비를 갖추는 대신 고대인들이 해와 달, 별들을 보며 길을 찾던 전통적인 ‘추측항법(Dead reckoning)’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방향을 유지하도록 구조를 잘 수리해둔 덕분에 인도양에서는 3천km 넘는 직진항로를 조타장치 한 번 건드리지 않고 항해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로드아일랜드에 귀환한 것은 1898년 6월. 74,000km(4만 6천 마일)의 대장정에 걸린 기간은 3년 2개월 10일이었다. 때마침 멕시코 영지를 둘러싼 미-스페인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슬로컴의 도착은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 뉴스가 시들해졌을 때 미국의 신문들은 잊지 않고 세계 최초 단독일주 항해에 대하여 대대적인 해설 기사들을 다뤘다.

그의 여행기는 1901년에 출판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곳곳에 강연 초청을 받았고 백악관에도 초청되었다. 그는 보스턴 근처에 작은 농장을 구입하여 아이들과 함께 정착하였다. 하지만 겨울이면 어김없이 혼자 스프레이호를 타고 카리브해에 가서 선상생활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문명관: 세계일주①...'80일간의 세계일주' 현실이 되다

슬로컴의 단독일주 성공은 많은 모험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1900년부터 1999년가지 사이에 134명이 단독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했다. 2000년대 들어 첫 20년 동안 그 숫자는 230명으로, 100명이나 증가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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