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며 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12.21 11:04
  • 수정 2022.12.2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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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때로는 소리와 냄새로도 오는 것
풀 향기처럼 아득한 옛 냄새와 같이
아우성치며 몰려가는 보리밭이 있다

오월, 청산도에 가면,
보리와 바다의 화음이 눈물겹다
하늘로 올라간 청산도의 천수답(天水畓)
그 논길 따라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
오늘도 소는 그 자리에 앉아 천천히 되새김질한다

- ‘청산도에 가면 오월, 청보리가 한창이다 중’, 윤재훈

(부용천변. 촬영=윤재훈)
(부용천변.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달력 한 장이 외롭게 벽에 걸려있는 시간이 되면 고향이 생각난다. 꽃피는 봄날 여러 장의 달력이 여유롭게 펄럭거릴 때, 봄날의 산하를 찾아 이곳저곳 숨가쁘게 뛰어다녔는데, 마지막 달력 한 장만 반토막으로 남아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보게 한다.

고향에 가면 지금도 아카시아 흰 꽃이 흐드러지게 신작로를 따라 흩날릴까? 뻐꾹새는 지금도 남의 둥우리에 알을 낳고 목이 쉬도록 울고 있을까?’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던 그 고향 땅에 기억.

어찌 봄은 꽃만이 아름다우랴
청산도에 가면 오월, 청보리가 한창이다
그 출렁임에 바다가 더욱 환하다

추억은 때로는 소리와 냄새로도 오는 것
풀 향기처럼 아득한 옛 냄새와 같이
아우성치며 몰려가는 보리밭이 있다

오월, 청산도에 가면,
보리와 바다의 화음이 눈물겹다
하늘로 올라간 청산도의 천수답(天水畓)
그 논길 따라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
오늘도 소는 그 자리에 앉아 천천히 되새김질한다
그들에게 소는 가축이 아닌 한 사람의 가족이라던
농사는 성급함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것이라고
단단히 이르시던 할아버지 말씀
청보리 따라 더욱 생생하게 일어나고.

오늘 그곳에 청보리가 살찌기를 기다리는 농부
깜부기를 솎아내던 허기진 여심(女心)은 보이지 않지만
가을 곡식이 다 떨어지고 나면 노을 지던 그 춘궁기(春窮期)
해마다 넘겨야 했던 통과의례
지금도 우리 아버지에게는 눈물겹단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보리 서리 끄스름으로 채우던 유년기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고
언 땅을 뚫고 올라오던 황금색의 싹들

추억에 대한 허기인가
그곳에 가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청보리, 청보리, 청보리밭
그렇게 봄날은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다
- ‘청산도에 가면 오월, 청보리가 한창이다’, 윤재훈

국민(초등)학교 이학년 때 여수로 이사 와 단칸셋방에 살았다. 그러나 부모님이 부지런하여 금방 이 층 나무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 슬하에서 어려움 없이 살았지만, 저지금을 난 후에는 한 해에 몇 번씩 이사를 가야 하는 서러운 셋방살이 시절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고모리에서. 촬영=윤재훈)
(고모리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여기’라는 말도 참 좋다. 삼세간(三世間)이라는 말이 있지만, ‘개똥으로 굴러도, 이승 (二乘)이 좋다’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의 나의 모습이 바로 삼세의 모습이 아닌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생을 저당 잡히라는 성직자들이 있다. 그들의 말에 속아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고 가족과 불화하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그래서 아베라는 전 수상에게 총질까지 하는 안타까운 젊은이까지 생겨났다. 종교라는 탈을 쓰고 가족의 삶까지 송두리째 앗아가는 나쁜 성직자들이 주위에 횡횡한다.

그것을 종용하는 성직자(?)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족벌 경영을 하고 뒤로는 자식들에게 세습한다. 종교인의 본질마저 탈각하고 마는 어리석은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육근(六根)이 청정(淸淨)해야 한다. 삼세는 일체(一體)이다. 현생이 안온(安穩)하면 삼세도 안온할 것이다.

신륵사 강월헌(神勒寺江月軒). ⓒ게티이미지뱅크 

‘여주’라는 말도 느낌이 참 좋다. 수세미와 비슷한 박과 식물, “여주, 여주”하고 입 안에서 자꾸 굴리니, 짙푸른 풀냄새가 난다. 다시 입 안에서 굴리니 푸른 오이 넌출이 딸려 나오는 것 같고, 여주 신륵사라는 천 년 고찰도 보인다. 산속이 아닌 남한강 강변에 세워진 조금은 특이한 절이다. 고려 때 고승인 나옹화상이 머물러 크게 번창했던 곳, 망해가는 고려의 세 충신이었던 삼은(三隱)인,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 목은 이색이 살았던 시대이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어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제

초등학교 6학년 국어책에 나온 시조이다. 목록 하나에 9수가 있었는데, 5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고향 땅과 빗기어 생각나는 시들이다.

야은의 스승이었던 목은은 이 사찰에 대장경을 봉안했고, 후에 나옹의 제자인 무학의 영정까지 봉안되었다.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고 크게 번성하여 보은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그 이름을 찾은 남한강가의 고즈넉한 사찰이다. 목은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끝까지 그 절개를 지켰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호올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목은 이색

목은은 사실상 여말선초(麗末鮮初)에, 거의 모든 사대부의 스승이 되어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말, 그의 족적이 뚜렷하다. 

신륵사 다층석탑. ⓒ게키이미지뱅크 <br>
신륵사 다층석탑. ⓒ게티이미지뱅크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이 오면 그런 곳에 찾아들어 한 며칠 하염없이 탑만 바라보며, 명상에 들고 싶다. 아가의 둔부처럼 부드럽게 펼쳐진 한국의 능선을 바라보며, 한(恨)과 흥(興)으로 응축된 한국인의 심성을 오래된 간장처럼 묵히고 싶다. 감나무에 저물도록 수많은 초롱처럼 달려있는 홍시를 바라보며, 까치밥 하나 남겨놓은 조선의 심성을 느끼고 싶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

(무너진 천 년 왕국, 바간. 촬영=윤재훈)
(적선을 하는 테라와다 승려. 촬영=윤재훈 기자)

‘여태’라는 말은 사람을 더욱 숙연하게 한다. ‘여태, 뭘 했을까?’ 본질을 잃어버린 체 프라이팬 위에 날뛰는 메뚜기처럼 살아오고 있지는 않았는가? 언제나 허물 같은 것에만 집착한 채, 욕망을 향해 질주해 오지 않았는가?

본질적으로 세 끼를 먹어야 하는 인간(人間), 허기는 항상 욕망을 부르고, 그 본질을 놓치고 살기가 쉽다. 달력 한 장이 팔랑거리는 한 해의 끝에 서면, 놓치고 살아온 것들이 더욱 크게 보인다.

달력이 한 장 남았다.
2022년이라는 말이 입에 채 익기도 전에, 2023년이 다가온다.
옛사람들의 말처럼 젊은 날에는 시간이 정말로 천천히 가더니,
세월이 왜 이리, 득달같이 가는지 모르겠다.
눈을 들며 ‘눈깜작새’처럼 벌써 저 모퉁이로 한해가 달아나고,
또 하염없이 붉은 새해가 밝아온다.

달력 한 장이 겨울 나뭇가지에 요행히 걸린 가랑잎처럼,
팔랑, 팔랑, 흔들리고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대는 또 무엇을 바라 살 것인가?

(스러진 천 년 왕국의 꿈이여. 촬영=윤재훈 기자)

숙연하게 한 장 남아있는 달력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평생 이런저런 바람 앞에 만장처럼 휘둘린 삶을 참회한다.

묵은 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날 가고 달 가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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